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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97화 (97/202)

# 97화

연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연수의 신형이 땅바닥에 붙듯 쏠리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런 연수를 향해서 쏟아져 나오는 검기들.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아슬아슬하게 검기를 피해 나가는 연수였다.

지척으로 무사들의 검기 하나하나를 피해낼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 착각이 들었다.

검기의 기운 하나하나가 곁을 지나는 그 찰나의 시간이 너무도 생생히 느껴져 왔다.

-스스슷!

검은 빗살이 무사들의 곁을 스쳐 공숙의 옆에 우뚝 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다섯 명의 무사가 쓰러졌다.

무사들이 쓰러지고 나서야 그들의 목이 갈라지며 피가 쏟아져 나왔다.

동료들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절명하자 허망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체를 바라보는 중년인.

“이리···. 이리 허망하게 갈 무인들이 아니거늘···.”

“무림인으로 사는 이상 은원의 고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분노로 가득한 중년인이 연수를 노려보았다.

공숙의 입이 열렸다.

“우리 사부님도 이리 가셨다면 억울하진 않으셨을 거야. 그날 너희들이 했던 짓은 정사를 떠나 무인이 무인에게 할 수 없는 짓이었어.”

“그건···.”

“거기까지. 더 안 들어도 알아. 그리고 너도 알잖아. 그런 변명 이제 와 소용없다는 거.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삼 일간의 지옥 끝에 죽음을 맞을 거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숙의 손끝에서 붉은 기운이 날아와 무사의 단전으로 날아들었다.

무사가 검기가 맺힌 검으로 그 독기운을 반으로 쪼개며 뒤로 물러섰지만, 어느새 무사의 옆에 나타난 공숙의 독장이 무사의 가슴에 적중했다.

-펑!

쓰러지는 무사의 뒤로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경공을 펼쳐 달려오는 무인들이 보였다.

눈썹을 씰룩인 연수가 외쳤다.

“먼저 가세요. 강서의 덕흥현 제일 큰 객잔에서 만나요.”

공숙이 거절의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누이! 여기는 사지입니다. 절 믿고 소개와 먼저 가세요. 변장도 바꾸고요. 어서요!”

정파의 추적이 얼마나 거센지는 직접 몸으로 겪어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무작정 도망 처서는 길이 없었다.

게다가 추적술을 모르는 공숙을 데리고 도주하는 것 보다 혼자서 몸을 빼는 것이 훨씬 승산이 높다고 판단한 연수였다.

소개의 옆에만 붙어 있다면 공숙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달려오던 무인들이 연수를 둘러싸며 흉흉한 기세를 풍겨왔다.

“암수일살 맞느냐?”

대답 대신 복면을 풀어 버리는 연수.

“다시 묻겠다. 암수일살 맞느냐?”

묻는 사내의 앞으로 고통에 땅바닥을 구르던 사내가 꿈틀대며 기어왔다. 사내의 발목을 붙들고 죽여달라며 애원하는 무사.

이를 악문 사내의 주위로 이를 가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해약 따위 없는 독이다.”

비웃음을 머금은 연수의 말에 사내는 검을 뽑아 들었다.

-채채챙!

사내가 검을 뽑자 연수를 둘러싼 활검대의 무인들이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빙글 돌아가는 양쪽의 손목.

연수의 입이 열렸다.

“싸움이 시작되면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거야. 잘 생각해라. 나 암수일살이야.”

검을 쥔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수의 뒤에 검을 쥔 무사 하나의 손이 가슴으로 들어가는 순간 독침이 날아들었다.

대경한 무사가 옆으로 몸을 날리며 겨우 피해냈다.

“너희 추적은 한번 당해봐서 말이야. 한 번 더 헛짓하면 벤다.”

연수의 입에서 벤다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연수를 둘러싼 열 두 명의 무사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제야 보이지 않던 기세가 눈에 보이듯 느껴졌다.

자신들은 지금 암수일살의 거리에 들어왔다.

한 장도 넘는 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포위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다.

이만큼의 거리와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암수일살이 마음먹는 순간 자신들은 베인다는 위화감이 끊임이 머릿속에 울려댔다.

“조심해. 까딱 움직이면 다 죽인다.”

무리의 최고수인 사내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일류고수 열둘이었다. 그것도 활검대라는 무림맹을 대표하는 무력대다.

그런 자신들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 이제 어쩔래? 선택의 시간이야. 조용히 돌아갈래? 아니면···.”

뒷말을 흐리는 연수.

활검대의 무인들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결심한 듯 검을 쥔 손에 힘을 더 줬다.

“활형진을···.”

사내의 기세가 일렁이며 사내의 입이 열리는 순간 연수의 신형이 흐려졌고, 사내가 활형진이라는 단어를 뱉는 순간 검은 빗살이 세 무사를 스쳐 지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진을 짜는 무사들.

일반적인 차륜진 따위가 아니었다.

아홉 방위의 위치를 종대로 지키며 방위를 서로 바꾸는 진.

‘곤륜의 진과 유사하군.’

피식 웃으며 입매를 비튼 연수가 활형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깡!

기형단검을 막아낸 무사의 입매로 한줄기 피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연수의 양손이 잔상을 남기며 무수히 많은 연격을 쏟아내었다.

-까까까깡! 츠팟! 스스슥!

채 다섯 번의 검격을 막지 못한 무사의 손목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순간 연수를 향해 사방에서 검을 찔러오던 다섯 명의 신형이 허무하게 허물어졌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

팔이 잘린 사내를 빼고는 모든 무사의 숨이 끊기며 목줄기가 갈라졌다.

“이···. 이게···.”

“사정이 있다 보니 살려주기 힘들어.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놈! 하늘이 두렵···.”

그 말을 끝으로 사내의 목이 갈라졌다.

쓰러지는 사내의 시체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연수가 중얼거렸다.

“너희는 하늘이 무서워 살인을 안 하냐?”

역시나 사람을 죽이는데도 살심을 품었는데도 편안했다. 그 어떤 충동도 없었다.

단검을 갈무리한 연수는 너무나 평온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장내를 벗어났다.

말을 매어놓고 봇짐을숨긴 숲으로 돌아오니 공숙의 짐과 말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떠나려는데 땅바닥에 공숙이 남겨놓은 글귀가 있었다.

-꼭 돌아와.-

마치 전쟁에 나가는 병사에게 가족이 하는 말과 같아 괜히 우울해지는 연수였다.

‘저들도 예전의 그 무림맹이 아니고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야.’

분명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은 있었다. 당시에는 계속해서 쫓기며 포위망이 좁혀져 오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웬만한 포위망 정도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무림맹이 자신을 잡기 위해서는 천라지망을 펼치고 고수들을 상당수 투입해야 하지만 지금은 정사 대전 중이었다.

무엇보다 조금만 지나면 섬서에서는 난리가 날 것이다. 최대한 그 혼란을 이용해야 했다.

‘성주 좀 분발해 봐요. 서로 덕 좀 봅시다.’

강호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이후로 항상 변장하고 살던 연수였다. 그런 연수가 무복을 입고 제 얼굴을 드러내고 이동을 시작했다.

남소현 쪽으로 방향을 잡은 연수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지금처럼 관도 위를 말을 타고 달리는 한 추적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삼 일간 관도 위를 달리며 노숙을 하는데도 그 어떤 추적자도 연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생각보다 수월···.’

거기까지 생각한 연수의 눈이 빛났다.

수월하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마치 자는데 미약한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모기 같은 신경을 거스르는 기감이 느껴졌다.

야밤에 관도 옆에서 노숙하는데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강하지도 않은 이런 은밀한 기운.

문득 사황성주 패천후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네놈 기운은 잊히지 않아. 제일 경계하는 기운이거든. 은밀해서.-

모닥불 앞에 앉아서 불을 쬐고 있던 연수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은 순간.

기감에 걸려들던 모기 같은 은밀한 기운이 세 방향으로 찢어지며 연수에게서 멀어졌다.

그중 두 인영의 목을 연수의 단검이 가르고 지나자 하늘 위로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쳇. 동작 하나 빠르네.”

끝까지 마무리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연수.

머지않아 추적자를 따라잡아 그의 앞에 내려서자 검은 무복을 입은 추적자가 체념의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몇 가지 대답해 주면 살려준다.”

일 푼도 믿지 않는다는 불신의 눈빛으로 연수를 노려보는 추적자.

“사람 목숨을 두고 거짓말은 하지 않아.”

왠지 저 말이 신뢰가 가자 추적자의 눈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어차피 너는 신호를 보냈잖아. 이제 와 너를 죽이던 그렇지 않든 상관없게 되었어.”

추적자의 입이 겨우 열렸다.

“뭐가 궁금하오?”

“일단 내가 누군지 알고 쫓는 거 맞지?”

“암수일살.”

하긴 당연했다. 무림맹이 설마 착각하여 자신을 타인으로 오판하고 쫓는단 말인가.

“무림맹 소속 맞지?”

“맞소.”

“관도 위로만 이동했는데 추적술이 제법 인가 봐. 어떻게 찾았어?”

“활검대가 몰살당한 곳 주위 삼백 장을 철저히 조사했으나 사람이 도망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소. 하여 추적조들을 쪼개어 모든 관도를 추적하게 했소.”

“아!”

그건 생각 못 했던 부분이었다. 확실히 저렇게 되면 어느 관도로 도망을 가건 추적당할 수밖에.

“마지막 질문. 네가 보낸 신호 누구를 얼마나 부르는 거지?”

“활검대의 부대주와 그의 직속 무사들이 올 것이오.”

“부대주? 직속 무사?”

“그건···.”

이를 악무는 추적자의 눈빛에 단호한 빛이 서렸다.

“아아 걱정 마. 네가 말 안 해주면 도망가면 되니까. 근데 약속하지. 네가 말해주면 여기서 기다리기로.”

“거짓말!”

“내가 왜?”

추적자는 말문이 막혔다. 왜? 라니 저게 쫓기는 자각이 있는 자가 할 말이란 말인가.

“좋소! 남아일언 중천금이오!”

“그럼.”

“부대주는 한때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강호에는 철혈매화라 불리는 고수요. 그의 직속부대는 그가 직접 선발한 활검대무사들로 이루어져 있는 삼십인 이오.”

“그렇구만. 그럼 마지막 질문. 나 어디서 기다리면 되냐?”

추적자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암수일살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수는 처음 불꽃이 올라온 공터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까지 피우고는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추적자는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지켜보기도 애매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와서 불이나 쫴. 한번 약속한 이상 어길 생각은 없으니까. 아니면 돌아가서 따뜻한 잠자리에 들던지. 나 쫓아다닌다고 고생깨나 한 것 같은데.”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렇다고 저놈을 놔두고 가자니 혹여 약속을 어기고 도망을 칠까 걱정이 되고 그렇다고 곁에 가서 앉자니 뭔가 서로의 입장 상 절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추적자는 이내 결심을 한 듯 뚜벅뚜벅 연수의 옆으로 걸어와서는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너는 어쩌다가 무림맹의 추적자가 된 거야?”

“정확히는 추매대 황매조 조원입니다.”

“하는 일은 사람 쫓는 거잖아.”

“무림맹에 투신했을 때 별 볼 일 없는 저를 일개 무사가 아닌 추적술을 가르쳐 추매대의 대원으로 이끌어 주신 분이 계셨기에 여기에 이러고 있죠.”

“그렇구나. 나도 추적술은 좀 배웠는데 너희 실력 좋더라.”

상대는 악명이 자자한 고수 암수일살이었다.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하나였던 남궁진수를 암살하고 창궁검대를 습격하고 곤륜의 장로들을 참살한 사파인. 그런 고수에게 인정을 받으니 나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추적자였다.

“약속은 지키니까 괜히 나서지 말고 있어. 그럼 죽을 일은 없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연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두 눈에 보이는데도 전혀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당황하는 추적자.

그 순간 연수의 신형이 마치 안개처럼 흐려지는 착각이 들었고 그의 신형이 흔들린다고 생각되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연수였다.

벌떡 일어서서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몰려오는 활검대의 기척이 느껴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며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본능적인 위화감이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몰려오는 활검대를 물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왠지 이 모닥불 주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모닥불 주위로 천 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 주저하는 순간 첫 번째 비명이 밤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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