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역시 소림은 만만치 않았다. 소림이 괜히 소림이겠는가?
하물며 장경각에는 수많은 불경과 서책이 보관되고 있고 그중에는 무서 또한 엄청난 양이 존재한다.
하니 몰래 침입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날 밤이 되자 지객당 근처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야행복을 입은 연수는 암동을 최대로 펼치며 산길로 빠져나가 소림 주위를 크게 돌았다. 천불전을 통하지 않고 장경각으로 가기 위한 주변 정찰이 목표였다.
한참을 주변에 매복해 있는 고수는 없나 기감을 넓혀 살피며 이동 중인데 저 멀리 작은 불빛이 연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가가 보니 작은 초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다.
‘이런 곳에 왜 이런 누추한 초옥이 있어?’
고개를 갸웃한 연수가 뒤로 돌아, 가던 길을 가려는데 한 줄기 바람이 연수의 주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식은땀 한 방울이 연수의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다.
“홀홀홀 이 밤중에 웬 객인가 했더니 특이한 객이로다.”
연수의 앞에서 다가오는 늙은 중을 보며 연수의 신형이 더욱 흐릿해졌다.
존재감이 사라지며 흔들리듯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팟!
주변의 어둠과 동화되며 빠르게 움직여 늙은 중을 따돌리던 연수가 늙은 중의 반응을 살피려 중이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리자 중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날 찾아온 게 아니누?”
“헛!”
너무 놀란 연수의 입 밖으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늙은 중이 기척도 없이 연수의 옆을 같이 달리고 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리되면.’
손목을 빙글 돌리며 멈춰 서자 연수의 두 손에 나타나는 두 자루의 단검.
“홀홀홀 괘씸한지고.”
‘죽일 수 있을까···.’
평소 같으면 분명 암수로 선수를 잡으려 들었을 자신이었다.
하지만 감히 저 늙은 중에게는 도무지 선수를 취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최대한 반격에 중점을 두고···.’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위기가 오면 악착같이 달려들고 암수와 암기를 퍼부어 상황을 반전시켜 왔었다. 안되면 무인으로서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어왔었다.
그런데 지금 두려움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가슴속에서 울컥 수치심과 분노가 올라왔다.
“한번 해 봅시다.”
복잡하던 눈빛이 가라앉으며 붉게 번쩍이자 연수의 주위로 진득한 살기가 풀려 나왔다.
“인제 보니 바로 찾아온 손님이 맞았구나. 갈!”
일갈과 함께 연수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흉흉한 살기가 한 번에 흩어졌다.
그와 함께 늙은 중의 손이 연수의 시야를 가득 채워왔다.
‘왜! 몸이 움직이질···.’
거기까지였다. 연수의 의식은.
눈을 뜸과 동시에 관절의 굽힘 없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주위를 경계하는 연수.
“무슨 강시도 아니고 자다 일어나는 놈이 왜 그 모양이누?”
잠시 몸을 살핀 연수는 큰 이상이 없자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복면까지 턱밑으로 내리는 연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예의는 아는 도둑놈이로다.”
“...”
어차피 도둑질하러 온 것이고 투행에 대하여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던 연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홀홀홀 재미있는 놈이구나. 그래 뭘 훔쳐먹을 게 있다고 이 절간을 찾았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심한 무공을 훔쳐가러 왔습니다.”
“클클 그래 역근경이라도 훔쳐보려고?”
“역근경은 필요 없습니다. 반야심공을 좀 훔칠 수 있을까 해서···.”
“풉! 하하하, 반야심공은 소림의 방장 외에는 방장의 허락을 구한 소수의 무승만 볼 수 있는 심공인데 그걸 훔쳐가겠다고? 이 소림에서?”
“예. 저도 사정이 사정인지라.”
늙은 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아하니 네놈 사정도 급해 보이기는 하는구나.”
노승의 말에 흠칫하는 연수.
“제 사정을 어찌 아십니까?”
“천살성을 타고났거늘 급하지 않으면 사람이겠느냐? 금수지.”
“...”
노승은 잠시 연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사정이 아무리 급하다고는 하나 반야심공은 조사님들의 피땀이 서린 비전. 내어줄 수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연수를 노려보는 노승.
“끝내 훔쳐가겠다?”
“...”
“클클클 그래, 넌 네 방식이 있겠지. 반야심공은 아니지만 정심한 법문이라면 몇 자 알려 주마. 도움이 될 것이니 헛짓하지 말고 내일부터 밤마다 이리로 오거라.”
대답 대신 노승의 의도를 읽으려는 듯 가만히 노승을 바라보는 연수.
“의심도 많은 놈이로다. 싫으면 말아라.”
“아닙니다. 내일부터 찾아오겠습니다.”
“그려. 들키지 말고.”
“예.”
꾸벅 인사를 한 연수의 신형이 흐려지며 사라지자 노승이 방 천장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쯔쯔쯔 어쩌자고 천살성을 내려보내신 건지. 무림이 그토록 어수선하다는 말이오? 살성으로 한바탕 쓸어야 할 만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노승.
방으로 돌아온 연수에게 공숙이 쉴 새 없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들키지는 않았고?”
“그게···.”
짧지 않은 설명을 모두 들은 공숙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대로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저를 붙잡을 마음이 있었다면 저는 진작 집법당으로 끌려갔을 거예요.”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승이 너한테 왜? 그뿐만 아니라 그 노승이 흉계라도 품고 있으면···.”
“일단 며칠 법문을 배워보고 이상하다 싶으면 그때 도망가면 돼요.”
“만약 그때는 늦었다면?”
결연한 눈빛으로 공숙을 바라보는 연수.
“누이 우리는 무인이잖아요. 그것도 사파인이잖아요.”
“그렇다고 죽을 자리 보러 다닐 필요는 없어.”
“그런 각오가 없었다면 지금 같은 고수가 될 수 없었을 거예요. 저도 누이도.”
저 눈빛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여차하면 죽음을 각오하는 저 눈빛.
지난번 곤륜파와 지영문의 무인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보았던 눈빛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엔 없었다.
“조심해.”
“걱정 마세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직은 어린 십 대 초반의 어린 지객당의 중들이 식사를 날라 왔다.
“앞으로는 직접 가서 먹겠습니다. 번거롭게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스님.”
깍듯한 연수의 말에 어린 중이 식당의 위치를 일러주고 나갔다.
“오늘도 천불전에 갈 거야?”
“예. 매일 갈 거예요.”
“천불전 근처의 탐색은 끝났잖아?”
“한동안 여기서 머물러야 할 텐데 가만히 놀고먹고 있으면 의심을 살 거예요.”
“힘들겠다.”
“불공을 드리는데 힘들 게 뭐 있나요? 설법을 듣다 보면 마음도 평안해지고 살심을 누르는 데 도움이 되는 기분이에요.”
“그럼 나는 뭘 하고 있을까?”
“발길이 허락되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살펴주세요.”
“응.”
식사를 끝내고 천불전을 찾아 불공을 드리기 시작하는 연수.
한 시진 가까이 절을 올리고 있는데 공숙의 전음이 들려왔다.
-나와봐!
불상을 향해 합장하여 허리를 숙여 마무리하고는 천불전 밖으로 나오자 공숙이 연수를 잡아끌었다.
-어딜 가는데요?
-가보면 알아. 좋아할 거야.
연수를 지객당으로 이끄는 공숙.
지객당의 앞에서 진원이 연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뛰어나왔다.
-저놈을 보라고 불렀어요?
-그럴 리가.
“아침 일찍 불공을 드리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오전 불공을 드리고 잠시 쉬려고요.”
무언가 연수를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 진원이었다.
하지만 분명 혹사하듯 불공을 드리고 돌아온 연수를 오래 잡아두기가 미안했다.
“그럼 들어가서 쉬시지요.”
“예. 그럼 있다 뵙겠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자 연수의 눈이 커졌다.
기막을 침과 함께 면사를 풀고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와락 끌어안는 연수.
“야, 야. 아무래도 기분이 묘해지니까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하자.”
자신을 밀어내며 농을 던지는 사내를 보니 크게 상한 곳은 없어 보였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래. 그런데 그 꼴은···. 보고도 적응이 안 된다.”
“어머! 그런 말은 실례입니다.”
마치 요염한 여인네처럼 몸을 비틀며 이야기하는 연수를 보고 소개가 고개를 흔들었다.
“변장술 하나는 대단 하구나.”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절강에 있어야 할 네가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거야?”
“여러 사정이 있어. 그러는 너야말로 어찌 된 거야? 곤륜의 장로들을 암살했다며?”
“암살은! 격살했으면 했지 암살 따위 했을까 봐?”
발끈하는 연수를 진정시키는 소개.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건데? 참전하기로 마음을 돌린 거야?”
“하아, 그러니까···.”
길고 긴 이야기를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연수.
모든 설명을 듣고 나니 소개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랬구나. 그래서 전극공합은 사황성으로 넘어갔고?”
“그래. 그리고···. 이건 비밀이다. 위로 보고하지도 알은체도 해선 안 되는데···.”
“그런 정보면 알려주지 마라.”
잠시 소개를 바라본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만 말해둘게. 섬서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가지 마라.”
소개의 눈썹이 꿈틀댔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알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위로 보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에.
“알았다.”
“이제 네 이야기 좀 해봐. 왜 네가 소림에 있는 거야?”
“나는 좀 복잡해. 사실 소림에 절강으로의 파병을 요청하러 왔는데···.”
“파병?”
“응. 무림맹이 전선을 구축하는 곳 중 가장 불안한 것이 절강이야. 원래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들어와야 했는데 누구 덕분에 남궁세가는 무력대를 분산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더라고.”
“아, 그러냐? 쩝.”
할 말이 딱히 없던 연수는 딴청을 피웠다.
“그렇다고 한참 혈투를 벌이고 있는 다른 문파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쉽지가 않아서. 그나마 정사 대전에서 아직 제대로 무인을 파견하지 않은 소림으로 찾아온 건데···.”
“어째 소림은 딱히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던데.”
“어찌 알았어?”
“전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사실 정파 중에 유일하게 이번 정사 대전을 반대한 것이 소림이라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불가에서 막대한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전쟁을 하자고 나설 리는 없지.”
“무당파 출신인 무림맹주와 맹내의 알력다툼도 적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그런 사정이 있다 보니 맹에서는 소림에 손을 빌리는 것을 꺼리고 있어. 소림이 나서지 않아도 이번 전쟁을 승리할 거라는 계산이겠지. 그렇게 되면···.”
“맹 내에 소림의 입지는 좁아진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개.
“응. 그런데 실상 상황이 그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야. 소림이 나서지 않으니 중소문파들이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주지 않고 있어. 대부분의 구 파와 오대 세가 또한 본진을 비우지 않고 있는데 그들을 독려하여 멀리 파병을 재촉하는 것도 꼴이 우습고.”
“그렇겠지. 피를 흘려달라고 하려면 자신들부터 피투성이가 되어야 하는데 지들은 안방에 누워서 배나 두드리면서 중소문파에게 피를 흘리라고 강요하면 누가 나서겠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머리를 박박 긁는 소개였다.
“안 그래도 아리니까 그리 쿡쿡 찌르지 마라.”
“어쨌든 그래서 무림맹을 대신해서 소림에 고개를 숙이러 왔다?”
“응.”
“그런 것 치고는 겨우 사 결제자가 달랑 와서는···.”
“하아, 나도 미치겠다. 절강의 상황이 불안하니 스승님을 비롯해 누구 하나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고, 본타는 본타대로 바쁘고···.”
“그래도 이정도 사안이면 방주 내지는 그에 준하는 양반이 와야지. 그래서야 소림사의 방주가 만나 주기나 하겠냐?”
“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매달려 봐야지.”
소개를 빤히 쳐다보던 연수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이리 무사한 걸 보니 또 좋네.”
“그래. 나도 멀쩡한 네놈 보니까 좋다.”
“딱히 멀쩡하다고는···.”
“아, 그랬지. 그런데 좋아해야 하냐? 슬퍼해야 하냐?”
“뭐가?”
“친구 놈이 대단한 무재를 타고났으니 좋은 것도 같고, 천살성을 타고 났다니 슬퍼해야 할 것도 같고.”
소개의 농담을 들으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기는 그때부터 이상하기는 했지. 나보다 몇 년이나 늦게 입문해서 제대로 된 상승무공 하나 못 배운 놈이 개방의 일류고수를 두들겨 팰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난감한 일을 들추자 괜히 미안해진 연수는 차를 벌컥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