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납검하며 뒤를 돌아보는 그의 표정이 밝았다.
반면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는 연수.
“연수야!!”
소개의 외침이 들려왔다.
굽혀졌던 연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휘청이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연수의 가슴이 붉게 물들어가며 혈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이 경지에 올랐구나! 무인으로서 완전해지는 이 경지에 올랐어!”
환희에 차 납검한 검을 뽑아 보이는 소현풍.
그의 검에서 완벽한 검강이 검 끝으로 한자나 더 튀어나왔다.
비도문의 중년인이 그 검강을 보며 기쁜 환호성을 질렀다.
“이겼다! 소진인! 경하 드립···.”
중년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피를 토해내는 소현풍.
“쿨럭! 네놈만 아니었어도···.”
말을 끝맺지 못한 소현풍의 몸이 세로로 갈라졌다.
그대로 피 웅덩이를 만들어내며 허물어지는 소현풍.
그 위로 연수의 무심한 말이 맴돌았다.
“그런 바닥이잖아. 생사의 경계에서 당신은 넘어서지 못한 거야. 죽은 다음 완성하면 뭐에 쓰나.”
말을 마친 연수의 하나 남은 단검에서 한자나 되는 선명한 검강이 뻗어 나왔다.
그걸 발견한 중년인이 막 입을 벌려 소리를 치려는데 연수의 신형이 사라지며 중년인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하지 못해 의문이 가득한 그의 눈이 허공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 갔다.
-스팟! 푹! 푸슉! 츠팟!
살벌한 소리와 함께 장내에 무인들이 순식간에 절명했다.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는 그들의 눈에는 중년인과 같은 의문이 가득 찼다.
몸을 휘청이며 소개에게 다가서는 연수.
“누이는?”
“위험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다. 너는 괜찮은 거야?”
“걱정 마. 그러는 너는 어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야.”
“가자. 이제 덕흥현을 시작으로 강서는 전쟁터가 될 거야. 빨리 의원을 찾아 누이부터 살리자.”
공숙을 업고 스승의 시신을 안은 소개의 팔을 잡아 주며 시체와 피가 강을 이루는 뜨거웠던 장내를 벗어나는 일행.
곳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연수였다.
일행이 의원을 찾아 공숙이 겨우 생명의 위기를 넘기는 순간 뜨거운 사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하늘로 붉은 불꽃이 올라갔다.
공숙이 겨우 정신을 차리자 연수가 기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이! 정신이 좀 들어요?”
“연수야···. 소 공자는?”
“눈을 뜨자마자 그놈부터 찾습니까? 무사하니까 걱정 마요. 지금 치료를 받고 있어요. 저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놈부터 찾는 거예요?”
장난 섞인 투정에 핏기없는 하얀 얼굴로 피식 웃는 공숙.
그녀의 웃음 속에서 안도하는 마음을 읽은 연수는 마주 웃어주었다.
그녀에게 소개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영향으로 돌아갈 곳을 잃은 소개에 대한 걱정 또한 커졌다.
장래가 촉망되는 정파인이던 소개가 하루아침에 배신자 딱지가 붙고, 사부를 원통하게 잃었다.
자신 역시 사부의 위기를 겪으며 소개가 지금 어떤 감정일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소개를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 연수였다.
치료를 받는 소개의 의방 앞을 서성이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연수.
상처를 꿰매며 뜸을 뜨고 있는 소개가 고개를 돌려 연수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다 탄 뜸을 치우고 마지막 한 땀을 꿰매며 마무리를 짓는 의원.
“이제 탕약을 드릴 테니 남김없이 드셔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개.
나가려는 의원을 연수가 불러 세웠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의원.
“밖에 모신 분의 가슴에 나 있는 상처 좀 꿰매 주시오. 장례를 치러야 하니 장의사도 좀 불러주시고.”
말을 마치며 품속에서 전표를 꺼내주자 의원의 눈이 커지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늦어서···. 미안하다.”
그 말에 고개를 젓는 소개.
“나야말로 제대로 지키지 못해 널 볼 면목이 없다.”
말을 바로 하자면 공숙보다 하수인 소개가 공숙을 지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소개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연수였다.
“스승님의 일은···.”
“네가 원수를 갚아주었으니 됐어. 남은 원한은 무당에 묻고, 위선적인 정파 놈들에 묻고 무림맹에 물을 것이다.”
“소개야···.”
이름은 불렀지만, 원한으로 가득한 소개의 눈을 보고 어떤 말도 할 수 없던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냐?”
그저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너 말고 누가 있었다고. 그렇게 시작했을 진데 이제 와 뭘 잃은들 아까울 것 없어.”
사문을 잃는다는 것은 지금 소개가 말하는 것같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승개 출신인 소개였다.
그런 그가 돌아갈 사문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허탈감을 줄지 예상도 되지 않는 연수였기에 더욱 표정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라. 차라리 잘 됐다. 그런 놈들의 틈바구니에서 같은 정파인 입네 하며 지내는 것이 훨씬 더 역겨운 일이다. 이리 그놈들의 더러운 민낯을 보게 되었으니 후련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걱정 안 하마.”
“고마워.”
“누이가 정신이 들었다. 거동할 만하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는 소개.
그런 소개를 부축하며 공숙에게 가는 연수였다.
공숙의 의방에 소개를 데려다주고는 밖으로 나온 연수는 의원을 불러 그제야 자신의 어깨와 가슴에 난 검상을 보였다.
웃옷을 벗어 상처를 보이자 의원이 대경하여 약을 가져왔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는 고개를 기울이는 의원.
“내력으로 혈류를 막아놓았소.”
“이리 오래도록 막아놓았다면···.”
“살이 괴사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고개를 끄덕인 의원은 상처에 약을 바르며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반 치만 더 깊었으면 뼈가 상했을 거요.”
“알고 있소.”
무심하게 대답하는 연수를 보며 의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의원의 얼굴에서 차마 내뱉지 못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연수였다.
‘하여간 무인들이란.’
상처를 꿰매고 단단히 붕대를 감아준 의원.
붕대를 맨 상처를 잠시 쓰다듬으며 눈을 감는 연수.
목숨을 걸고 격돌했던 마지막 한 초식의 싸움이 떠올랐다.
잠시 사투의 여운을 즐기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눈을 뜨며 웃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 장의사가 찾아왔다.
소개 스승이자 개방 서호의 분타주였던 신영방의 시신을 확인한 장의사가 입을 열었다.
“염을 하고 장례를 지낼 준비를 하려면 내일은 되어야 합니다. 혹 묘터는 정했습니까?”
“적당히 알아봐 주시오. 갈 길이 다들 바쁜 처지인지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전표를 몇 장 꺼내어 건네는데 고개를 젓는 장의사.
“의원에게 받은 돈이면 충분히 묘터를 구하고도 남습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소.”
“예. 내일 찾아오시지요.”
말을 마치고는 목관에 신영방을 넣고는 마차에 실어 떠나는 장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연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다음날이 되자 연수는 마차를 구해서 의원의 앞에 세웠다.
세 마리의 말이 이끄는 삼두마차는 제법 커서 세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공간이 있었다.
“치료 고마웠소. 이제 떠나야겠습니다.”
연수의 말에 의원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저 청년은 몰라도 저 여인은 이제 겨우 위기를 넘겼소. 무리하다가 상처가 터지거나 속에서 출혈이라도 일어나면 십 중 팔, 구 죽을 거요.”
“조심하겠소. 여기서 더 머물다간 목이 잘려 죽을 거요.”
연수의 말에 의원은 잠시 연수의 두 눈을 뚫어지기 바라봤다.
“하아, 무인들이란 정말 제멋대로군!”
“미안하게 됐습니다.”
“됐소! 정 그렇다면 가시오!”
싸늘한 의원의 태도에 연수는 소개와 공숙을 조심히 마차에 태우고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장의사에게 찾아가자 그는 준비를 마쳐 놓았다며 일행을 횡진산으로 이끌었다.
마차로 험한 산세를 오르기 힘들어 잠시 공숙을 마차에 있게 했더니 끝끝내 고집을 부리며 따라나선다는 공숙.
“나로 인해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묘에 절을 올리지 않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야.”
할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다리를 절뚝이는 소개의 등에 업혀 산을 오르게 된 공숙이었다.
잠시 산길을 지나자 널찍한 공터에 땅을 파 놓고 인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숙을 내려놓은 소개는 염이 끝난 사부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는 관뚜껑을 닫았다.
높지 않은 봉우리를 만들어 짧은 장례를 마친 소개는 단검을 꺼내 들고는 직접 묘비명을 적었다.
-불초 제자의 훌륭한 스승. 개방의 훌륭한 거지. 신영방.-
묘비를 단단히 세워 놓고는 그 앞에 절을 하는 소개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같은 아픔을 겪은 공숙의 눈에서도 쉴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소개의 절이 끝나자 공숙이 아픈 몸을 이끌고 절을 했다.
“저로 인해 이런 화를 당했으니 소 공자가 원수를 갚는데 꼭 제가 도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절을 하고는 준비해온 술을 올리는 연수.
“이렇게 다시 뵐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원수인 소현풍은 제가 길동무로 따라 보냈습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간소한 장례를 마친 세 사람은 그렇게 강서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을 안고 떠났다.
관도를 따라 마차를 몰며 절대 마을에 들르지 않고 강행군을 하여 겨우 한 달 만에 강서를 벗어나 호남으로 들어선 일행.
호남에 들어서자 강서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전운이 감돌며 일반 백성들의 얼굴에서도 긴장감이 보였던 강서와 다르게 호남은 아직 그 정도의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다릉현에 들어와 제법 큰 객잔에 들어선 일행들.
지난 한 달 동안 제법 상처를 치유한 세 사람의 거동은 이제는 큰 불편이 없어 보였다.
“하루 묵고 갈 것이니 마차와 말들을 부탁하지.”
젊은 점소이는 눈치 빠르게 일행을 한적한 곳으로 안내하고는 마차와 말을 객잔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동안 노숙을 하며 벽곡단과 육포만 먹으며 한 달을 움직였더니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숙이 투정을 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남몰래 미소짓던 연수는 짐짓 기뻐서 입이 벌어지는 공숙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사부를 잃은 소개의 앞에서 저리 조신하게 지내는 것이 신기했는데 역시 먹는 것은 괴로웠던 모양이다.
“청둥귀와 당초육 동파육. 그리고 만두도 좀 내오고 소면과 소채도 좀 볶아다 줘.”
“예.”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뛰어가자 소개의 입이 열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소개는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참전할 거야.”
짧은 한마디에 연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파의 공적이 될 거야.”
“알아.”
“사파에서도 그리 환영받지 못할 거다.”
“상관없어.”
연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지만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연수와 결연한 눈으로 허공을 주시하는 소개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공숙만이 안절부절못하며 음식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을 번쩍 뜬 연수의 입이 열렸다.
“귀주로 가자.”
“귀주?”
소개의 물음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황성으로 가자. 기왕 그리 마음먹었다면 나와 함께 참전하는 게 좋을 거야.”
“너..도 참전한다고?”
“그래. 이리된 이상 멀리서 손가락만 빨며 지켜볼 수도 없는 처지지.”
“그럼 나도 참전할 거야.”
“누이야 소개가 참전하는 이상 당연히 참전해야죠. 분타주님의 묘 앞에서 맹세하셨으니.”
“응 맞아.”
“꼭 사황성에 가야 하는 거냐?”
“응. 꼭 가야 해. 참전한다고 혼자서 정파인들과 싸울 생각이라면 버려. 이건 정사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야. 기왕 싸울 거라면 제대로 싸워야 해.”
“그래. 가자.”
“다 정했으면 먹어도 돼? 다 식겠어.”
심각했던 표정을 지우며 미소지은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고생하셨는데 많이 드세요. 우리도 들자.”
오랜만에 편한 침상에 눕자 소개가 잠이 안 오는지 말을 걸어왔다.
“너 벽을 깬 거 맞지?”
“아마도.”
“확실한 게 아니야?”
“분명 소현풍과의 마지막 격돌 때 검강의 무리가 확실히 떠오르며 몸에 새겨졌어. 그 순간 내 이성을 삼킬 듯 끓어오르던 살심도 진정이 되더군. 하지만 모르겠어. 초절정이란 무인으로서 완성이 되는 경지라 들었는데 무엇이 특별한지 잘 모르겠다.”
“그래? 뭐 운기를 하는데 평소와 다르다든가 하는 느낌은 없어?”
“아직 운기 하지 못하고 있어. 강서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운기 하지 않고 움직였어.”
“그럼 우리 호법만 섰던 거야?”
“응.”
“요상결도?”
“안 했어.”
“하아, 그럼 지금이라도 해봐.”
“그럴까?”
말이 나온 김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개의 말대로 가부좌를 틀며 앉는 연수.
사실 궁금하기는 했다.
제대로 자신을 관조하며 무엇이 변한 것인지 어떤 발전이 있던 건지, 또 그날의 사투 끝에 얻은 무리를 깨달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두 눈을 감고 운공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연수.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던 운기였다.
평소와 같이 경락을 따라 도도히 흐르는 내기.
그러던 내기가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응? 왜···.’
점점 속도를 더하며 달려나가는 내력.
하지만 막고 싶지도 제어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사 현관을 향해 달리던 내력이 막힌 임맥과 독맥을 가볍게 뚫고 지나갔다.
“쿨럭”
운기를 하다 말고 피를 토하며 움찔하는 연수를 보고 소개는 깜짝 놀랐다.
손을 댈 수도 자신이 도울 수도 없는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던 소개는 연수가 토해낸 피를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비린내가 강한 검은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