# 117화
사황성의 전력이 서성현으로 들어서는 순간 남궁세가의 지붕 위로 여러 개의 불꽃이 터지며 하늘 위를 수놓았다.
삼천의 대군이 남궁세가에 더 가까워졌을 때는 수많은 매와 비둘기가 밤하늘을 날았다.
여덟 부대로 나눈 대군이 남궁세가를 팔방으로 둘러싸고 흉흉한 기세를 내 뿜고 있을 때 세가 안에서는 분주한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신호가 있었으니 오래 끌 수 없다! 단숨에 박살 낸다. 쳐라!”
사황성주 패천후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숙의 일행이 제일 먼저 남궁세가의 담을 넘었다.
눈동자가 길게 세로로 찢어져 싸늘한 한기와 살기를 사방으로 퍼트리는 공숙.
오른손에 쥐고 있던 그녀의 채찍이 제일 먼저 남궁세가 무인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후키쉬! 텅!
사방으로 무서운 눈동자를 굴리며 적을 찾는 공숙의 모습에 같이 담을 넘었던 사황성의 무인들이 흠칫하며 놀랄 정도였다.
그런 무사 중에는 이제는 귀형가의 가주가 된 비영도 있었다.
‘역시 제정신은 아니었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적을 찾아 헤매는 공숙 일행.
연수는 성주의 옆에 붙어 빗살같이 남궁세가의 지붕 위를 날았다.
-기감에 잡히질 않네.
-식솔들을 데리고 도망치려는 거 아닐까요?
연수의 전성에 성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순간 하늘 위로 승천하듯 치솟는 성주의 신형.
한숨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가 땅을 박차며 성주의 옆으로 솟아오르는 연수였다.
-위에서 본다고 뭐가 변하나요.
-제일 귀찮은 짓거리를 하는구나.
-별수 있나요. 발로 뛰어서 찾아야지.
-그러다가 놓치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럼 제가 도발을 좀 해볼까요?
-어떻게?
씩 웃은 연수는 땅으로 내려서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내력을 담아 쩌렁쩌렁 외쳤다.
“나 암수일살이 왔다! 남궁성의 씨를 말려주마!”
순간 일렁이는 기세와 살기. 연수와 성주는 그 거대한 기세를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공중에서 움직이는 성주와 땅에서 달려나가는 연수.
지나가면서 성의 무사들과 손을 섞으며 막아내는 무인들에게 바늘을 날리는 걸 잊지 않는 연수였다.
“컥! 도, 독을···!”
“비겁한···!”
연수에게 도움을 받은 무인들은 영문을 알 수 없이 다른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남궁세가의 커다란 전각 뒤쪽으로 있던 조그마한 별채에 성주가 가까워지자 지붕을 뚫으며 날아오르는 남궁진환.
그의 검에 맺힌 선명한 푸른 강기가 성주에게 날아들었다.
천천히 뽑히는 성주의 도.
성주의 도에서는 타들어 가는 듯한 거대한 강기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정적으로 유지되는 남궁진환의 강기와 동적으로 유지되는 일견 불안전해 보이는 성주의 강기.
그런 둘의 강기가 허공에서 부딪히는 순간.
-스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천지 사방으로 경기가 날아들었다.
뒤늦게 도착한 연수는 손을 몇 번 휘저어 날아오는 경기를 쳐냈다.
잠시 팔짱을 끼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는 연수.
보통의 싸움 구경도 아니고 입신경의 고수와 초절정의 고수 간의 싸움이었다.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남궁세가 가주의 강기는 배는 커 보이는 성주의 강기를 상대로 흔들림이 없었다.
저 정도의 크기 차이면 밀릴 만도 한데 조금도 힘에서 밀리는 경향은 보이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강기를 사용하는 고수들끼리의 싸움으로 가니 초식의 차이가 더욱더 크게 보였다.
연수가 아닌 다른 무인들이 보았다면 그저 허공에서 붉은 빗살과 푸른 빗살이 날아다니며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연수의 눈에는 중도의 묘리와 중검의 묘리가 상극처럼 서로를 물고 늘어지는 초식의 싸움이 보였다.
‘아! 저런 방법이! 오! 저걸 저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싸움을 지켜보는 연수의 입이 열렸다.
“지금 죽기 싫으면 그대로 있어라.”
시선을 주지 않고 말하는 연수를 상대로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눈치도 없는 놈들아. 저런 싸움 구경은 평생을 가도 한번 할까 말까 한 기연 중의 기연인데 꼭 방해를 해야겠어?”
빙글 돌아가는 연수의 손목.
그와 동시에 나타나는 단도.
그걸 본 무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암수일살! 형님의 원한을 갚겠···.”
거기까지였다. 순간 늘어지듯 다가와 목을 긋고 지나가는 연수를 상대로 무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유야! 이놈!”
-깡!
머리를 양단할 듯 내리찍어오는 검을 가볍게 막은 연수.
검이 막힘과 동시에 무거운 중검이 허리를 양단할 듯 휘둘러져 왔다. 하지만 연수의 몸에 닿기에는 검의 속도가 늦었다.
-퍼퍽!
“그런 느린 검에 누가 당해주나? 너구나? 남궁세가의 장남이자 동생에게 소가주의 자리를 빼앗겼다던 머저리가?”
“뭣!”
꽤 아픈 말이었던지 입으로 흐르는 피를 거칠게 뱉어낸 무인이 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내 친히 네놈 동생 모가지를 따서 소가주 자리를 비워 주었는데, 어찌 보면 내가 은인이 아니던가?”
연수의 말소리는 분명 평소와 같은 음량이었지만 은근히 내력을 담아 말하고 있어 격전을 펼치고 있는 남궁진환의 귀에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닥치거라! 이놈!”
검기를 가득 담은 중검을 내려쳐 오는 검을 가볍게 피해내며 쉴새 없이 입을 놀리는 연수.
“그때 네놈의 동생 놈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목숨을 구걸하는데 어찌나 짠하던지 하마터면 진짜로 살려줄 뻔했지 뭐냐? 그래도 내 네놈을 생각해서 그 모가지를 그어···.”
-쾅!!!
순간 잔상을 남기며 물러서는 연수.
간발의 차이로 그 자리에 떨어져 내리는 남궁진환이었다.
후끈한 어깨를 살펴보니 불에 덴 것처럼 따가우며 화끈거렸다.
조금만 피하는 것이 늦었다면 왼팔을 그대로 빼앗길뻔한 연수였다.
하지만 남궁진환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상대는 입신경의 고수.
그런 고수를 앞에 두고 딴짓을 했으니.
남궁진환은 기이하게 꺽인 왼팔을 자신의 검으로 싹둑 잘라내고는 혈도를 짚어 지혈했다.
“아버님!!!”
“호들갑 떨 것 없다. 검객의 팔은 검을 잡는 손 하나면 충분할 터.”
연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놈이 내 아들을 죽인 암수일살이구나. 이제야 네놈 얼굴을 제대로 보는구나.”
“처음 뵙습니다. 암수일살 고연수라 합니다.”
“그 나이에 그 경지라. 내 아들놈이 이겨낼 재능이 아니었던 게구나.”
“그는···. 저보다 강했습니다. 다만 제 암수와 함정에 빠져 허망이 갔습니다.”
“그랬던가? 그 아이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남궁진환.
연수는 잠시 성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성주.
“그는 저와는 큰 원한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작은 원한에 눈이 멀었을 뿐입니다.”
“...”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진환.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남궁진환이 성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살려줄 수 없겠소?”
고개를 가로 짓는 성주.
“그렇소?”
그런 성주를 향해 연수가 입을 열었다.
남궁진환과 그의 아들들 뒤로 갓난쟁이와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있는 몇몇 여인들이 보였기에.
“굳이 갓난쟁이와 애들까지 죽일 필요가 있습니까?”
“언제 저 어리고 힘없는 아이들이 천추의 한이 될 줄 모르는 게 무림 아니더냐?”
“그건 일반적인 이야기고 성주님은 사황성주 패천후입니다.”
그 말이 묘하게 걸렸다.
연수를 바라보는 성주. 연수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겨우 남궁세가입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진지한 연수의 눈을 보며 성주는 피식 웃었다.
“그것도 재미있겠지. 좋다. 뒤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지금 당장 떠나.”
남궁진환은 잠시 연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세명의 여인과 다섯 명의 아이를 떠나 보냈다.
“항상 꿈에서조차 찢어 죽이고 싶었던 너에게 빚을지는 구나.”
“세상사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 법이죠.”
“하나만 더 빚을 질 수 있을까?”
말을 마치는 남궁진환의 검에 푸른 검강이 솟아올랐다.
성주가 만류하려 들었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성주를 막아선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의 단도를 쥐었다.
그의 단도에서 한자 가까이 되는 붉은 검강이 솟아 나왔다.
서로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둘.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같은 순간 서로에게 달려드는 둘이었다..
신형을 늘어뜨리며 순식간에 서로를 향해 짓쳐들어가는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내려찍는 남궁진환.
양손으로 단도를 휘둘러 그 검을 막아내려는 연수.
-스아아아 휘 ~
기묘한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주변으로 경기들이 날아들었다.
기막을 쳐 날아오는 경기들을 막아낸 패천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철컹!
중검을 손에서 떨어트리고 뒤로 도는 남궁진환의 얼굴이 천천히 기울어지며 결국은 자신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아버님!!!”
목이 떨어져 내린 자신의 아비를 바라본 세 명의 자식들은 검을 뽑아 들고 연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궁진환과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일 합의 여운을 즐기던 연수는 몸을 일으켜 검을 휘두르는 아비 잃은 세 명의 아들들 사이를 도도히 걸어 나왔다.
분명 그렇게 보였다.
그들이 검을 휘두르는 사이를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처럼.
연수가 그들을 지나쳐 오자 움직임을 멈췄던 그들은 피 분수를 뿜어내며 허물어졌다.
“쯧쯧 그러게 가만히 지켜볼 것이지.”
“우웩!”
말과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는 연수.
피를 토하는 연수의 승모근이 피로 물들었다.
“후우, 어차피 제 은원의 고리. 제가 마지막을 정리하는 게 순리죠.”
영원 같은 찰나의 한때 모든 집중력이 최고조에 오르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 일 합의 순간에 연수의 단도는 남궁진환의 중검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당연했다. 연수는 한 손의 단도로 검을 막아서며 다른 손의 단도로는 남궁진환의 목을 치고 있었으니까.
단도와 검이 닫는 순간 연수는 죽음을 직감했다.
애초에 한 손으로 막아낼 만큼 만만한 일격이 아니었다.
혼신을 다한 자식 잃은 아비의 목숨을 버리는 일 검.
그 일 검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겨우겨우 몸까지 틀어가며 남궁진환의 검을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밖에는 말 할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왼팔이 멀쩡했다면? 그가 성주와 싸우기 전이었다면? 아마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눕힌 것은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승모근의 상처는 그런 연수의 자만심과 안일함을 일깨워주는 일종의 교훈이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어 널린 게 기인이라 하더니. 그의 일 검은 각오이자 체념이었고, 무인의 삶이자 마지막 정화였네요.”
다시 눈을 감고 남궁진환과의 일 합을 되새겨 보는 연수였다.
“중상을 입고도 좋다고 떠드는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인 아닙니까?”
성주는 피식 웃으며 연수에게 조그마한 약병을 하나 던졌다.
고급 금창약.
이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연수는 웃옷을 저치고 승모근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랐다.
“검강에 당하고 그 정도 상처면 정말 천운이다.”
“알아요.”
천운이랄까? 아니면 연수의 재능이랄까?
베이는 순간까지 몸을 틀며 검상을 최소화하는 연수의 움직임을 성주는 똑똑히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검에 베이면서 몸을 미세하게 움직여 베이는 부분의 상처를 최소화한다?
들어본 적도 없는 반응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성주는 응급처치를 끝내고 옷을 바로 입은 연수와 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 사방에는 불타오르는 전각들과 소리를 치며 울부짖는 무인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아 잠깐 먼저 가세요.”
“뭐하게?”
“본업이요.”
씩 웃은 연수의 신형이 사라지자 사황성주 패천후의 고개가 가로 저어졌다.
남궁진환의 시체로 돌아온 연수는 그의 품에서 한 권의 비급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품을 뒤졌지만, 그 어떤 비급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연수의 머릿속이 번쩍했다.
“아 그 여인들이 가져갔겠구나. 쩝.”
아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연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제왕신공을 얻었으니.’
제왕검형 또한 꼭 보고 싶긴 했지만 제왕신공을 얻었으니 이걸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 연수였다.
사방에서 검진을 짜고 사황성의 무인들에 대항하는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보였다.
과연 창궁검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주와 그의 직계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은 순간 이미 싸움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