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감락현에서 가장 큰 객잔으로 들른 일행은 거하게 식사를 마치고는 일찍 방으로 들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막을 치는 연수.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요.”
“왜?”
별생각 없어 보이는 공숙에게 연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정사 대전이 일어나면 국지전의 양상이 꽤 오래도록 이어질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파쪽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라요. 설마하니 벌써 전선을 꾸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게 뭐?”
“이리되면 생각보다 빠르게 사파가 밀릴 겁니다. 사천을 빼앗긴 이상 귀주를 중심으로 광서 호남 강서 북건을 지키는 수밖에는 없어요. 이 넓은 중원에서 겨우 한 귀퉁이에 몰리는 꼴입니다. 게다가 다른 성에 있는 사파들은 귀주로 힘을 모을 수 없게 될 테니···. 몰살당할 가능성이 커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천을 이리 내버려 두는 건지.”
“지난번에 사파에서 사천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잖아? 당가 놈을 만난 날.”
“겨우 삼십의 무인으로 뭘 한다고요. 그 실력으로 뭐 제대로 일을 도모할 수나 있겠어요?”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야?”
한숨을 푹 쉰 연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림맹은 이제 모든 힘을 결집하여 운남 사천 섬서 호북 안휘 절강으로 전선을 펴고 사황성을 몰아넣어 압박할 거에요. 그렇게 되면 사황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음···.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대로 일방적으로 패배하면 앞으로 몇십 년 동안 사파인은 암흑기를 보내야 할 겁니다.”
“우리도?”
“우리는 사파인 아닌가요? 무림맹의 일방적 승리로 전쟁이 끝나면 분명 정사지간에 있는 문파들로 화살이 돌아갈 겁니다. 그렇다고 정파인 행세를 하고 살기도 힘들 걸요? 특히 누이와 저는.”
“그럼 어떻게 해? 이제라도 정사 대전에 참전하려고?”
“아니요. 그러다 진짜 미쳐서 대살성으로 악명을 떨치게 될 거에요. 일단은 소림에서 답을 찾아야 해요. 어떻게 해서든.”
“만약 소림에서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때는 도가의 문파들을 물색해야겠죠. 무당이나 화산을.”
“근데 네 친구는 괜찮을까?”
소개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두운 연수의 표정이 더 시커멓게 변했다.
“절강은 최전선이 될 텐데 걱정이네요. 부디 화가 비껴가길 바라는 수밖엔 없죠.”
“그러게.”
다음날이 되자 진원이 새로운 길을 권했다.
“물길로 가자고요?”
“예. 들어보니 사천 대부분의 관도는 정파 인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본가가 있는 성도 쪽은 피해야 하고 또 번거롭기도 할 것 같아 악산에서 간양까지 배를 타고 이동한 후에 수녕에서 다시 한번 배를 타고 섬서로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연수 역시 정파 인들과 마주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았다.
“소협께서 가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감락에서 악산까지 배를 타기 관도를 따라 이동하는 열흘 동안 금룡수의 초식을 열 초식 더 배울 수 있었던 연수였다.
진원은 점점 형과 식만 대충 배우는 연화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무공을 배울 제목은 못 되는구나.’
그렇게 악산에서 말을 처분한 세 사람은 배에 올라탔다. 제법 커다란 배에는 꽤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무림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검을 찬 무림인들이 보이자 배에 탄 사람들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데 배를 타고 물길로 간양 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보통 빠르면 팔 일, 느리면 열흘이 걸립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수녕에서 섬서까지는 또 얼마나 걸리나요?“
“이십 일 이상 걸릴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나마 배가 참 커서 다행이네요.”
“침실도 모두 갖춰져 있으니 지내시는 데 큰 불편은 없으실 겁니다.”
“소협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진원은 침상이 딸린 조그마한 방으로 두 여인을 안내했다.
침상 두 개와 작은 탁자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작은 방이었지만 노숙을 하거나 침상도 없이 여러 사람이 같이 써야 하는 일반실에 비하면 꽤 신경을 써놓은 티가 났다.
“소저들은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저는 바로 뒤의 방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소협, 배를 타고 가는 동안은 금룡수를 배우기 힘들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원.
“예. 보는 눈이 많아 함부로 수련하거나 가르치기 힘들 듯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뱃길로 가는 동안 하독술을 배우면 어떨까요?”
“아, 그러면 되겠군요. 어차피 말로 충분히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하독술을 배우려면 직접 독을 다뤄 보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시연을 해 보이며 제대로 가르침을 받아야 했지만, 진원은 애초에 그렇게까지 가르칠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연화의 현재 성향을 보아하니 말로 대충 때워도 충분할 것 같았다.
탁자의 의자에 슬쩍 앉으며 연화를 바라보는 진원이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시작할까요?”
툭하면 명가의 도리이니 군자의 도리니 하는 연화이다. 이런 명분이 없다면 바로 옆에 침상이 있는 방에서 남자와 동석하길 꺼릴 것이 분명했다.
‘속 보이는 놈.’
속마음과는 다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는 연수. 그런 옆으로 공숙도 슬그머니 앉았다.
“일단 기초 하독술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하독술은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독을 정확히 목표에 닿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하독 중 본인과 제삼자가 다치지 않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죠.”
“예.”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는 연화를 보며 기분이 좋아지는 진원이었다.
“하독술에 종류는 음독을 노리고 하독하는 제독, 호흡을 통하여 중독시키는 연독, 피부를 통해 중독시키는 부독. 이렇게 크게 세 가지가 존재합니다. 먼저 제독술은···.”
공숙은 별 관심 없는 척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연수는 전문적인 하독술의 종류와 방법에 대해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었다.
물론 연수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진원이 가르쳐 주고 있는 하독술은 반쪽짜리였다. 독의 종류와 다루는 법을 전혀 알지 못 한 체 하독술의 방법만 알아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연수에게는 구사천독전이 있었다.
‘음, 이 방법은 추혼독과 잘 맞겠어.’
속삭이듯 조용히 이야기하는 진원의 이야기를 착실히 들으며 머리 한쪽으로는 그와 맞는 독을 떠올려 보는 연수였다.
배가 섬서에 도착하는 열흘 동안 대부분의 하독술을 들은 연수였다.
진원으로서는 한 번의 시연도 없이 이야기만 해주어 별 쓸모 없을 거라 여겼지만 연수와 공숙은 매일 밤 진원에게 들은 하독술의 방법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궁리하며 그에 맞는 독을 찾았다.
배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진원과 두 여인이 내리는데 저 앞에서 날카로운 눈을 빛내는 몇몇 무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공을 배운 흔적이나 무기를 가진 자들을 철저히 골라내며 검문하는 무인들.
‘화산파?’
그 무인 중 두 명의 도사가 눈에 띄었는데 기세가 날카롭고 잘 뻗어 나오는 것이 명문의 제자들이 틀림없어 보였다.
무인들의 시야에 검을 찬 공숙과 발걸음이 가벼운 진원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곧장 다가온 백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
“어디서 오시는 길···.”
“비켜.”
진원이 대뜸 반말을 해대자 무인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사를 향해 손을 흔드는 진원.
“동수야!”
진원의 외침에 시선을 돌린 무서운 표정의 도사의 얼굴이 밝아지며 단숨에 인파들을 훌쩍 뛰어 넘어와 진원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진원! 이 친구야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그런데 화산에 잘 나가는 일대 제자분이 왜 이런 곳에서 검문이나 하고 있는 거야?”
“혹여 물길로 사특한 놈들이 침입하면 안 되니 그런 게 아니겠나? 사천은 이미 모든 사파 놈들을 쫓아내 정기를 바로 세웠다고 들었어. 너희 가문이 주축으로 큰일을 해냈다던데?”
“큰일은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
두 사람이 반갑게 맞으며 이야기를 이어가자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백색 무복을 입은 무인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갔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던 둘. 그런 도사의 시야에 진원의 옆으로 서 있는 두 여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분들은?”
“아! 내 정신 좀 보게. 죄송합니다. 소저, 반가운 친우를 만나 제가 그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아요. 보기 좋았습니다.”
“여기 이 친구는 화산파의 일대 제자로 도명은 진영인 이라고 합니다. 섬서의 동도들은 군자무문이라고 부르지요.”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소 연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분은 연화 소저의 호위무사일세.”
“아 그렇군. 다들 반갑습니다. 진영인 이라 합니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마주 숙이는 연수.
“과연 화산이 도가의 성지중 하나라더니 청수하고 도도한 기상이 느껴지는군요. 군자무문이라 불리신다니 보지 않아도 성품이 눈에 그려집니다.”
“하하, 이런 과찬을. 그저 과분한 허명입니다.”
서로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영인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럴 때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야?”
“사정이 있네. 자세한 이야기는 내 다음번에 해 줄 테니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세. 나도 갈 길이 멀고, 보아하니 자네도 할 일이 바빠 보이는데.”
“아휴, 이 매정한 친구 같으니. 다음에 꼭 소상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하네.”
“알았어. 술까지 대접하며 이야기해 주겠네.”
그렇게 화산파의 제자와 짧게 이별한 일행은 간양현에서 말을 구해 수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천의 외곽에 화산파의 도사들이 들어와 있다라···.’
말을 달리는 연수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무림맹은 사천을 절대 내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모든 것이 연수의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리 맥없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성주’
한숨을 내쉰 연수는 생각을 지우며 자신의 사정만 생각하기로 했다.
자칫 잘못하면 정신병자 살인마가 되게 생겼는데 남의 사정을 고민해 줄 처지는 아니었다.
수녕현에 도착하는 사 일의 시간 동안 연수는 금룡수의 다섯 초식을 더 배울 수 있었다.
수녕에서 말을 팔고 배에 오른 지 열흘이 지났다.
그 열흘 동안 거의 모든 하독술에 대한 이야기가 떨어진 진원은 슬슬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니 하독술을 막는 법에 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고, 그마저 금세 떨어져 버리니 또 무언가 이야기할 거리가 없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 진원의 기색을 연수가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소협. 지난번에 그 금수들의 무리를 중독시킨 것은 어찌하신 겁니까?”
마침 무슨 이야기를 해서 연화의 관심을 끌어야 할까 고민하던 진원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어렸다.
“아 그것은 독진을 이용한 하독이죠.”
“독진이요?”
해맑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는 연화.
막 대답하려던 진원이 멈칫했다. 잠시 독진에 관해 함부로 말해도 될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나 곧 그의 입은 열리고 말았다.
‘무림인도 아닌 이 아가씨가 안다고 큰일이야 나려고···.’
“그 독진은 저희 가문의 독 진중 인암밀독진입니다. 독 기운을 서로 주고받으며 회전시켜 진의 바깥쪽으로 은근히 독 기운을 퍼트리는 진으로 은밀히 적을 중독시키고 안을 지키는 독진이죠.”
“아! 그렇군요. 과연 당시에 그들이 갑자기 중독되어 언제 어떻게 중독된 것인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습니다.”
“예. 그것이 저희 당문의 방식···. 이라기보다 워낙에 상황이 급박하여 그리 했었죠.”
“그렇군요.”
이후로는 연수가 딱히 묻지 않아도 존재하는 독진에 대해 자랑을 하는 진원이었다. 연수는 그저 반짝이는 눈으로 감탄하며 맞장구만 쳐 주면 알아서 떠드니 일사천리였다.
독진에 대한 이야기가 떨어지니 이번엔 암기술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고, 섬서에 도착할 때쯤에는 당문의 비전 암기술에 대해 대부분 알 수 있게 된 연수였다. 물론 직접 배운 것은 아니지만 딱 보기만 해도 어떤 암기술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물론 밤마다 공숙과 파해법을 연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