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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08화 (108/202)

# 108화

밖에서 들리는 소리와 흉포한 기세들의 충돌로 인해 잔뜩 겁을 먹은 도화는 몸에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떨군 고개를 들고 밖의 상황을 살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망노의 행태를 알게 된 이후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한밤중에 망노가 그녀의 침실에 들어왔던 그 날 밤의 기억은 지금도 그녀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기억 중 하나였다.

다행스럽게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한참을 바라보던 망노가 말없이 나갔지만, 그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을 노리는 망노로 인해 결국 도망까지 치지 않았던가.

겨우겨우 용기를 내어 옆에 정회를 바라보니 겨우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키며 기침을 해댔다.

“고생 많았어. 약속대로 찾아왔어.”

익숙한 목소리.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는 순간 주변이 하얗게 지워져 갔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갔다.

한달음에 그의 품에 와락 안기자 불안하고 무섭던 감정이 달아나며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야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흐흑! 빨리 온다고 하셨잖아요! 흐어엉···.”

갑자기 달려들어 자신을 끌어안고 우는 도화의 행동에 너무나 당황한 연수는 딱히 뭐라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주변의 눈초리가 매서운 것이 얼굴이 따가운 연수였다.

“쯧쯧 무슨 짓을 했길래 저리 서럽게 우나.”

공숙의 말이 시발점이었다.

“나한테 어쩌고저쩌고하더만···.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암수일살이라는 별호만 듣고 잘 몰랐는데 인제 보니···. 아닙니다.”

주렴각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정문 밖에서 말을 하던 회색 무복의 무인이 연수의 사나운 눈길에 입을 닫았다.

주변으로 사나운 눈을 부라린 연수가 도화의 등을 어색하게 두드려주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걱정 마. 망노는 잘 처리해 두었으니 별일 없을 거야. 많이 놀랐지?”

“흐어엉!!”

더 서럽게 우는 도화.

“괘, 괜찮아. 이제 괜찮아.”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데 등 뒤로 따끔한 살기가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아직 남아있던 흑영대 무인들의 기세였다.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니 회색 무복을 입은 무인의 입이 열렸다.

“도화 아가씨는 저희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계시는 저희의 우상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짧은 말과 함께 손을 휘젓자 주렴각의 정문이 탕! 소리와 함께 닫혔다.

그러고는 다시 도화를 달래는 연수.

“내가 왔잖아. 이제 괜찮아. 그만 울어. 다 큰 처자가 이리 울면 사람들이 놀려.”

-저희는 놀리지도 흉을 잡지도 않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회색 무복을 입은 무인의 목소리에 연수의 이마에 핏대가 튀어 올랐다.

‘흑영대라고 했지? 두고 보자 이 새끼들···.’

한참을 더 울던 도화가 제법 진정이 되었는지 서서히 눈물을 그쳤다.

그러고 나니 자신의 추태에 민망함이 몰려왔다.

이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슬그머니 연수에게서 떨어지는 도화.

“추, 추태를 보였습니다.”

“괜찮아.”

“도화라고 했지? 나는 연수의 누나 공숙이라고 해. 연수가 몹쓸 짓을 한 게 있으면 나한테 다 털어놓아도···.”

“누이! 없습니다. 그런 거!”

은근히 목소리를 까는 공숙의 말을 단번에 잘라버리는 연수였다.

“저는 소개라고 연수의 벗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수씨.”

“저, 저는 정 도화라고 합니다. 두 분 모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은근슬쩍 제수씨라는 말에 부정하지 않고 인사를 받아 허리를 숙이는 도화였다.

마주 허리를 숙이는 소개.

“이리와. 소개해 줄게.”

멀리서 가만히 서 있던 정회를 향해 손짓하는 연수였다.

주뼛주뼛 다가오는 정회.

“도화의 호위무사로 있는 정회라고 호검파의 마지막 전인이래.”

연수의 소개에 포권을 해 보이는 정회였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 반가워. 나는 공숙.”

“저는 소개라고 합니다.”

소개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정회.

“저 실례지만 혹시 무화개?”

고개를 숙이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소개의 모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정회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스며들었다.

“어, 어째서···.”

“전향. 깊은 이야기는 개인 사정이 있으니 묻지 말고.”

딱 끊는 연수로 인해 더 묻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정회였다.

따지자면 자신도 근본은 정에 있었지만, 누구보다 정파를 증오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죠. 차라도 마시면서 앉아서 이야기해요.”

다소곳이 연수의 뒤에 딱 붙어서 연수를 따르는 도화의 모습을 보고 공숙과 소개가 눈짓을 주고받으며 씩 웃었다.

막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정 소저! 힘내십시오.

‘저 새끼들 언제 한번 제대로 걸리는 날이 있을 거다. 두고 보자.’

속으로 칼을 가는 연수였다.

다탁 위에 차를 한 잔씩 따라 놓으며 연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는 동안 별일 없었지?”

“예. 오라버니의 말씀대로 성에 와서 사정을 설명하니 성주님이 친히 챙겨 주셔서 편히 지냈습니다. 오는 길도 별일 없었습니다.”

공숙이 참았던 말을 다시 꺼냈다.

“그런데, 진짜 이놈이 별짓 안 했어? 밤에 갑자기 찾아온다던가? 아니면···.”

“누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못 하는 도화였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나 보구나.”

마음대로 생각하는 공숙.

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지난날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다섯 무인.

“그때도 오지랖이 보통이 아니었구나?”

도화와의 첫 만남 이야기가 나오니 공숙이 연수를 놀리고 나섰다.

“나랑 만났을 때도 그랬어. 자기 일도 아니면서 상관하고 나서서는 제멋대로 이래라저래라 했다니까?”

“그 두 경우가 어찌 같습니까? 도화의 일은 나쁜 놈 쫓아낸 것이고 누이와의 일은 누이의 손속이 과해서 말리고 나선 건데.”

“어쨌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그 오지랖이 넓은 건 사실이지.”

“그 덕에 누이와도 도화와도 연이 닿았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건 그래.”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수긍하는 공숙.

“제가 그때 상관하고 나섰으니 누이는 그놈들과 은원도 생기지 않았고, 저 같은 훌륭한 동생도 얻었고, 소개 같은 번지르르한 남자도 얻었으니 얼마나 큰 복이에요?”

“응? 그게 그렇게 돼?”

“그럼 아니에요?”

“그건 아니지만 뭔가 이상한데?”

“하나도 안 이상해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야기가 끊이지 않으며 이어졌다.

“그럼 곧 성을 벗어나 떠나신다는 거예요?”

얼굴을 굳히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연수를 바라보는 도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렇기는 한데···.”

“저도! 저도 데려가시면 방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좀···. 정사 대전의 최전방에서 날뛰게 될 거 같아서···.”

“하지만···.”

“걱정마. 주기적으로 성으로 돌아올 테니. 망노라면 걱정할 것 없어. 더는 주렴각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을 테니까.”

도화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떨궜다.

“자주 올게. 조금만 기다려.”

“그럼 언제 떠나시는 건가요?”

“며칠은 여유가 있을 거야. 임명식도 있을 것 같고.”

“그렇군요.”

풀이 죽은 도화의 목소리에 연수의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정말 자주 올 거야.”

“예···.”

한참 어색한 분위기가 장내를 휩쓸고 있는데 들려오는 인기척.

“안에 있나?”

“들어와요.”

말과 함께 손을 휘젓자 방문이 열리며 마당에 서 있는 인물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그러네요.”

“소문은 자주 들었네. 꼭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반갑네.”

“이야기 들었어요. 성주님한테.”

“나도 들었네. 날 죽이고 싶지 않다, 했다고?”

“예. 그래도 정사 대전의 개전을 함께 연 전우인데 제 손으로 죽이기는 찝찝하잖아요.”

사내의 호쾌하게 뻗은 눈썹이 씰룩였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호승심 가득한 사내의 눈빛을 보며 연수가 딱 잘라 말했다.

“비무 따위 해줄 생각 없습니다. 생사투라면 받아주겠지만.”

“크크크, 성주님이 십 년 동안은 너와 싸울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더군.”

“그 말 잘 듣는 게 좋아요.”

“일단은 그렇게 하지. 그러니 그런 눈 하지 말아라. 그저 덕분에 출셋길이 열려서 인사나 하러 온 거니까.”

“될 수 있는 한 빨리 영향력을 공고히 해 두세요. 망노의 영향력이라고는 일 푼도 남지 않도록.”

“말 안 해도 그리 할 거다. 갑자기 큰 가문을 얻게 되었어.”

“성주님에게도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많이 죽을 텐데 손 좀 빌리자.”

“직접 하세요. 시간 없어요.”

사내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임명식까지 할 일이 없을 텐데.”

“많습니다.”

도화를 힐끗 바라보며 말하는 연수를 보며 사내의 눈썹이 씰룩였다.

“할 일이라는 게···.”

-말을 아끼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에 울리는 전성에 깜짝 놀란 사내는 뒷말을 흐렸다.

“쩝. 그럼 또 보자.”

잠시 연수를 노려보고는 뒤 돌아 주렴각을 벗어나는 사내.

그로부터 이틀 후.

아침 댓바람부터 주렴각을 찾아온 무인들.

새벽부터 명상하던 연수의 눈썹이 그 무인들의 기척에 꿈틀대며 연수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 서렸다.

주렴각의 정문 밖에서 한껏 기세를 피워 올리며 시위하는 무인들로 인해 자고 있던 소개와 공숙 도화까지 모두 깨었다.

앞마당에서 새벽부터 검을 휘두르던 정회 역시 수련을 방해받아 잔뜩 짜증이 났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참지 못하고 명상을 접은 연수가 문을 열고 나오며 벌컥 짜증을 냈다.

“들어와.!”

연수의 손이 휘저어지자 벌컥 열리는 정문.

대뜸 열리는 문을 통과해 연수 앞에 서는 네 무인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제법 묵직한 기세를 내뿜으며 주렴각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

“하아, 아침부터 뭔데?”

“성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 귀속시킨다 하였소.”

“그래서?”

“당신에게 가라 해서 왔소.”

“그럼 조용히 기다리지 뭔데, 아침부터 무슨 난리야?”

“큼큼! 나는...”

“안 궁금해. 성주님이 내 밑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제대로 안 했던가?”

“들었소.”

연수의 이마에 두껍게 잡히는 핏대.

“근데 뭐 이리 뻣뻣해? 들었소? 그거 반말이야? 존대야? 할 거면 하나만 해.”

“큼! 큼!”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표현하는 중년의 무인.

“젊은 놈한테 이런저런 소리 듣기 싫으면 가. 성주님한테는 내가 직접 말해 줄 테니까.”

“남은 놈들은 저기 구석에 가서 기다려. 괜히 한 번 더 지랄하면서 무력 시위하면 버르장머리를 확! 뜯어 고처버릴라니까.”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연수.

예전 사부가 했던 말이 있었다.

서열 관계가 확실치 않으면 불편한 것이 사파인들의 생리라고 했다.

밑에 두고 수족처럼 부릴 놈들이 저리 뻣뻣하니 마음 같아서는 두들겨 패서라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놓고 싶은 연수였다.

막 마음을 가라앉히며 안으로 들어서는 연수의 귀로 들리는 중년인의 한 마디.

“지가 암수일살이면 단가?”

천천히 돌아서는 연수.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고 연수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손 한 번 섞어볼까? 적수공권으로 상대해 주지.”

중년인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맨손으로 나를?”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

이번에는 중년인의 이마에 두꺼운 핏대가 섰다.

허리에 맨 손잡이까지 하면 일곱 척은 족히 되어 보이는 태도를 뽑아 드는 중년인이었다.

길이가 너무 길어 오른손으로 도를 잡고 왼손으로 검집을 뒤로 빼 던지며 검을 뽑은 중년인은 양손으로 검처럼 날렵한 태도를 쥐며 연수를 노려보았다.

씩 미소짓는 연수.

“후회하지 마.”

“흥!”

정회는 저 뒤로 물러서며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는 중년인과 연수의 대결을 기대했다.

어느새 일어난 소개와 공숙 또한 눈을 반짝이며 자리를 잡고 구경에 나섰고, 도화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수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조심히 잡아당겼다.

“아, 괜찮아. 사내들끼리는 가끔 서열을 확실히 정해야 할 때가 있어. 특히 부하와 상관의 관계라면 더욱 더. 누이 옆에서 구경하고 있어.”

어깨를 토닥이며 차분히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인 도화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공숙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도화가 걱정할 만도 한 것이 중년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만만치가 않았다.

예리한 칼날 같은 날카롭고도 묵직한 기세는 완전한 절정에 오른 고수의 기세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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