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94화 (94/202)

# 94화

“왜 지난 일은 꺼내고 그러냐.”

뻘쭘해진 연수가 핀잔을 주자 소개가 짓궃게 웃었다.

“크크, 그냥. 생각이 나서 그러지. 그런데 저···. 공 소저. 소저도 변장술이 아주 훌륭하십니다.”

“응. 연수가 가르쳐 줬어.”

“그랬군요. 그런데 계속 이놈과 한방을 써오신···.”

“여장한 이후로는 거의 그랬지.”

소개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똥이 튀었다.

“어이 친구. 오랜만에 비무나 한번 해볼까?”

“보는 눈이 많다.”

“그러지 말고 으슥한 곳에서···.”

공숙이 피식 웃으며 소개의 말을 끊었다.

“너, 나 좋아한다며?”

“컥! 콜록! 콜록!”

놀란 나머지 침을 삼키다 사레가 들린 소개가 기침을 해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런 소개의 등을 두드려 주는 연수.

“둘이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이야기 나눠요. 나는 혹 좀 떼고 올게요.”

“혹?”

“개방 승개면 나름대로 신원은 확실하니까요. 이제 빼먹을 거 다 빼먹은 독쟁이는 떼어 내야죠.”

“쉽게 안 떨어질 텐데.”

공숙의 말에 피식 웃는 연수였다.

“지가 안 떨어지면 어쩌려고요.”

밖으로 나온 연수는 역시나 지객당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던 진원에게 다가갔다.

“소저, 식사하러 가십니까?”

고개를 젓는 연수.

평소와는 또 다른 분위기에 진원은 그녀의 심중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대답을 들을 때가 된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저···.”

“여기까지 공자와 오는 시간 동안 좋은 추억이 많았습니다.”

“추억···.”

단호한 눈빛으로 진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같이 여행하는 동안 정 또한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별을 고하려 합니다. 더는 소협과 함께하면 정말 정인을 배신하고 싶어질 테니까요. 어제오늘 불공을 드리며 수백 번 수천 번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하지만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로 인해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그 무거운 죄와 저버린 도리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원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저, 저는···.”

“소협! 더는.. 더는 아무 말씀 마세요! 더는 저를 흔들지 말아주세요!”

고개를 돌리며 눈물짓는 연화.

그 모습을 본 진원의 두 눈에 맺혔던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저희는 여기까지만. 좋은 추억을 평생 가슴에 묻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살아가요.”

뒤로 돌아 터덜터덜 걸어가는 진원의 기척이 느껴졌다.

몇 걸음 떼던 진원이 연화를 등진 채 입을 열었다.

“영원히, 소저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 또한 소협과의 추억을 평생 기억할 거에요.”

“크흑!”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는 이를 악물고 경공을 펼쳐 멀어져가는 진원을 바라보며 연수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고마웠다. 독쟁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객당으로 들어오자 공숙과 소개가 이상한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왜? 뭐요?”

공숙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죽이지 그랬냐. 그게 났겠다.”

소개 역시 맞장구를 쳐댔다.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

“그럼 뭐 어쩌라고? 내가 남자였고 그동안 이용했다고 미안하다고 할까? 그러고 사생결단 내서 저놈 목을 댕강 잘라야 속이 시원하겠어? 저놈도 평생 추억할 아픈 사랑의 기억 하나쯤 있는 게 좋지. 그리고 공숙 누이도 황연만사편 구경할 때는 좋아했잖아요.”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죽이면 죽였지 이리 농락을 하는 건···.”

“쳇, 나만 나쁜 놈이지.”

심사가 꼬인 연수는 좁아진 눈매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쩔건데요? 누이는 이놈 마음을 어쩔건데요? 연심이 깊어져 열병이 났다는데 어찌 책임질 겁니까?”

괜히 자신을 걸고넘어지자 얼굴이 새빨개진 소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헛소리야!”

“기막 안 쳐놨다 소리죽여.”

공숙이 뒤늦게 기막을 치며 소개를 바라봤다.

“나는···. 글쎄. 아무래도 거지라서 배고프게 살 것 같은데···.”

“저 나름 잘 나가는 개방 고수입니다.”

발끈하여 대꾸한 소개가 몰려오는 민망함에 자책했다.

‘내가 미쳤지.’

“그래? 흠 그렇다는 말이지.”

미묘한 눈빛으로 소개의 위아래를 훑는 공숙.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어찌할 줄을 모르는 소개.

“아휴, 둘이 잘 해보슈. 나는 부처님한테 신세 한탄하러 갈 테니까.”

둘의 하는 짓을 보다 못한 연수가 공숙이 쳐 놓은 기막을 찢고, 밖으로 나왔다.

천불전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속으로 쉼 없이 투덜거리는 연수였다.

‘쳇, 뭐가 죽이는 게 났다는 거야. 살려 보냈으니 이정도면 훌륭한 인품이지.’

천불전에 도착하자 천불전의 앞을 지키는 승려와 시주받아 이름을 적는 승려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시주님 정말이지 불심이 깊으시군요. 하지만 몸이 상하지 않게 조심하시지요.”

한번 오면 한 시진이 넘게 절을 해 대는 여인이 혹여 몸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공손히 합장하며 고개를 숙여 보이는 연수.

“부처님의 앞에서 제 몸을 돌보느라 불경할 수는 없지요.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멀리서 왔으니, 제 마음이 닿는다면 부처님께서 굽어 살펴주실 겁니다.”

“아미타불.”

여인의 말이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크게 감명받아 염불을 외는 승려들이었다.

천불전으로 들어서자 법승의 설법이 시작되고 있었다.

법문을 외며 풀어 이야기해 주고 속세에서의 마음가짐과 상황을 소상히 응용하여 이야기해 주니 귀에 쏙쏙 들어왔다.

무엇보다 법문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살심이 옅어지는 것 같아 안정감이 느껴졌다.

설법이 끝나자 다시 절을 하기 시작하는 연수.

절을 하며 끊임없이 기감을 넓혀 매복하고 있는 고수들의 경지를 가늠하려 해 봤다.

천불전에 있으면 장경각으로 넘어가는 길목부터 그 근처까지 모든 고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 시진 가까이 절을 한 연수가 일어서며 휘청거리자 멀리서 지켜보던 법승이 단숨에 달려와 연수를 부축했다.

거리가 족히 삼 장은 넘었는데 두 걸음 만에 연수에게 도달하는 법승을 보며 연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소림이 괜히 소림이 아니구나. 법승이 이런 경공이라니.’

“시주 괜찮으시오? 자신을 해치는 불공은 부처님을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혜가께서는 팔을 잘라 불심을 증명하시고 달마 대사님의 제자가 되셨는데 겨우 절을 올리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혜가를 예로 들어 반박을 당하자 법승은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스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오늘은 이쯤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연수가 휘청이며 천불전을 걸어나가니 두 법승이 차마 몸에 손을 대어 부축하지 못하고 움찔하며 놀랐다.

그때 열두 명의 무승이 천불전 앞으로 목봉을 들고 뛰어왔다.

천불전 앞에 일렬로 서서는 형형한 눈빛을 내뿜는 것이 고수들이었다.

연수가 그들에게 묵례하고 지객당으로 내려가려는데 무승 하나가 연수의 앞으로 목봉을 뻗으며 길을 막았다.

놀란 법승이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인가?”

“집법당주님께서 천불전 안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셨다 하셨습니다. 천불전의 시주들을 조사해야 합니다.”

“감히! 부처님 앞에 불공을 드리는 분들을 조사한다니! 혜단이 미쳤단 말이냐!”

천불전주 혜연의 일갈에 올곧은 기세를 뿜어내던 고수들이 움츠러들었다.

“하, 하오나···.”

“이놈! 지금 이 시주만 해도 한 시진이 넘게 절을 하며 불공을 드리시고 겨우 몸을 가누시는 것이 보이질 않느냐? 아니면! 혜단은 내가 천불전에 불경한 이라도 들여놓고 있다 하는 것이냐!”

당황한 무승이 허리를 숙였다.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실 겁니다.”

“그렇다면 썩 돌아가거라!”

“예···.”

형형한 기세를 뿜어내던 고수들은 풀이 죽은 채로 돌아갔다.

놀란 기색으로 굳어있는 연수에게로 혜연이 합장을 했다.

“죄송합니다. 시주.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기는 했어도 저 역시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혀 이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느껴지는 기세가 거의 없고 겨우 한 시진 절을 하는 것으로 휘청거릴 정도의 여인이 무공을 익혀봐야 얼마나 익혔을까? 그러나 혜연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젊은 여인의 허세를 귀엽게 봐주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내일 또 뵙겠습니다.”

“예. 편히 쉬시지요.”

돌아서는 연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법당주였구나. 예민하기가 보통이 아니네. 내 기감이 감지되는 순간 내기를 흩어버렸는데, 그 짧은 순간에 천불전까지 추적하다니···. 과연 태산이라 이건가?’

지객당으로 돌아오니 자신의 방에서 공숙과 소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로 보아 기막을 쳐 놓은 듯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가라앉은 줄 알았던 심술이 다시 올라왔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연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에서 이러고 있다가 들키면 파문되는 거 아니냐?”

“왔어? 왜 또 심술이야. 앉아봐 재미있는 이야기 중이야.”

“재미있는 이야기?”

“응. 우리 구걸하며 살던 어린 시절 이야기 중이었어.”

공숙이 해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분, 되게 재밌어. 원래부터 거지였대.”

“예. 이놈이 저 또한 거지의 길로 끌어들였죠.”

천불전으로 가기 전만해도 반말을 하더니 분이란다.

피식 웃음이 나는 연수였다.

“들었어. 너 굶어 죽기 직전에 이 분한테 구원받았다며.”

짓궂게 놀리듯 이야기하는 공숙이었다.

자리에 앉으며 그 날을 떠올리자 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연수였다.

“그랬죠. 이 놈 아니었으면 십 중 십 굶어 죽었죠.”

말을 하며 소개의 눈을 바라보는 연수의 눈빛에 그 어느 때 보다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연수를 놀려주려던 공숙의 눈빛이 흔들리며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불편한···.”

당황한 소개가 벌떡 일어서며 눈물을 닦을 무언가를 찾다 보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여인의 눈물을 닦을 만큼 깨끗한 것이 없었다.

“아니야. 그냥 나도 조실부모하고 막막할 때 우리 사부님이 거둬주셨거든. 너희 보니까 사부님이 생각나서 그래.”

돌아가신 사부의 이야기가 나오니 절로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만약 자신의 사부가 죽었다면 이라고 생각해보자 연수와 소개는 절로 두 눈에 살심이 감돌았다.

“누이 항상 고마워요. 만약 제 사부님이 그날 돌아가셨다면 저는 복수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 때문에···.”

“아니야. 나는 군자는 아니지만, 복수는 길게 봐야지. 원수 갚다가 내가 단명하면 우리 사부님한테 혼날 거야. 이제 겨우 다섯 남았는데 뭘.”

소개로서는 사파의 여인이 정파의 무인을 죽인다는 것에 동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연정을 품은 남자의 마음은 무서웠다.

“소저의 원한이 하루빨리 정리되어 저승에 계신 사부님의 원한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사위를 짓누르자 연수가 농을 꺼냈다.

“근데 너 정파인이 그런 소리 해도 되냐?”

“정파인들도 다 은원의 고리 속에서 살잖아. 정사를 떠나 은원은 은원이지. 개인의 은원에 정사를 들먹인들 아무 의미 없는걸.”

연수와 소개는 분위기를 바꿔 어린시절의 추억과 농을 주고 받으며 한참을 이야기했다. 한참을 이야기에 빠져 있다 보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밖을 살피고는 벌떡 일어서는 연수.

공숙이 긴장의 눈빛으로 그런 연수를 바라봤다.

“가려고?”

“예!”

“내가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저를 한 수에 제압했던 거로 보아 저희가 상대할 수 있는 고수는 아닐 거에요.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해치려 했으면 그날 죽였겠죠.”

소개와 공숙의 걱정을 뒤로하고 야행복을 입고 복면을 하며 사라져 가는 연수.

암동을 펼쳐 지객당에서 곧바로 산길로 달려나가자 얼마 달리지 않아 저 멀리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초옥으로 가지 않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연수였다.

“후우.”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수는 결연한 눈을 빛내며 초옥으로 신형을 날렸다.

초옥의 앞에서며 복면을 턱밑으로 내리자 방문이 열리며 늙은 노승이 손짓했다.

“이놈아! 찬바람 들어온다. 어여 들어와.”

낮은 싸리 울타리를 훌쩍 넘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연수.

세차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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