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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07화 (107/202)

# 107화

열흘이 넘도록 주렴각의 정문 앞마당에서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도화.

오늘도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그녀의 모습에 지켜보던 정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가씨. 계속 여기서 기다리시기보다는 소일거리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응? 아니, 기다린다기보다는···. 걱정이 되어서.”

왜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암수일살이라는 이름이 드높은지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요즘 무당 제일 검을 격살했단다.

모든 정파인이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을 것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도화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그녀의 얼굴로 한 방울의 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 아가씨. 비가 오는 거 같아요.”

“응? 진짜? 어떻···.”

오싹.

익숙한 기운이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며 굳은 고개를 힘겹게 돌리자 도화의 시선에 들어오는 인영.

“오랜만이구나. 정말 여기에 있을 줄이야. 걱정이 많았단다 제자야.”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는 도화였다.

정회가 그런 도화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빼 들었다.

주렴각의 담벼락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런 정회를 바라보는 노인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주제도 모르고 나서기는.”

순간 숨이 덜컥 막혀오며 검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떠는 정회.

“컥! 커허억!”

-챙그랑.

땅으로 검을 놓친 정회가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도화는 덜덜 떨려오는 어깨를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성주님 권위가 정말 땅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똥 밭을 구르는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노인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빙글 웃으며 나서는 젊은 놈의 면상이 보는 것만으로 짜증이 나는 노인이었다.

몇 번이나 용모파기를 통해 확인한 인물이었다.

“주렴가의 애송이가 애를 먹었다더니, 아해야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까불고 다니는 것도 한때란다.”

“그 한때가 아직도 안 지났는지 까불고 다니는 늙은이가 있어서. 저거 주렴각에 침입한 거 맞지?”

무서운 눈으로 망노를 노려보는 회색 무복을 입은 무인에게 묻는 연수.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슬쩍 담벼락 밑으로 내려오는 망노였다.

“그저 제자가 있다길래 인사만 한 게다. 허튼소리는 전하지 않는 게 좋을 게야.”

“저는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할 뿐입니다.”

무인의 말에 망노의 인상이 구겨졌다.

“늙으려면 곱게 늙어야 한다더니. 쯔쯔 어쩌다가 저 나이에 노망이 났는지. 쯧쯧.”

혀를 차며 지나가는 연수.

순간 주위를 몰아치며 몰려드는 기세에 연수의 주위로 기막이 일어서며 기세를 막아냈다.

“쯧쯧.”

다시 한번 혀를 차며 아랑곳하지 않고, 망노를 지나쳐 주렴각의 정문을 여는 연수의 뒤로 망노의 손이 뻗어져 왔다.

-쾅!

망노의 손을 검을 뽑아 막아낸 회색 무복을 입은 무인이 뒤로 밀려나며 피를 뱉어냈다.

“쓸데없는 짓을!”

“성주님의 손님입니다. 이 이상 손을 쓰신다면 성주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망노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이 뒤집혔다.

“감히! 네놈 따위가!”

-휘이이익!

품에서 꺼낸 피리를 길게 불자 순식간에 망노의 주변으로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솟아났다.

눈만 내놓고 온몸을 가리듯 꼼꼼한 야행복을 입은 그들의 눈빛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호오~”

그들을 보며 눈을 빛내는 연수였다.

나타난 무인들에게서 자신과 궤가 같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망노의 주변으로 살벌한 기세가 일어나며 망노의 장포가 휘날렸다.

이제는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정회를 보고는 연수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정회를 압박하던 기운이 갈라지며 사라졌다.

“이놈!”

막 달려드는 망노를 돌아보는 연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끝없는 어둠 같은 그의 눈빛을 마주 본 망노의 기세가 움찔했다.

‘무슨 놈의 눈빛이···.’

하지만 자신은 귀형신살이었다. 사파에 단 셋밖에 없다는 초절정의 고수. 그런 자신이었다.

내친걸음에 박차를 가하는데 순간적으로 가까워지던 애송이의 모습이 멀어졌다.

‘응?’

무슨 일인지 순간 파악이 되지 않았다.

분명 저 애송이놈이 뒤로 물러서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물러서는 것은 자신처럼 느껴졌다.

-쿠당탕탕!

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상황이 파악되는 망노였다.

초절정 고수가 바닥을 구를 일이 무엇이 있을까?

망노의 뒷덜미를 잡아 내던진 성주가 씹어뱉듯 말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지?”

회색무복을 입은 무인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주렴각을 침범하고 성주님의 손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를 막아서는 저를 계속 공격할 의도가 보여 흑영대를 소집하였습니다.”

“크크크, 내가 성주 자리를 그리 오래 비웠던가? 아니면 내가 너무 오랫동안 너희를 풀어주었던가?”

성주의 몸에서 풍겨오는 사나운 기세에 주변에 있던 흑영대가 뒤로 물러났다.

-쩌적!

성주의 기세로 인해 날아온 경기에 맞은 주렴각의 정문이 갈라졌다.

앞으로 한발 나서며 기막을 치는 연수.

그러면서 슬쩍 한마디 거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황성에 들어온 첫날부터 참···. 실망이 큽니다. 저잣거리 흑도 들도 서열은 확실하던데···.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그 말에 성주의 압도적인 기세에 살기가 섞여들었다.

“내가! 정사 대전 중이라고 널 죽이지 못할 것 같던가? 권위에 도전을 받고도 그냥 넘길 정도로 우습게 보였던가!”

망노는 그제야 그냥 무마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졌다는 것을 느꼈다.

“서, 성주님 오해입니다.”

오해라는 말에 성주가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성주가 채 세 걸음을 옮기기 전에 망노는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 살려주십시오! 소인이 경거망동하여 성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야, 망노.”

머리를 땅에 처박았던 망노의 고개가 슬쩍 들렸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짓거리 그만하고 저 아이는 놓아 주라고. 암수일살을 건들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저, 저는···.”

“한번은 어길 수도 있지. 근데 다른 곳도 아니고 성안에서 주렴각 앞에서···. 내 권위에 도전한 너를 살려두면 내 체면과 떨어진 권위는 어떻게 세우지?”

망노의 머리가 다시 땅에 처박혔다. 소리가 나게 바닥에 이마를 찧는 망노였다.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때 연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곤란하시겠네요. 그거 살려주면 사황성의 기강은 둘째치고 성주님 체면이 땅에 떨어져 똥 밭을 구를 텐데.”

말리는 시누이.

그 말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망노였다.

한 번씩 참견하여 성주의 성질에 기름을 붓는 저 주둥이를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는 망노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이 상황에 성주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성주도 곤욕스러웠다.

연수의 참견만 아니었어도 적당히 쥐어박아 주고 끝낼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망노를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저놈이 이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저리 공식화를 시켜 버리니 손을 쓸 수도 안 쓸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버린 성주였다.

‘하여튼 저 간사한 주둥이는 뱀이 따로 없다니까.’

성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망노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성주의 판결로 생각했다.

“성주님! 제가! 귀형가가 성에 세운 공로를 생각해 주십시오! 제발!!”

성주가 막 뭐라 입을 열려는데 뚜벅뚜벅 걸어오는 연수,

그런 연수를 바라보는 망노의 두 눈에 살심과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다.

기어코 무릎을 꿇고 있는 망노의 코앞까지 걸어와 망노를 내려다보는 연수.

“성주님. 시국이 시국인 만큼 어떻게 목숨만은 살려줄 수 없을까요? 아무리 화가 나셔도 귀형가의 전력과 이 노친네의 힘이 사파에 큰 힘이 되는 건 사실이잖아요.”

어이없는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보는 성주.

연수의 머릿속으로 그런 성주의 전성이 들려왔다.

-너 뭐하냐?

같은 전성으로 대답하는 연수.

-저 노친네 놀리죠.

-네놈이 일을 키워 놔서 놀리는 거로는 못 끝내게 됐다.

-그래서 말리고 있잖아요.

-그걸로는 어림도 없게 되었는데? 이대로 살려놓으면 진짜 내 체면이 똥 밭을 구르게 생겼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마무리 해 드릴게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성주에게 포권을 하는 연수.

“다른 이도 아니고 귀형가의 가주입니다. 가주 자리를 내놓고 물러서는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성내의 모든 무인이 성주님의 자비심에 감복할 것입니다.”

연수의 말에 망노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은 팔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

애초에 처 또한 없었다. 첩이라면 두 손 두 발을 다 합쳐도 모자랄 만큼 있었지만, 이상하게 자식이 생긴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여제자들을 희롱하며 즐길 수 있었다.

얼마든 여인들과 잠자리를 즐겨도 애가 생기지 않으니 뒷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소문은 쉴 새 없이 퍼져 나갔지만 그뿐이었다.

그런데 귀형가의 가주 자리에서 물러서라니. 사황성의 가문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나 귀형가는 실제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문이 아니었다. 사황성 성주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주를 모시는 제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후계가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물러서면 누가 가주가 되든 자신의 영향력 아래 귀형가를 놓기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막 망노의 입이 열리려는데 성주의 입이 먼저 열렸다.

“겨우 그 정도로? 내 권위에 도전하고 체면을 짓밟은 놈이야. 반역자를 봐 주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되어있다.”

반역자.

그 말이 주는 무게가 망노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공식적으로 성주가 자신을 반역자로 낙인찍는다면 살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운 좋게 이 자리를 벗어난다 쳐도 사파에는 도저히 몸담고 살아갈 수 없다.

“성주님! 반역이라니요. 그런 반심 따위 발톱의 때만큼도 없습니다. 가주의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처절하게 용서를 구하는 망노를 내려다보는 성주의 눈에 잠시 갈등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를 놓칠 망노가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이으려는데 연수가 그의 말을 낚아챘다.

“성주님의 휘하에 뛰어난 고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별호가 살귀도라고 했던가요?”

성주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놈은 귀형가와 연이 없는 놈인데 귀형가에서 그놈을 가주로 덜컥 받을까?”

“여기 귀형신살이 진심으로 추천한다면 받겠지요.”

“그놈은 귀형가의 무공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아는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차차 배우면 되겠지요. 귀형가의 가주로서 그의 명성이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망노를 향해 무서운 눈을 부라리며 묻는 성주.

“어떻게 하겠나? 받아들이겠나?”

“예···. 그런 훌륭한 후배가 뒤를 이어준다니 기쁘게 물러설 수 있겠습니다.”

연수가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귀형신살 선배께서는 성에 계시면서 성주님을 모시면서 충심을 증명할 시간까지 생겼네요.”

그 말에 망노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귀형가의 그 어떤 영향력도 남겨 놓을 수 없게 아예 떼어놓으려는 연수의 의도를 읽어낸 망노였으나 감히 성주 앞에서 반발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 그럴 기회를 주신다면 견마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이번 일은 그렇게 마무리하지. 앞으로는 함부로 주렴각에 발을 디디면 정말 그 늙은 목 잘라 버릴 거야.”

“주렴각은 바라보지도 않겠습니다.”

“그럼 됐어. 지켜볼 거야.”

“예. 성주님. 성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크게 몸을 엎드리며 절을 하는데 연수의 목소리가 망노의 속을 뒤집었다.

“성주 갔어. 그 절은 내가 잘 받을게.”

“이···. 이 수모는···.”

“갚을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쪼그리며 앉아서 망노의 눈높이를 맞추며 말을 이어가는 연수.

“다음에는 성주의 힘 따위 빌리지 않아.”

연수의 눈 깊은 어둠 속에서 붉은 난폭한 기운을 마주한 망노의 눈썹이 씰룩였다.

“앞으로 자주 봅시다.”

말을 마치고는 주렴각안으로 들어서며 등뒤로 손을 흔드는 연수.

하루아침에 귀형가라는 든든한 조직이자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곳을 잃은 망노는 분노의 눈길로 연수의 등 뒤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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