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주위를 살펴보는 연수였다.
가슴속에 가득 차오른 분노는 살심으로 변하며 들끓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성을 잃고 살심에 먹혀버리면 자신은 몰라도 소개와 공숙은 필사였다.
그리고 강호에는 대살성이 출현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숨을 들이마시며 스무 자의 구결을 외웠다.
“하~아.”
그런 연수의 모습을 보며 소현풍은 검을 들었다.
“네가 악명이 자자한 암수일살이겠구나.”
“그쪽이 안하무인으로 무당에서도 내놨다는 속물 소현풍이고.”
소현풍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무당 제일 검 소현풍.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정파인들에게는 속물이라 불렸다.
현 무당에서 제일가는 고수이지만 계산적으로 움직이고, 손해 보기를 싫어하며 도사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 많아 평이 좋지는 않았다.
비웃음으로 자신의 도발을 맞받아치는 소현풍을 보며 그를 상대하기 여간 까다롭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빈손에 나타나는 두 자루의 단검.
연수의 손에 단검이 쥐어지자 기세가 일변하며 끈적한 살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갈!”
일갈하며 살기를 가르고 검을 뻗어 오는 소현풍.
그런 소현풍을 향해 마주 달려드는 연수.
-깡!
서로 검을 맞대어 본 둘은 인상을 굳히며 뒤로 물러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동수.’
생사투를 벌인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고 남은 하나도 절대 멀쩡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내 저놈을 기필코 막을 것이니 이 자리에서 꼭 저 배신자와 사파 년을 죽여야만 한다!”
소현풍의 지시에 넋을 놓고 있던 주변 무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얼을 타던 좀 전과는 다르게 해야 할 일이 정해지자 그 목표만을 위해 기세가 날카로워 지는 무인들.
연수의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정말이지 만만치가 않네.’
이런 상황에서 소개와 공숙을 보호하며 상대할 만한 고수가 아니었다.
상대는 그런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자신의 집중을 깨트릴 만한 명을 즉각적으로 내릴 만큼 노련했다.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웃음을 본 소현풍의 눈썹이 씰룩였다.
‘어차피 칼 위에서 살아가는 무림인의 삶. 명이 짧다 억울할 것도, 상대가 비겁하다, 원통할 것도 없다.’
“지금부터 다가오는 자는 모두 죽는다.”
말을 마친 연수의 주위로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기가 몰아쳐 나왔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경지가 낮은 고수들은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빙글 돌며 사방으로 검기를 뿌려대며 주위 고수들을 물린 연수의 신형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소현풍의 신형이 사라졌다.
-캉!
병장기 부딪히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미 두 고수의 공방이 끝나고 그들의 잔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깡! 까깡!
같은 공방이 몇 번이고 계속되었다.
그때 소현풍의 답답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뭣들 하는 것이냐!”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든 중년인이 명령을 내렸다.
“저 연놈의 숨통을 끊어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날아드는 비도들.
-따따따땅!
명령을 내리며 소개를 향해 비도를 날리던 중년인의 옆에 나타난 소현풍이 비처럼 쏟아지는 바늘들을 쳐냈다.
“독침을 조심해라!”
소현풍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린 거지 놈과 사파 년을 공격하여 암수일살을 흔들어보려 했건만 사특한 놈은 오히려 문도들에게 독침을 난사했다.
생각과 다르게 자신이 끌려다니게 생겨 버렸으니 짜증이 났다.
“크악!”
“컥!”
“독이다!”
사방에서 비도를 날리던 무인들이 쓰러졌다.
-카캉!
하지만 소개 역시 멀쩡하진 못했다. 개구봉을 휘둘러 몇 개의 비도는 막아냈지만 두 개의 비도는 허벅지와 어깨에 박혀 들었다.
“큭!”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비도를 적중시킨 무인 둘이 중독되어 쓰러졌다는 점이었다.
보이지 않던 연수의 신형이 소개의 옆으로 나타났다.
소개의 어깨와 허벅지의 혈을 두드리고는 비도를 뽑아내는 연수.
그런 연수의 뒤로 소현풍의 노성이 들려왔다.
“암수일살! 네 상대는 나다!”
“내가 할 말이다. 둘이 승부를 보는게 좋을거야. 아니면 누구 인질이 더 많이 죽나 해 볼까?”
대답하지 못하고 애먼 이만 빠득빠득 가는 소현풍.
살기로 번들거리는 연수의 눈빛이 비도문의 대주에게 닿는 순간 소현풍의 입이 열렸다.
“좋다 해 보자.”
소현풍이 달려들자 주변의 무인들이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소개야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
전음을 끝으로 연수 역시 소현풍에게로 달려들었다.
상대의 부드러운 검세가 천천히 펼쳐지자 연수의 단검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카카캉! 캉!
마치 채찍처럼 빠르게 소현풍의 주위로 날아드는 연수의 기사와 느긋하게 풀려나와 연수의 기사를 밀어내는 소현풍의 기사.
소현풍의 검이 주변을 천천히 훑어갈수록 그의 검에서 풀려나와 힘을 더해가는 기사를 보며 연수의 이가 갈렸다.
‘일섬쾌련!’
허공에서 지상을 향하여 화살처럼 쏘아져 가는 연수의 기사가 소현풍에게 닫지 못하고 퉁겨졌다.
‘이대로는 안 돼.’
비슷한 경지에서 동수를 이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늙은 고수였다.
저 경지에 올라선 시간과 쌓인 시간이 달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연수의 신형이 소현풍에게로 쏘아졌다.
소현풍의 부드럽고도 강맹한 기사가 다가오는 연수의 사방에서 압박을 가했다.
막 사방에서 덮쳐오던 기사가 연수에게 닿으려는 순간.
연수의 두 단검 끝에 붉은 유형의 기운이 서렸다.
-스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갈라지며 사라져 버리는 기사들.
인상을 굳힌 소현풍이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의 검에 푸른색의 유형의 기운이 맺히는 순간 두 무인의 병기가 부딪쳤다.
-쾅! 카쾅!
이를 지켜보고 있던 무인들의 주변을 두 무인의 병기에서 파생된 경기들이 지나쳐 갔다.
“조심해라! 거리를 더 벌려!”
비도문의 대주가 놀라서 뒤로 물러서며 명령을 내렸다.
중독되어 쓰러진 동료들을 들쳐메고 뒤로 물러서는 무인들.
소개 역시 공숙을 등에 업고 사부의 시신을 안아 들어 무인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거리를 벌렸다.
-콰콰콰콰쾅! 까캉!
빠른 연격을 한 자루 검으로 부드럽게 쳐내며 소현풍은 파고들려는 연수를 밀어내고 거리를 주지 않았다.
반대로 연수는 어떻게 해서든 초근접 거리로 좁히려 안간힘을 썼다.
육십 초식이 넘도록 둘의 공방이 계속되자 주변의 무인들은 절정의 끝에 있는 고수들의 싸움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뱉어냈다.
자신들의 처지마저 잃고 넋을 놓고 싸움 구경 중인 무인들을 불만 가득한 눈으로 훑어보는 소현풍.
-쐐애액! 땅!
잠시의 한눈을 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연수의 독침이 소현풍의 검에 막혔다.
“한눈팔다가 한순간에 죽는 놈들 많이 봤지.”
“흥!”
‘방심 할 수가 없는 늙은이군.’
자칫 비도문도들과 난전이 되면 소개와 공숙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다시 격돌하며 초식을 주고받는 두 무인.
-까깡!
불꽃이 튀며 두 무인의 검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단검의 반절 정도 맺혀 있던 유형의 기운이 이제는 단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소현풍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입이 열렸다.
“이놈! 종남의 무공이구나?”
“글쎄. 종남 뿐일까?”
입매를 비틀며 비웃음을 짓는 연수.
-카캉! 그그그극.
둘의 검이 맞대어져 마찰을 일으키자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요동을 쳤다.
주변으로 튕겨 나가는 경기들이 애먼 땅을 파헤쳤다.
그 순간 연수의 단검이 부드럽게 뒤로 밀려나며 처음으로 유검세가 펼쳐졌다.
시종일관 쾌검으로 직선적인 공격 일변도이던 연수의 단검이 춤을 추듯 회전하며 부드럽게 휘둘러지자 소현풍의 눈이 부릅떠졌다.
-따따땅!
“쳇!”
애초에 소현풍을 흔들어보려 구면장의 무리를 펼쳐 보였던 연수였다.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자마자 무음의 독침을 쏘아 보냈는데 바로 막아내는 소현풍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장수무투는 대체 본산의 무공을 어디까지 훔쳐낸 게냐!”
“글쎄.”
이죽거리며 소현풍을 향해 달려드는 연수.
싸움이 이어질수록 연수는 마치 커다란 벽에 막힌 듯한 답답함에 사로잡혔다.
무음의 독침이 막히는 순간부터 들던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초식들을 풀어냈음에도 상대에게 단 한 걸음의 거리도 줄일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다 막힐 것 같은 막막함은 점차 연수의 심기를 흔들어 왔다.
그때 소현풍의 검세가 바뀌며 검에 맺혔던 기운이 한 치정도 더 뻗어 나오며 매서운 검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검을 밀어 피해내는 연수.
습관적으로 반대 손의 검을 휘두르며 스쳐 지나가는 둘.
-푸슉!
연수의 어깨 위로 피가 튀어 올랐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예리한 기운의 예기로 옷과 피부가 갈라졌다.
“쳇!”
어깨의 혈도를 두드려 지혈하는 연수의 눈에 잘린 상대의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만큼 상대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고수라서 자신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현풍의 잘린 소매를 보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생각이 들자 달려드는 연수.
소현풍 역시 검을 휘두르며 연수를 맞았다.
-카캉! 깡!깡!깡!
소현풍의 눈매가 비틀리며 인상이 구겨졌다.
“잡스러운 짓을!”
자신의 검면을 노리며 찍어오는 연수의 파병초에 소현풍이 손목을 돌려 검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다.
연수의 입매가 뒤틀리며 눈매가 좁아졌다.
처음으로 소현풍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뒤로 물러서는 무인을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연수였다.
소현풍이 물러서는 만큼 거리를 좁히며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연수.
-까깡!
그제야 소현풍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한번 물러서자 계속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다가설수록 기세가 강렬해지는 상대의 무공에 당황하면서도 이제 와 부딪히기에는 너무나 불리해 손해를 볼 것 같았다.
그렇게 네 걸음째 물러서는 순간.
-스팟! 파팟!
예리한 소리와 함께 왼팔과 어깨에 피가 튀어 올랐다.
“큭!”
그제야 자신의 실책이 뼈저리게 아파 왔다.
맞서야 했다. 암수일살의 기세를 손해를 보더라도 꺾어 놓아야만 했다.
그리 생각한 소현풍의 검세가 뒤바뀌었다. 그의 검에 맺힌 기운이 더욱 선명해진다 싶은 순간 둘의 검이 격돌했다.
-꽝!
지켜보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두 무인을 중심으로 강력한 돌풍이 휘몰아치며 그런 무인들을 스쳐 지나갔다.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며 두 무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장내의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집중했다.
“헉!”
누군가의 숨을 집어삼키며 놀라는 음성이 들려오자 장내 무인들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필히 죽여야 후환이 없을 놈이로구나.”
말을 하는 와중에도 옆구리에 길게 갈라진 검상을 지혈하는 소현풍.
그의 옆구리에서 제법 많은 출혈량이 있었는지 바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런 소현풍을 보는 연수의 표정 또한 좋지는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단검에 맺힌 기운이 저 소현풍의 기운에 밀려 버렸다.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면 저 늙은이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었을 텐데 결정적인 순간 늙은 도사 놈의 기운이 선명해지며 자신의 기운보다 강력해졌다.
늙은이의 몸을 가르던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자신이 죽을 뻔했다.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니 처음 공격을 막아냈던 단검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명도 길구나. 도사 같지 않은 늙은이.”
“내가 할 말이다. 사특한 놈 같으니라고!”
말을 끝내며 신형을 늘려 다가오는 소현풍.
상처를 입었으면서 먼저 공격해 오는 자신감을 증명하듯 한층 더 선명해진 환한 푸른색의 기운.
“거, 검강!”
지켜보던 무인 하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푸르던 기운이 완전한 모양을 잡아가는 것이 검강이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에 비해 연수의 단검에 맺힌 붉은 기운은 아직은 기체처럼 일렁이며 날리고 있었다.
연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검이 부딪히는 그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많은 것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됐다. 넘지 못하면 거기까지인 거지.’
생각을 마친 연수는 오른손의 단검을 버리고 왼손에 들려있던 단검을 오른손에 쥐었다.
제 자리에서 단검을 가슴 앞으로 내밀며 소현풍을 기다리는 연수의 기세가 낮게 가라앉았다.
보는 이들도 싸우는 본인들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한 초식으로 끝이다.’
주먹을 꽉 쥐며 사투를 지켜보는 이들.
-스팟
마치 소현풍이 연수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다.
연수의 뒤로 이 장이나 더 움직이고서야 멈춰선 소현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