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92화 (92/202)

# 92화

섬서에 도착하기 하루도 채 남지 않은 저녁 시간.

벽곡단으로 가볍게 끼니를 때우고는 나름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연수와 공숙의 표정에 순간 긴장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원은 신이나 떠드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연수와 공숙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원이 의아한 눈으로 그런 연화를 바라봤다.

“매일 안에만 있었더니 조금 답답하여···.”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쌔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갑판으로 나오자 확실히 느껴지는 기운들.

진원 역시 무언가 느꼈는지 표정이 심각해져서는 주변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합니다. 소저 다시 안으로···.”

-첨펑! 첨펑! 첨펑!

물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솟구치며 야행복을 입은 인영들이 갑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연수와 공숙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야행복을 입은 무리 속에서 믿을 수 없는 기운을 내 뿜는 인영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정파의 무인들이 있다면 지금 나서라. 아니면 이 배 위에 모든 사람은 죽는다.”

겁도 없이 나서는 진원.

“이놈들! 어디 수적 놈들이···.”

숨통을 죄는 듯한 살기에 말문이 막힌 진원.

“또 없나?”

갑판에서의 소란에 많은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상황을 읽은 수십 명의 정파 무인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상대는 겨우 열둘. 해볼 만하다 느꼈는지 눈을 빛내는 무인들.

하나 연수가 보기에는 개구리와 파리의 대결이었다. 파리가 아무리 많은 들 개구리 앞에서는 먹이밖엔 되질 않는다.

그때 검을 뽑아 들었던 한 무인이 외쳤다.

“나는 현검문에 두 모원이다. 웬 놈들이냐!”

“정리해.”

야행복을 입은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장의 명이 떨어지자 정파의 무인들 속으로 뛰어드는 열한 명의 고수들.

-꺄아아!

마치 양무리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정파의 무인들을 몰아치며 학살하는 고수들의 무위에 연수는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며 살기를 뿜어 진원을 질식시켜 가는 대장을 바라봤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진원의 입으로 하얀 거품이 흘러나오며 눈이 뒤집혔다.

그와 동시에 대장의 뒤로 떨어져 내리는 열한 명의 고수들.

시선을 돌려보니 수십 명의 무인이 모두 숨이 끊어져 있었다.

-어떻게 할까? 우리 둘로는 무리야.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진원을 바라보는 연수.

아직은 저놈이 필요했다.

하남에 들어가 숭산을 오르려면 당가의 막내아들이라는 신분이 있어야 했다. 관도마다 정파의 무인들이 철저히 경계하는데 자칫 문제가 일어나면 온 사방에 정파인들이 널린 그곳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쳇 빌어먹을.’

순간 연수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진원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손을 뻗자 진원을 향해 무겁게 쏟아지던 살기가 뒤틀리며 갈라졌다.

대장의 눈썹이 꿈틀대며 연수를 바라봤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고수들이 움직이려는 듯 기세가 일렁이는 순간 대장의 손이 들렸다.

출수하지 못하고 무서운 눈으로 연수를 바라보는 열한 명의 고수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는 연수.

저 고수들 하나하나가 자신보다 하수라고 장담을 하기가 힘들었다.

얼추 곤륜의 장로들과 비슷한 기운들을 내뿜고 있었다.

당시에는 중독시키고 손가락까지 끊어져 쉽사리 죽였지만, 지금은 암수검과 살심을 억누르는 처지이다.

공숙이 옆으로 와서 서자 그 뒤로 거대한 기막이 둘리며 소리가 차단되었다.

“정말이지 어디서 뭘 하시느라 사천을 그대로 뺏기나 하셨더니 여기서 이러고 계셨습니다.”

“흥!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사파를 외면하고 뭐 하고 다니나 했더니 그 꼴이 뭐냐? 새로운 정체성이라도 찾은 거야?”

“사정이 길어요. 그리고 이놈 당가의 셋째입니다.”

야행복을 입은 자들의 살기가 진해졌다.

“그 살기 좀 거둡시다. 내가 요즘 예민해서.”

대장이 뒤를 돌아 고수무리에게 눈짓을 주자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직계냐?”

“예. 당가 가주 셋째 놈 맞아요.”

“그놈들 때문에 피해가 크다.”

“알아요.”

“그럼 그놈을 데려가야 한다는 것도 잘 알겠네?”

“그건 곤란해요,”

“무엇이?”

“아직 필요합니다. 소림까지 이놈이 있어야 갈 수 있어요. 보시다시피 시기가 시기인지라.”

“이런 정세가 된 것에 네놈이 한몫했다고 알고 있는데.”

“뭐 그런 일도 있었죠. 그래도 저 아니었으면 곤란하셨을걸요?”

“쳇!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그러는 성주님이야말로 무슨 꿍꿍입니까? 지켜야 할 사천은 나 몰라라 내버려 두시고 갑자기 섬서라니요!”

“화산을 지우러 왔다. 왜?”

“화, 화산을요?”

“그래. 화산의 전력이 제법 많이 빠져나갔어. 지금이면 지울 수 있을 것이야. 그리고···.”

“중원을 누비며 빈집을 터시려고요?”

“큼큼! 그만큼 상황이 안 좋아.”

“확실히 그렇게 되면 무림맹의 전선구축이 흔들리겠죠. 그런데 그러다 잘못되면···. 사황성은 끝납니다. 도대체가 체통도 없이 성주님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맹주를 봐요. 무림맹에 무거운 엉덩이 딱 붙이고 일사불란하게 정파를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상황이 안 좋다잖아! 누군들 이러고 싶은 줄 알아?”

“그건 됐고, 이 배에는 왜 올라타신 거예요?”

“그럼 헤엄쳐서 갈까?”

“여기까지는 어찌 오셨는데요?”

“...”

“겨우 하루 거리 더 헤엄친다고 안 죽어요.”

“애들이 많이 지쳤어. 화산까지 기운을 좀 채워놔야지.”

“후우. 내려주세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이놈 제게 꼭 필요합니다.”

사황성주 패천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언제부터 네 명을 따랐지?”

“살기 좀 거두세요. 예민하다니까요!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제게 빚이 있으실건데요.”

“애초에 네가!”

“전들 좋은 줄 아세요? 그날 저희 사부가 어떤 꼴을 당했는데요! 저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마실 다니실 여력도 없었을걸요.”

“쳇! 빌어쳐먹을 놈. 대체 소림에는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뒷말을 흐리는 성주를 보며 연수가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뭘!”

“제가 천살성을 타고난 천살지체라는거요.”

“그야 뭐···.”

“한마디 경고라도 좀 해줬으면 좋았잖아요.”

“그런들 팔자가 변하냐? 그러니까 내 밑으로 들어왔으면 천하에···.”

“대살성이 되었을 거라고요?”

“그럼! 그랬으면 십 년 안에 이 자리는 네 것이 되었을 거야. 지금이라도···.”

“됐습니다.”

“아휴, 이놈의 사파 새끼들은 도무지 말을 안쳐 들으니.”

“어쨌든 이놈 목숨과 이 배 건드시면 곤란해요.”

“이걸로 네놈에게 빚은 없는 거야.”

“예.”

“빌어먹을 놈. 하필···. 에잇. 다들 내려.”

그 말과 함께 기막이 거둬 지면서 잔상과 함께 사라지는 무리.

공숙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물었다.

“바, 방금 그분이 서, 성···.”

-성주 맞으니까 쉿.

“그나저나 이놈에게는 뭐라고 둘러대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대자로 뻗어 하얀 거품을 물고 있는 진원이 있었다.

침상으로 옮겨놓은 진원이 벌떡 일어나며 헛소리를 내뱉었다.

“헛! 수적나리!”

잠시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파악하는 듯하더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연화와 공숙의 존재를 눈치챈 진원의 얼굴이 벌게졌다.

“정신이 드셨군요. 다행입니다.”

“어, 어찌 된 일인지···.”

“배에 타고 있던 정파의 무인들을 모두 죽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들이 소협을 해치려 했지만 제가 가문의 이름을 팔아 물릴 수 있었습니다.”

진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보통의 고수들이 아닌 거로 보아 사황성의 주요 인물들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고수들이 감히 서하공의 양녀를 해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형세에 자칫 황군이 개입하면 씨 몰살을 당하고 말 테니.

“천만다행이군요.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살펴본 진원은 큰 이상이 없자 한숨을 푹 쉬었다.

“섬서를 코앞에 두고 저런 사파의 고수들이 나타나는 것이 심상치 않군요. 어쨌든 섬서에 도착하면 하남을 향해 서둘러야겠습니다.”

“예.”

배는 머지않아 섬서에 닿았고, 일행은 곧바로 말을 구해 하남을 향해 달렸다.

한 달 가까이 말을 달리며 이동하는 동안 연수는 금룡수를 모두 배웠고, 황연만사편의 초식 또한 대부분 견식할 수 있었다.

숭산을 눈앞에 둔 연수와 공숙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중원의 무림의 태산이라는 소림.

그곳에 무공을 훔쳐보겠다고 이리 들렀으니 어찌 긴장되지 않을 수 있을까.

숭산의 중턱까지 쉼없이 올라서자 산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림이구나.’

마음을 다잡으며 산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데 무승 둘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무승 하나가 반장을 하며 다가왔다.

“어찌 오셨습니까?”

“불공을 드리기 위해 멀리서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연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무승의 눈에 검을 찬 공숙과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운 진원이 들어왔다.

“이 분은 저희를 이곳까지 안전히 올 수 있도록 도움 주신 분이시고 여기는 제 호위무사입니다.”

무승의 시선이 진원에게 머물자 포권을 하며 앞으로 나서는 진원이었다.

“저는 당 진원이라 합니다.”

“혹시 당가의 삼 공자가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러셨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객방을 따로 내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승의 안내를 받아 지객당으로 들어서자 연수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객당의 뒤편으로 천불전이 있고 그곳을 넘어가면 경계가 삼엄한 장경각이 나온다. 그 장격각을 털어야 하는 연수로서는 절로 긴장이 되며 가슴이 뛰어왔다.

지객당에서 방을 배정받아 짐을 풀고 천불전으로 향하려는데 지객당주가 나와 진원을 찾았다.

“당 소협이 숭산을 찾았다길래 나와 보았소.”

“당 진원이라 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이쪽 시주분들은?”

“저는 소 연화라 하고 이쪽은 제 호위입니다. 불공을 드리기 위해 멀리서 왔습니다.”

무공을 배운 티가 나지 않고 행색을 보아하니 지체 높은 가문에 딸이 분명했다.

“그러셨군요. 그럼 지금 천불전으로 가는 길입니까?”

“예.”

“도착하자마자 피곤하실 텐데···.”

“부처님을 만나 뵙는데 제 사정이 앞설 수는 없는 법이지요.”

연화의 딱 부러지는 대답에 지객당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면 다녀오시지요.”

“예. 스님.”

합장하며 허리를 숙이자 옆에 있던 진원과 공숙이 어색하게 연수를 따라 했다.

지객당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주 합장을 하고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천불전에는 불공을 드리는 백성들이 꽉 차 있었다.

행색도 일반 백성들부터 지체가 높아 보이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구석에 겨우 앉을 자리를 잡은 세 사람.

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기 시작했다.

연수가 절을 하기 시작하니 공숙은 자리를 피해 천불전 밖으로 나갔다.

공숙이 나가자 천불전에는 와본 적도 없는 진원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뻘쭘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기도 뭐했는지 연수를 따라 절을 시작하는 진원.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자 답답해지기 시작하는 진원이었다.

고수인 자신조차 저리 반 시진 가까이 절을 하니 허리와 다리가 뻣뻣해져 오는데 자신보다 한참 여린 저 아가씨가 흔들림 없이 계속 절을 올리고 있으니 처음에는 대단한 불심이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시진을 지나고 보니 이건 단순히 불심이라 치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절을 하며 연화의 자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인제 보니 연화뿐 아니라 절을 하는 많은 불자의 자세가 모두 비슷했다. 그저 자신이 어설피 큰 동작으로 절을 올리느라 더 힘이 들었다는 것을 알아챈 진원은 조금씩 그들의 자세를 따라 하며 절을 올렸다.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자 연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절을 멈추고 두 눈을 감고 오체투지를 했다.

역시 따라 하는 처지에서는 도무지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힘이 들 뿐이었다.

절을 하는 것이 육체적인 고통이었다면 오체투지를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렇게 또 한 시진이 지나가자 겨우 고개를 드는 연화.

자리에서 일어선 연화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는 불전을 나서며 불전을 지키던 스님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그리고는 합장을 하며 불전을 나서는 연화.

‘정말 불심이 대단한 여인이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진원이 연화의 뒤를 바짝 쫓았다.

“소저의 불심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불심이 깊고 얕은 것은 대단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개인의 차이일 뿐입니다.”

진원은 연화의 대답에 애먼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어했다.

지객당으로 돌아온 연수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협 그러면 먼저 쉬겠습니다.”

“예, 소저 편히 쉬십시오.”

방으로 들어서며 기막을 치자 공숙이 입을 열었다.

“만만치 않겠어.”

“장경각으로 가는 길에 경계가 심한가요?”

“응. 그뿐만 아니라 장경각 근처로도 심상치 않은 기세가 여럿 있었어.”

“흠···. 천불전을 통하여 장경각으로 침투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어요. 천불전 주위로 고수의 기세가 여럿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매복시켜 놓은 고수들이 많은 것 같아요.”

“어쩌지?”

“이렇게 되면 천상 소림을 벗어나 바깥쪽으로 돌아서 장경각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지객당에서 천불전으로 스물여섯 천불전에서 장경각까지 서른여섯의 고수가 있으니.”

“장격각에 닿는다 해도 그곳을 지키는 고수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겠어?”

“해봐야 알 것 같아요.”

“무리일 것 같은데···.”

“쉽지는 않겠죠.”

말을 마친 연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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