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그렇게 순조로운 여행길이 계속되자 정회와 연수는 어느새 어색함과 경계심은 사라지고 제법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회가 공숙과 비슷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수에게 편하게 반말을 하는 것부터 감정의 꾸밈이나 감춤 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점이 연수에게는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정회에게 조언을 해 주는데 망설임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호검문이라면 빚이 있지. 이렇게 갚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화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아니, 그냥.”
잠시 연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도화의 입이 열렸다.
“오라버니께는 감사하고 있어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정회는 제가 힘들 때 제 곁을 지켜준 소중한 사람이에요. 저도 무림인이에요. 관계도 없는 남의 무공을 봐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젓는 연수였다.
“그거 별거 아니야. 우리 사파인들의 특성이기도 하고. 비전을 내어주는 것도 아닌데 뭐.”
“그래도 고마워요.”
괜히 머쓱해진 연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정 동생은 어때? 무공을 더 배울 생각은 없어?”
“배우고는 싶지만···. 저는 이미 귀형가의 입문공을 익혔어요. 오라버니가 도움을 줄 수 없을 거예요.”
“권법은 얼마나 익힌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도화였다.
“제가 권법을 익힌 것은 어찌 아셨어요?”
“그냥, 이정도 경지에 오르면 보여. 미묘하게 발달한 상체 하며 병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점. 그리고 여인의 손 치고는 손가락 마디가 미묘하게 발달한 점. 마지막으로 미약한 기세까지.”
“와, 오라버니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얼마나 익힌 건데?”
“귀형가의 입문 무공인 배화권을 오성까지 익혔어요.”
“그래? 보법과 경공은 전혀 배우지를 못했을 테고.”
“그건 또 어찌 아셨어요?”
“망노 그 늙은이가 가르쳤을 리가 없지.”
망노의 이야기가 나오자 도화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요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그 그늘을 보자 연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걱정 마. 내가 있는 한은 망노가 네게 손을 뻗진 못 할 테니까.”
“네···.”
힘없는 그녀의 대답이 연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떻게 그녀의 기운을 돋아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연수의 기감으로 강력한 기운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도화를 뒤로 물리며 갑판 앞으로 몸을 튼 연수가 무서운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첨펑! 첨펑! 첨펑!
물기둥이 솟아오르며 갑판 위로 떨어져 내리는 인영들.
언젠가 한 번 겪어봤던 것 같은 기분에 연수의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정파의 개들이 있다면 지금 나서거라 아니면 이 배 위에···.”
말을 잇던 복면인의 눈이 연수와 마주치자 절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는 복면인.
그때 몇몇 병장기를 꺼내든 무인들이 갑판 위로 뛰쳐 올라왔다가는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연수의 뒤로 쳐지는 기막.
“내가 말이다. 정말 우연을 싫어해. 아니! 우연 따위 믿질 않지.”
“그렇게 말 하신들 이렇게 하라 해도 방법이 없다는 거 더 잘 아시죠?”
“그래서 미치겠다. 왜 하필! 또 너냐?!”
“전들 알겠습니까? 왜 제가 배만 타면 수적 노릇을 하시며 나타나냐고요!”
“이번엔 못 내린다.”
단호한 사황성주 패천후의 말에 연수는 그의 뒤로 서 있는 네 명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전에 보았을 때 보다 거친 기세며 살벌한 눈빛.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기 힘들었다.
“성주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피식 웃은 패천후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연수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중상···. 입니까?”
중상이라는 말에 패천후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찌 알았어?”
“후우, 누굽니까?”
“어찌 알았냐니까!”
“기막이요.”
“그게 뭐!”
“전보다 얇아요. 고루 유지되지도 않고 있고, 흔들리는 것 하며.”
“쳇! 눈치는 빨라서. 그러다 오래 못 산다.”
“그래서 누군데요? 맹주가 움직였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패천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화산에 숨겨둔 검이 제법 매섭더구나. 그 늙은이들이 아직 살아서 화산을 맴돌 줄 몰랐다.”
“전대 고수인가 보죠?”
“은거했다는 늙은이들이 다 기어 나와서는 난리였다.”
지난번에는 분명 열한 명의 고수들이 성주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한데 이제 남은 고수는 겨우 넷. 일곱이 돌아오질 못했다.
그런 연수의 눈길을 읽은 성주가 조용히 읊조렸다.
“화산과 바꿨으니 손해 본 장사는 아니다.”
패천후의 음성에서 말과는 다르게 쓸쓸한 감정을 읽은 연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됐고, 네놈은 어딜 가는 길이야?”
“일단은 강서로 갑니다.”
“강서?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소림에서 한 건 한 모양이군.”
“예. 나름대로 기연이 있었죠.”
“흥! 기연은 개뿔! 어떤 놈인지 사파 최고 인재의 싹수를 잘랐으니 정파로서는 이득이겠지.”
“제가 정신이 나가 살인에 미친 무인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됐고, 보면 알겠지만, 우리 못 내려.”
“알아요. 그래도 이건 확실히 하시죠. 저한테 빚진 거예요.”
패천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야! 이 배가 니꺼야?”
“그거 말고요.”
“그럼 뭐?!”
성주를 가만히 바라보는 연수. 성주가 끝까지 눈을 부라리자 연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러실 겁니까?”
“뭐가?”
“제 입으로 쭉 생색낼까요? 체면 상하십니다.”
“빌어먹을 놈. 그때 남궁가 애송이 놈한테 뒈지게 두었어야 했어.”
“그랬으면 제 덕을 보셨겠어요?”
“갈수록 주둥이만 사는군.”
“어쨌든 이번에는 우연이 아니었어요. 일부러 크게 크게 벌이면서 시선 끄느라 저도 뭐 빠지게 고생했습니다.”
“옆에 여자끼고 뱃놀이 다니는 게 고생이면 그 고생 나도 한번 해 보자.”
“그 전까지 힘들었어요. 가는 곳마다 정파 놈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달려드는 통에 얼마나 귀찮았는데요. 그런데도 변장도 안 하고 꿋꿋이 흔들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 달라고?”
대답은 안 하고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연수였다.
피식 웃은 성주의 전음이 연수의 귓속으로 날아들었다.
-뭔데?
-귀형가. 눌러 주실 수 있으세요?
-귀형가는 왜?
-저기 저 면사를 두른 여인. 망노의 제자예요. 망노를 피해 도망 중이고요. 저랑은···.
-하필 많은 계집을 두고!
-망노를 눌러주지 않으시면 사파에서 암수일살과 귀형신살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겁니다.
-십 중 십 네가 죽을걸?
-확신 하십니까?
순간 연수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기세가 한바탕 주위를 휘젓고는 다시 연수에게로 갈무리되어 사라졌다.
-십 중 팔이다. 너 죽어.
눈썹이 씰룩이며 눈꼬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초절정이었습니까?
-꽤 오래됐다.
잠시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연수의 눈이 떠졌다.
그의 눈빛에는 무인의 각오가 담겨 있었다.
-그를 넘어서면 저도 그 경지에 발을 디디겠지요. 넘지 못하면 그뿐. 어차피 저는 생사의 경계를 지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번에는 패천후의 두 눈이 감겼다.
깊은 한숨을 내 쉰 패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 손 많이 가는 놈이로구나! 좋다! 망노는 내가 막아주마. 단! 강서에 오래 있지 말아라.
-일행을 만나면 바로 떠나지요.
잠시 그런 연수를 바라보던 패천후가 물었다.
-어디로 갈 것이냐?
-글쎄요.
-마음 바뀌면 언제든 성을 찾아라. 네 별호를 밝히면 언제든 내게 데려다줄 테니.
-예.
“죽겠으니까 이제 안으로 안내 좀 해.”
패천후의 말에 피식 웃은 연수는 성주의 일행을 객실 안으로 안내했다.
사황성주 패천후와 그의 동료들은 한동안 객실 안에 박혀 나오질 않았다. 오직 연수만이 그 안을 들락이며 객실 앞을 지킬 뿐이었다.
성주의 정체에 대해서는 도화와 정회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오 일이 더 지나자 문밖으로 나오는 성주의 일행.
처음의 거칠고 불안하던 기운이 갈무리 되며 날카로운 기세를 흘리는 네 명의 고수와 특유의 여유를 되찾은 성주를 보고 있자니 몸을 거의 회복한 듯 보였다.
“이제 좀 패력도천 패천후 다우십니다.”
“언제는 아니었고?”
“오 일 전에는 답지 않게 불안한 기색을 다 보이시길래요.”
“그랬나? 글쎄, 우연이 심상치 않길래 너를 어쩔까 고민은 했다만 내가 막 불안해하고 그럴 경지는 아니라서.”
“쳇, 무슨 말을 그리 살벌하게 하세요.”
“됐고, 강서에 오래 있지 마. 그리고 망노나 귀형가를 자극하지도 마.”
“그쪽에서 건들지 않으면 제가 먼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아휴, 전생에 무슨 악연이 쌓였길래 이런 놈과 자꾸 연이 닿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패천후는 입술을 삐죽이는 연수를 뒤로하고 잠시 면사를 한 도화에게 시선을 둔 후에 갑판으로 나갔다.
따라 나온 연수의 귀로 선명한 성주의 전음이 들려왔다.
-분명 경고했어.
-저도 분명 약조했습니다. 먼저 건들지 않으면 저 또한 미련한 짓은 않겠다고.
전음을 남겨두고 갑판 위에서 사라지는 다섯 명의 고수.
‘따로 수공을 익힌 건가? 아니면 그냥 수영을 잘 하는 건가?.’
아직 강서까지는 배를 타고 열흘은 더 남은 거리였다.
지난 오 일 동안 연수와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한 도화와 정회가 와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모든 대답을 마친 연수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두 여인.
“거···. 짓 말. 사황성주 패력도천 패천후가···. 왜···.”
“의심은. 소문 못 들었어? 화산이 멸문된 것.”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정회.
그런 정회를 대신해서 묻는 도화였다.
“그, 그게···. 그럼?”
“응. 저 양반 작품.”
서로 눈만 깜빡이며 다섯 고수가 사라진 갑판을 한동안 바라보는 두 여인이었다.
하늘 위로 지나가는 조각구름을 보며 강서에서의 일을 걱정하는 연수였다.
“소개와 누이는 괜찮겠지? 부디 괜찮아야 할 텐데.”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나루터에 내려서 오랜만에 땅을 밟는 세 사람은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질리게 먹었던 벽곡단을 더는 먹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즐거워지는 셋이었다.
파양현에 들어서며 객잔으로 달리듯 걸음을 재촉한 셋은 제일 먼저 이것저것 잔뜩 음식을 주문했다. 다섯 가지의 요리와 소면과 잘 지어진 밥을 주문하여 현란하게 젓가락을 놀리는데 다른 탁자에 자리 잡은 낭인들의 이야기가 연수의 밝은 귀에 들려왔다.
“그래서 덕흥현에서 난리가 났다고?”
“그래. 안 그래도 전황이 불리하던 사황성에서 긴급하게 낭인들을 모집한다 했네. 덕흥현으로 파견되는 낭인들은 하루 은자 두 냥씩 일당을 내어준다 하더군.”
“은자가 아니라 금자를 두 냥씩 준다 해도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갈 놈들이 있을까? 나라면 절대 안 갈 텐데.”
“글쎄, 제법 많은 낭인이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멍청한 것들. 죽은 다음에야 돈이 아무리 많은들 뭐에 쓴다고.”
“나 또한 그리 생각해서 이곳까지 피신했지. 내일 배를 타고 호북으로 넘어갈 생각이네, 아무래도 강서에 있다가 애먼 불똥에 타 죽을 것 같아.”
“하긴 무당과 남궁세가가 나섰다면 아무리 강서라도 힘들겠지.”
거기까지 들은 연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당장 마시장을 들러 세 마리의 말을 사 온 연수가 도화와 정회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 이리되었으니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자칫 늦으면 누이가 위험해.”
두 여인은 한마디의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수가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하루도 채 쉬지 못하고 말을 달리는 세 사람.
‘부디 별 탈이 없어야 합니다.’
말을 달리는 내내 소개가 옆에 있으니 큰일은 없을 거라 되뇌는 연수였지만 그런데도 불안해지는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거의 쉬지 않고 하루 중 대부분을 말 위에서 시간을 보내자 며칠 만에 덕흥현 근처에 도착한 연수는 주변에 널린 시체와 혈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체 썩는 냄새와 진한 혈향은 보통의 사람은 맡고 있기 힘든 역한 냄새였다.
그렇게 한동안 말을 달리는데 천지 사방 곳곳에 무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런 시체를 볼 때마다 더욱 불안해지는 연수였다.
덕흥현안으로 들어서자 성안의 백성들은 경계심과 불신의 표정으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아이들은 아예 보이지를 않았고, 여인들 또한 나이 많은 여인들뿐이 없었다.
청년과 나이 많은 남자들 또한 인상을 굳히고 주변을 살피며 조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런 연수의 귀로 목검을 차고 지나가는 두 청년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 처유희의 제자였다니. 하지만 그 악독한 것도 오늘로 끝이군.”
여기까지 들은 연수의 신형이 평소와 다르게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