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짜증이 가득 담긴 연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패련화는 또 뭡니까? 별 이상한 별호까지 다 붙이고, 성주님. 이거 믿고 참전해도 되는 거 맞습니까?”
성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새끼는 언제 저리 맛이 간 건지···.”
도화를 슬쩍 바라본 성주는 내심 천영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짜증이 왈칵 났다.
“하여튼 사내새끼들이란. 됐고! 임명식은 모레야. 그렇게 알고 있고, 밑에 애들 귀하게 데리고 다녀.”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성주. 그런 성주를 불러 세우는 연수였다.
“잠깐만요.”
“왜?”
“다른 건 아니고요. 이거 녹여서 단검 두 자루로 만들어야 하는데 누구한테 부탁해야 할까요?”
“천영한테 말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라지는 성주였다.
“급하시기는···. 야!”
“...”
조용한 주위.
“말로 할 때 나와.”
연수의 시선이 주렴각 밖 위로 솟아오른 감나무에 꽂혔다.
“아, 나오라고.”
이번에는 배나무로 옮겨지는 연수의 시선.
“안 나오면 끄집어낼 건데···. 그럼 좀 다칠 수도 있어.”
연수의 신형이 흔들리는 순간 솟아나며 모습을 드러내는 천영이었다.
“참 내, 한 번에 말 좀 들으면 덧나냐?”
“...”
“아휴, 이거 나름 중요한 거다. 이런 모양의 단검 두 자루는 충분히 나올 거야. 성에 유명한 야장이 있다며? 부탁 좀 해줘. 장식된 보석이나 금덩이는 수고비라고 전해 주고.”
연수가 건네는 단검을 보는 천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 령도?”
“잘 아네.”
“이, 이걸 녹인다는 말입니까?”
“응.”
“이게 어떤 단도인지 아십니까?”
“알지.”
소령도를 받아들인 천영이 화려한 검갑에서 소령도를 슬쩍 뽑아보았다.
“이거 진품인데요?”
“그렇다니까.”
“후우. 알겠습니다.”
“야장한테 잘 좀 부탁한다고 꼭 전해라.”
천영이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 연수의 당부 말이 울렸다.
잠시의 휴식시간은 빗살같이 지나가며 임명식이 있는 당일이 밝아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명상을 하던 연수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평소와 다르게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장포까지 둘러 입은 연수.
주렴각을 나서는 그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일행들 역시 평소의 장난기는 보이지 않았다.
도화 역시 평소에는 하고 다니던 면사를 벗어던지고 본인의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임명식은 사황성의 대전 앞에서 진행되었다.
드넓은 대전의 앞 공터를 꽉 채우는 사황성의 무사들. 그들의 앞에 열두 가문의 가주 들이 쭉 사열하고 있었는데 게 중에는 새로운 가주가 된 살귀도 비영도 끼어있었다.
그들의 앞으로 새워놓은 높은 단상 위로 성주가 나타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분명 나직하게 이야기함에도 공터 구석구석 퍼져 나가는 목소리.
“오늘은 중요한 인물을 소개하고 그의 직위를 확정 짓기 위해 임명식을 거행하겠다. 아는 사람은 다 알 텐데, 암수일살 고연수 앞으로.”
-와아아아아!
-암수일살! 와!
-나왔다! 와와아아아!!!
연수가 걸어 나오기 시작하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격렬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연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던 살귀도가 웃음을 지었다.
살귀도와 다르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연수를 노려보는 열한 명의 가주들.
특히나 주결가의 가주는 이를 갈며 연수를 노려보았다.
단상 위로 올라서자 성주가 손을 들어 환호하는 무인들을 진정시켰다.
“암수일살 고연수. 그대를 사황성의 적영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
연수를 고깝게 보던 열한 명의 가주 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금패와 반지를 내미는 성주.
이를 받아들며 연수가 전성으로 물었다.
-적영대가 뭐 하는 곳입니까?”
-이것저것 다하는 곳인데 제일 중요한 임무는 요인암살. 사실상 사라진 조직인데 너 때문에 부활시켰다. 나 말고 그 누구의 명도 들을 필요 없는 자리다. 움직이는 데 불편은 없을 거야.
-괜찮네요.
금패를 품속에 갈무리하고 반지를 낀 후 성주에게 포권한 연수가 뒤로 돌아 성내의 무인들에게 포권을 올렸다.
-와아아아아!
-적영대장! 암수일살!
또다시 터져 나오는 환호 단상을 내려가 자리에 서자 성주의 입이 열렸다.
“모두 알다시피 암수일살은 나이에 비해 그 무위와 실적이 뛰어난 무인이다. 수많은 정파의 유명 고수들을 격살하였고, 최근에는 무당 제일 검의 목을 따 우리 사황성의 사기를 올린 공적이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끝나자 장내에는 암수일살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집중되며 공기를 후끈하게 달궜다.
“그런 암수일살이 우리 사황성에 합류하게 된 것은 천운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많은 사파인들이 성에 투신하여 사파인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여기서 선언한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전면전이 될 것이다. 정사 대전이 끝날 때 우리 사파인들은 당당히 강호를 활보할 것이고, 위선자의 무리 들은 그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부터 전면전의 시작이다! 영혼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싸우자!”
-와아아아아!!!
-성주님!!!
-싸우자!!!
-와아아아!!!
요란하고도 짧은 임명식이 끝나자 대전으로 모인 열두 가주와 성내의 고수들.
물론 그 안에 연수와 성주가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전의 끝에 높게 자리한 성화전에 몸을 깊숙이 묻은 성주가 말문을 열었다.
“다들 뭐 불만이라도 있어? 표정이 왜 그따위들이야?”
“불만이라기보다는 아직 어린 저자에게 너무 중요한 직책을 맡긴 게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팔쇄가의 가주가 특유의 쇳소리 강한 목소리로 불만을 표시했다.
“저 또한 팔쇄가주와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 이립도 되지 못한 젊은 애송이에게 적영대장 이라니요?”
동조하고 나선 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주인인 화령가의 가주 적화강의 눈에는 강렬한 화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 또한 앞의 두 가주와 생각이 같습니다.”
짤막하게 동조하는 철목가의 가주는 두꺼운 팔뚝을 억지로 교차하여 팔짱을 끼고 있었다.
“또 있나? 불만 있는 놈들 다 말 해봐.”
가주가 바뀐 귀형가를 뺀 사대 가문 중 상위 삼 가가 의견을 모으자 남은 여덟 가문도 동조하고 나섰다. 특히 제일 세가 약한 가문 중 하나인 주결가의 가주는 신랄하게 연수를 비난했다.
“저 정체성 모를 놈을 성내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저놈은 정파의 그것도 개방의 고수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저놈의 사부는 그 도둑놈이 아닙···.”
순간 말을 잇지 못하는 주결가의 가주.
연수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는 듯한 아찔함이 느껴지며 등골이 오싹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이 자리에서 목이 잘릴 것이다.
도대체 그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연수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는 주결 가주였다.
“감히!”
화령가의 가주가 참지 못하고 출수하며 연수에게 뜨거운 일장을 날렸다.
“너야말로 감히다.”
일장을 채 다 뻗기도 전에 화령 가주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던진 성주의 신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성화전으로 돌아갔다.
중심을 잃고 민망하게 바닥에 몸을 구른 화령 가주가 벌떡 일어서며 무릎을 꿇었다.
“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됐고! 주결 가주 뭐라고? 하던 말은 마쳐야지.”
“...”
몸을 잘게 떨며 말을 잇지 못하는 주결 가주.
슬쩍 눈을 떠 연수를 살피니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하고 담담한 검은 눈동자가 너무나 두려워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주결 가주였다.
다른 가주 들은 이 상황을 뻔히 알고도 연수의 편에 서는 성주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고 침음만 흘렸다.
한참을 지나도 주결 가주의 입이 열리지 않자, 연수의 입이 열렸다.
“주결가의 어린놈한테는 한번 은혜를 베풀었지. 성주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런데 내 사문을 모욕해? 이 은원은 언제고 받으러 갈 것이야. 남의 사문을 모욕한 대가가 가볍지 않음을 잘 알고 있겠지.”
무거운 기세가 주결 가주에게 쏟아지자 무릎이 덜덜 떨리며 땀을 비 오듯 쏟아내는 주결 가주였다.
무거운 기세로 찍어 누르려는 연수.
보다 못한 주결 가주의 옆에 있던 적참 가주와 패마 가주가 슬쩍 기세를 보태며 주결 가주를 돕고 나섰다.
같은 열두 가문의 한 가주가 저 어린놈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기세를 보태는 순간 눈을 부릅뜨며 연수를 바라보는 두 가주.
얼마 가지도 않아 주결가의 가주와 똑같이 무릎을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가주 들의 모습에 연수를 바라보는 다른 가주 들의 눈빛이 변했다.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세 가주의 눈빛에 낭패의 기색이 떠오르는 순간 성주의 입이 열렸다.
“그만. 그러게 주둥이는 함부로 놀리는 게 아니야. 혀로 진 그 빚은 알아서 갚아.”
성주의 공식적인 인정이 떨어지자 주결 가주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분명 아들놈에게 듣기로는 완전한 절정의 경지라 들었다. 소문 또한 그랬다. 무당 제일 검과의 사투에서 한 끗 차이로 승리를 거두고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절정이라지만 같은 절정고수 셋을 이리 압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초절정.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황성주가 적영대의 대장을 아무나 데려다 임명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초절정의 고수라면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그런 초절정고수의 사문을 모욕하고 원한을 샀다.
그 원한을 사황성의 성주가 인정하고 알아서 갚으라며 뒤로 빠져 버렸다.
막막함에 허망한 표정을 하는 주결 가주 옆에서 식겁을 한, 두 가주는 슬그머니 주결 가주와 한 걸음씩 떨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다시, 불만 있는 사람?”
조용한 장내. 오로지 철목 가주만이 여전히 두 눈을 감고 불만 어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없어? 철목 가주. 표정이 안 좋은데?”
“썩 마음에 드는 처사는 아니지만, 상대가 그만한 자격을 갖췄으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루아침에 귀형가의 가주 망노가 지위를 잃고 가문을 빼앗겼다고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런데 적영대의 대장을 웬 애송이 놈에게 맡긴다. 이런 상황에서 태연히 있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만을 표시하기에는 성주의 앞이었다.
“그럼 다들 받아들인 것 같으니까 말해두는데 적영대는 앞으로 별동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모든 작전 결정과 활동은 전적으로 적영대장의 임의대로 맡길 것이며 나 외에는 그 누구도 그의 작전에 간섭할 수 없다. 못 알아들은 사람?”
“...”
여전히 조용한 장내.
“그럼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다음 사안. 모두 전면전이라는 이야기 들었지? 다들 총력을 다해 전선을 뚫는다. 목표는···. 강서다.”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가주 들이 눈을 빛내며 성주를 바라보았다.
“강서를 잃으면 고립되는 북건 또한 빼앗긴다. 이는 당연한 이치. 우린 이제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 치고 나가는 수밖에.”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뜬 철목 가주가 물었다.
“결전의 날은 언제입니까?”
철목 가주의 질문에 성주는 연수를 바라봤다.
“음···. 한 보름 후가 어떨까요?”
“보름이라···. 그거면 충분해?”
“예. 최소한 분위기는 흩트려 놓을 수 있어요.”
성주와 연수가 둘이서만 아는 이야기를 하자 가주 들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아, 적영대장이 별동대를 이끌고 먼저 정파 놈들을 뒤흔들 것이다. 중요 고수를 암살하고 난리를 피우는 동안 적의 기세가 흔들리는 틈을 타서 우리는 총력을 이끌고 단번에 강서를 지나 전선을 뚫고 진격한다. 목표는 안휘다. 남궁세가를 지운다.”
“!!!”
놀라는 가주들.
“뭘 그리 놀라? 이미 화산을 지웠다. 귀주 호남 강서 북건을 뺀 중원에 퍼져 있는 사파인들이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다. 이미 존폐를 가리는 전쟁은 시작되었어. 안휘를 칠쯤에는 적영대도 합류할 것이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들 깊은 고민에 빠진 가주들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