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마차와 말을 통째로 실고도 많은 사람을 태우는 대형 범선은 많은 상인부터 백성들까지 고루 이용하는 몇 안 되는 보선이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활발히 움직이며 배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사이로 활기가 퍼져 나왔다.
마차와 말을 모두 싣고 연수와 공숙이 먼저 자리 잡은 방으로 들어서는 소개와 중년인.
한 손에 책을 들고 읽고 있는 연수가 슬쩍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연락은?”
“첫 번째 전서응을 날렸습니다.”
“몇 마리 남았지?”
“이제 네 마리 남았습니다.”
“태령검문을 흔들고 나면 두 번째를 날리고 안휘에 들어서면 세 번째를 마지막으로 결사의 날까지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면 남은 매를 모두 날리세요.”
“예.”
다시 시선을 들고 있던 책으로 옮기는 연수.
소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그리 읽어? 이제 와 글공부라도 하냐?”
“이거? 그냥, 비도문 문주의 품속에 있던 비급.”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낸 연수의 말에 소개의 인상이 굳었다.
반면 공숙과 중년인은 눈을 반짝이며 연수를 바라봤다.
“너도 볼래?”
애초에 정파인으로서 자랐던 소개였다.
남의 비전을 함부로 본다는 것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비도문의 비전이라는 말에 그깟 거부감 따위는 얼마든지 뒤로 밀어 놓을 수 있는 소개였다.
“봐도 돼?”
“안될 거 뭐 있어? 좋은 내용이 많네. 특히 비공삼선도 이건 쓸 만해. 무당의 무공진수가 제대로 담겨있는데?”
소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가 무당의 진수를 알아?”
“구면장으로 기초를 닦다 보니 자연스레 어느 정도 무당의 본바탕은 감이 잡혀. 일단 이거부터 봐.”
연수가 품에서 꺼내준 비급을 받은 소개가 비급 명을 읽어내렸다.
“화극선심공?”
“나도 처음 들어보는 심법인데, 심법은 넘기고 뒤에 보면 각종 무리를 따로 적어놓았더라고. 아마 문주에게 내려오는 비전인가 봐.”
어느새 거부감 따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운 소개는 비급을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연수를 바라보는 공숙.
“누이는 잠깐 기다려봐요. 이거 다 읽으면 줄게요. 쌍두사편에 도움이 될만한 부분이 꽤 있네요.”
“정말?”
“예. 쌍두사편의 궤와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다시 시선을 비급으로 옮기는데 반짝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중년인의 눈과 마주쳤다.
“응? 그 실력에 더 도움이 될 만한 비급은 아닌데···. 보고 싶어?”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는 중년인.
“하여튼 무공 욕심들은. 소개랑 누이가 다 보면 받아 봐. 아마 너보다는 부하들한테 도움이 될 거야. 나름 무당의 상승무공이나 매한가지니. 보고 꼭 부하들에게 필사해서 나눠줘.”
“감사합니다!”
“감사는 뭐 대단한 무공이라고.”
완숙한 절정고수인 주제에 이제 와 무당 속가의 비전 무공 따위 익힌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연수.
초절정인 주제에 그런 무공을 훔쳐온 자신의 행태는 전혀 자각하지 않고 있는 연수 였다.
한참 비급을 읽고 있는데 배가 출발하는 관성력이 느껴지자 연수는 비급을 공숙에게 전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디가?”
“밖 좀 살펴보려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연수가 건넨 비급으로 시선을 돌리는 공숙.
밖으로 나가는 연수의 뒤를 중년인이 뒤따랐다.
“애들은?”
“마차를 몰고 오느라 고생했길래 방에서 쉬게 두었습니다.”
“잘 했어. 아, 모도산이라는 그놈은 자질이 좋은 것 같던데?”
“예.”
짧게 대답하는 중년인을 슬쩍 살핀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은 무공을 익히고 있기는 하지만 중년인과 젊은 세 무인의 무위 차이는 현격했다. 한 조로 묶여 연수 밑에 귀속되어 그렇지, 아마 본래의 직급을 따지자면 중년인 경도평과 젊은 무인들은 평소라면 얼굴을 볼 일도 없을 직급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한 조로 묶어놨으니 까마득한 밑에 부하 따위에게 큰 관심이 있을 리 없는 경도평이었다.
거대한 갑판으로 나오니 떠오르는 해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배가 제법 운치 있게 느껴졌다.
배가 항구와 제법 거리를 벌리며 멀어지는 중에 중년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며 자연스레 등에 사선으로 매어놓은 태도로 손이 올라갔다.
그런 중년인의 손을 슬쩍 붙잡는 연수.
-모른 척하고 있어.
중년인이 표정을 풀며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잠시 후 갑판 위로 내려서는 여섯 무인.
무당 장로 둘과 무림맹의 고수들 넷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어제 본 무당 장로와 무림맹의 극목각주가 함께 있었다.
옅어지며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배를 멈춰라! 배를 돌려 다시 정박하라! 검문해야 한다!”
앞으로 나서며 쩌렁쩌렁 내력을 담아 외치는 무인.
한 발 더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려던 무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너희는 이 배를 검문할 수도 멈출 수도 없다. 내려라.
순간 멈칫하며 주변을 경계하는 여섯 무인.
“누구시오?”
-동창. 이 배에는 중요한 분이 타고 계신다. 내려라.
동창이라는 말에 무당파의 장로들 표정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동창이라니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믿지 않았다가 사실일 경우 황제의 진노를 감당할 여력은 무당도 무림맹에도 없었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 살변이 일어난 이날 떠나는 보선 위에 황족이 타고 있다? 하면 왜 금위위도 관병도 보이질 않는다는 말인가?
“어떤 분이 타고 계신 거요? 어째서 금위위도 관병도 보이질 않소?”
-설명할 의무는 없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이 배에는 존귀한 분이 타고 계신다. 내려라.
얼굴을 붉힌 무인이 더 따지려고 나서는데 그를 말리는 극목각주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오해가 있었던 듯하니 모쪼록 이해해 주십시오.”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주변을 살피던 극목각주는 다른 무인들에게 눈짓하며 갑판 위에서 뛰어올라 배에서 내렸다.
극목각주의 눈짓에 일단은 입을 다물고 따라 내리는 무인들.
멀어져 가는 보선을 바라보며 성격 급해 보이던 무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극목각주! 어째서 물러선 거요?!”
극목각주는 보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전에 동창의 환관과 한번 만났던 적이 있소. 그때의 은은한 기운이 지금 만난 동창의 고수와 비슷했소. 당시 만났던 환관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였지만 은은히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그 궤가 같았소.”
그 말을 들은 무인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무림맹의 기세가 높다 해도 감히 황궁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명나라의 태조였던 주원장은 명교라는 무인들을 한번 몰살시킨 경험이 있었다.
자신들에게 일 푼이라도 위협이 된다면 절대 가만 놔두질 않는 것이 황궁이었다. 주원장의 아들인 주체가 동창과 황족의 권위에 도전한 무인들을 가만 놓아둘 리는 없었다.
“참으로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하필 이때 동창이라니.”
무당 장로의 말에 극목각주가 우려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과연 우연일까요?”
무당 장로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글쎄요.”
갑판 위 중년인의 옆으로 슬쩍 모습을 드러낸 연수를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중년인도 한참 동안 연수를 인지하지 못하고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나 찾아?”
“?! 그때도 느낀 것이지만 어찌 그리 귀신같이 움직이십니까?”
“가르쳐 줄까? 암동이라는 은신술을 쓰고 있거든.”
“저도 은신술을 쓸 줄은 압니다만···.”
“너나 네 부하가 쓰는 건 조금 어설퍼. 아니 어설프다기보다는 무영심공과 조금 안 맞는 느낌이랄까?”
“그,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이 익힌 은신술은 성주가 직접 사사한 은신술이었다.
하지만 성주는 멀고 암수일살은 가까우니 감히 뭐라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이게 동창 애들이 쓰는 거라 그런지 꽤 깔끔하더라고.”
“도, 동창이요?”
“응. 황궁 무고에서 훔쳐왔거든. 무영심공도 황궁 무고에서 훔쳐 익혔어.”
“?! 그, 그들이 어떻게?”
“그야 나도 모르지. 근데 동창 애들은 다 대영심공과 무영심공을 익히고 있어.”
중년인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렸다.
한참을 사색에 빠져 있던 중년인이 고개를 흔들며 겨우 생각을 정리했다.
“성주님이 말 안 해 줬구나?”
“성주님은 알고 계십니까?”
“응.”
“... 그보다 저들을 어찌 쫓아낸 겁니까?”
“기운을 흘리면서 내가 동창이라고 했지. 황족이 타고 있는 양 내리라니까 내리던데?”
“그걸로 순순히 내렸다고요?”
“지들이 안 내리면 어쩔 거야? 만에 하나 진짜면 황족을 모욕하게 되고 동창의 권위에 도전한 게 되는데.”
“하하···. 하···. 기지가 대단하십니다.”
사실 기지가 대단하다기보다 함부로 동창과 황족을 사칭한 일을 나무라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는 중년인이었다.
그제야 성주의 경고가 떠올랐다.
-뱀 같은 놈이야. 항상 조심하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 무공보다 세 치 혀가 더 무서운 놈이니까.
연수에게 두드려 맞아 몸져누워있는 자신을 찾아온 성주가 했던 말이었다.
성내에서는 무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모양이지만 사실 어디서 이런 무서운 젊은 놈이 나타났는지 두려울 정도였다.
“그보다 암동 배우고 싶으면 말해. 어려운 거 아니니까.”
“그···. 중요한 비전인데 막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별로. 진짜 비전은 은신술 따위가 아니니까 괜찮아.”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감각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중년인이었다.
물론 사파인들이 무공을 공유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자신의 비전을 함부로 나 돌리는 무인은 세상에 없었다.
‘도둑질한 무공이라 미련이 없는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중년인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는 연수의 뒤를 바짝 쫓으며 입을 열었다.
“배, 배우고 싶습니다.”
-구결이···.
망설임 없이 전성으로 구결을 전해 주는 연수였다.
때아닌 무공수련에 한창인 일행들이었다.
소개와 공숙은 물론 중년인과 그의 부하들까지 비급과 암동의 구결을 외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도문 문주의 품에서 가져온 세 권의 비급을 모두 읽은 연수만이 할 일이 없어, 멀뚱히 있었다.
그런 연수에게 소개가 물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정확히 무슨 뜻이야?”
소개의 질문에 귀를 쫑긋 세우는 네 명의 무인들.
가뜩이나 좁은 방에 꾸역꾸역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년인과 세 명의 무인들.
“아 그건 능유제강의 무리를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는 것은 무당 무공의 정수 중 하나인데 제압할 수 없는 강을 굳이 누르지 않고 그대로 품는다는 무리지. 능유회강이라고 할까?”
“그, 그래?”
“그 부분은 능유제강의 무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깊은 고찰이 있어야 할 거야. 일단은 알고만 있어.”
“응.”
“그리고 너희 셋은 아무리 귀를 세우고 들어봤자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 알려주는 거나 잘 익혀.”
뜨끔하며 움찔거리는 세 무인.
그중 제법 강단이 있는 모도산이 한마디 토를 달고 나섰다.
“대장님! 저희나 소 소협이나 비슷한 경지인데 왜 차별을 하십니까?”
그에 피식 콧방귀를 끼는 연수였다.
“비슷하기는 개뿔이 비슷해? 이쪽은 과도기. 한발만 더 디디면 지고한 절정의 경지로 나가는 단계이고. 너네는 구분 짓자면 겨우 일류의 중간. 게다가 전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따지자면 만년 일류고.”
만년 일류라는 말에 모도산이 울컥했다.
“저는!”
“스-읍!”
큰 소리를 내려는 모도산을 노려보는 중년인의 입에서 아이들 혼낼 때 하는 소리가 나오자 모도산은 뒷말을 꿀꺽 삼켰다.
“초절정의 고수가 무공을 봐 주는 기연이 흔한 줄 아느냐? 감히 너희 따위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어디다 대고 토를 다느냐?”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시지요. 대장님.”
“뭐 큰일이라고 용서를 하고 말아. 무인이라면 그 정도 근성이랑 배짱은 있는 게 좋아. 다만 눈치도 같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쉽지 뭐.”
말을 마치고는 눈을 감는 연수였다.
중년인은 소개의 다음으로 질문을 하려다가 꺼내지 못하게 되자 모도산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짧고도 편했던 시간이 지나고 보선은 단풍 현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는 연수가 일행에게 전성을 보냈다.
-이제부터 진짜다. 작전을 바꾼다. 태령검문을 빠르게 치고 나갈 것이야. 세 놈은 연락을 확실히 전하고. 누이와 소개는 저놈들과 같이 움직이다 퇴로 쪽으로 매복을 해 주세요. 누이 독진을 준비해 주시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눈빛을 보이는 일행들.
원래는 태령검문까지 혼자서 암살을 하고 빠지려던 연수였지만 배에서 만난 정파인들이 마음에 걸렸다.
-도평. 너는 나와 함께 태령검문으로 간다.
중년인의 눈에 투기가 가득 차올랐다.
-옛!
태령검문은 전전대 무당파의 문주의 속가제자였던 차련림이 세운 문파로 무당파의 검공을 제법 깊이 있게 전수한 문파였다.
물론 직계가 아니면 전수하지 않고 있지만, 소문에는 태령검문의 문주는 이미 무당의 장로들 못지않은 고수라고 했다.
무당과 같은 호북에 있으면서도 태극검객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것만 보아도 태령검문 문주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태령검문의 문주와 붙으면 자신 있어?
갑자기 물어온 전성에 잠시 호승심으로 불타던 중년인의 눈길이 점차 가라앉았다. 잠시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중년인.
-좋은 판단이야.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네가 상대하기 제일 힘든 부류일 거야. 상성이 좋지 않거든. 최대한 주변을 정리하면서 나의 싸움을 관찰해. 패유열강을 보여줄 테니.
‘부드러움을 거슬러 강하게 찢는다?’
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걷는 연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덩치가 크지는 않은 암수일살 고연수의 등이 왠지 너무나 크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