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진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막간을 이용하여 시범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우러러보는 듯한 두 여인 앞에 서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금룡수의 기수식부터 시작하여 스물 아홉 초식의 금룡수를 쭉 풀어 놓는 진원.
“지룡승천!”
마지막 초식이 끝이 나자 연수의 눈이 반짝였다.
-짝짝짝짝짝!
두 여인이 벌떡 일어나며 박수 세례를 보내자 진원의 턱 끝이 살짝 올라갔다.
“이것이 금룡수입니다.”
확실히 쓸만한 금나수였다. 강호에 일절로 인정받았다는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
소림의 용조수가 맨손으로 돌도 깨부수는 강세의 금나수라면 금룡수는 복잡한 변초를 이용하여 상대를 현혹하고 상대의 요혈을 물고 늘어지는 환세의 금나수였다.
“대단해요! 어찌 그리 변화무쌍한지 보고도 어찌 움직이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손가락과 손목의 변화가 너무도 빨라서 마치 악사의 손짓을 보는 것 같았어요.”
“하하 저희 당가는 암기술이 기본이 되다 보니 유연하고 정확한 손짓이 기본입니다. 하여 이런 훈련을 하기도 하죠.”
품에서 조그마한 철 구슬을 꺼낸 진원이 손가락 사이에 철 구슬을 끼고는 돌렸다. 철 구슬이 부드럽게 진원의 손가락 사이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와! 엄청나네요!”
두 여인이 칭찬하며 특히 연화가 기뻐하는 듯 보이자 진원의 손가락에 철 구슬 하나가 더 나타났다. 마치 분신술처럼 하나의 철 구슬이 두 개로 늘어나는 듯 보이자 두 여인의 눈이 더욱 커졌다.
어렸을 때 둘째 형님이 여인들에게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며 가르쳐준 별거 아닌 이 장난이 진짜로 먹혀들지 몰랐던 진원은 신이 났다.
‘형님! 고맙습니다!’
신이 난 척하던 연수는 진원의 손놀림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역시 당가는 당가네. 기본은 확실해.’
암수검을 익히며 질리도록 했었던 수련과 비슷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금룡수와 손재주 자랑을 마친 진원은 후련한 기분으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금룡수를 가르쳐 주기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시원한 바람을 맞아 말을 달리니 어제의 답답함과 불편한 감정이 씻겨가듯 날아갔다.
그날 저녁부터 금룡수를 가르치기 시작한 진원.
“첫 초식인 출룡정아는 손가락이 벌어지듯 뻗어가며 손목을 비틀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요체입니다. 상대의 방어에 곧바로 대응하여 상대의 요혈을 노리기 위함입니다.”
눈을 빛내며 출룡정아를 펼치는 연수.
나름 어설픈 흉내를 낸다고 내 보았는데 연수의 초식을 본 진원의 눈이 부릅떠졌다.
“여, 연화 소저. 혹여 다른 금나수를 배운 적이 있습니까?”
“아뇨. 금나수는 배워본 적이 없어요. 권법과 각법을 위주로 배웠습니다.”
“그렇군요. 제 생각보다 연화 소저의 자질이 뛰어난 것 같아 놀랐습니다.”
“그래요? 어려서부터 많은 강호고수분이 제 자질이 뛰어나다고 하셨어요.”
뿌듯하게 말하는 연화를 보며 진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강호에 변변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하수들의 평가 따위 그저 비위나 맞추려는 아부에 불과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평가는 그런 아부 따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분명 어설픈 그 육합권을 보며 자질이 심하게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무제가 뛰어나니 문득 걱정이 들었다.
‘괜찮을까?’
그런 진원의 생각을 읽은 연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이 출룡정아는 제가 익힌 권법의 초식과 매우 비슷하네요.”
“예? 어떤 초식인지 볼 수 있을까요?”
대충 출룡정아와 비슷하게 권로를 펼치며 지동권의 묘리를 살짝 담았다.
변의 묘리가 느껴지는 일 권을 보고 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슷한 점이 있군요. 다행입니다. 첫 초식을 생각보다 빠르게 익힐 수 있겠습니다.”
“네.”
진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연수는 진원이 보는 앞에서 어설프게 출룡정아를 연습했다.
감락현까지 이동하는 닷새 동안 어설프게나마 초식을 배워 나가는 연수였다.
한 초식을 오래오래 가르치고 싶었던 진원의 마음과는 다르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한 초식 한 초식 대충대충 흉내만 내면 다음 초식을 가르쳐 달라는 연수로 인해 닷새 만에 진원은 금룡수의 네 초식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
‘이래서는 어떤 초식 하나 제대로 쓸 수 없을 텐데···. 차라리 이편이 더 나을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연수를 바라보고 웃는 진원.
‘무슨 생각 하는지 빤히 보인다. 이 애송이 놈아. 쭉쭉 빨아 먹어주마.’
라는 생각을 하며 마주 웃어주는 연수였다.
감락현으로 이어지는 관도를 지날 때쯤 저 멀리 관도를 막아선 일단의 무리가 세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천천히 달리는 속도를 줄여 말을 세운 세 사람.
-푸르륵! 푸륵!
지난 닷새 동안 달려와 제법 지친 말들이 투레질함과 동시에 말에서 뛰어 내린 진원이 관도를 막아선 일단의 무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나온 분들이기에 관도를 막고 계십니까?”
열댓 명의 무리는 등 뒤로 검을 매고 있었는데 개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 전에 신원을 밝히시오.”
진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기는 사천이다.
맹세코 사천에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신원을 밝히라는 소리 따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런 소리를 듣고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 보니 평범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피식 웃은 진원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당 진원이라는 사람이오.”
진원이라는 이름은 무인들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당씨 성.
사천에서 저리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자 중 당 씨 성을 쓰는 사람이라면 십 중 십 당가의 무인이 분명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저희는 청성의 속가 제검문의 제자들입니다. 청성의 명으로 혹시 모를 사파 놈들의 침입을 막고자 관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문파보다 청성의 이름을 먼저 내뱉는 무인의 행색을 속으로 비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진원이 입을 열었다.
“길을 좀 터 주시오. 가야 할 길이 바쁜지라.”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은은히 짓고 있던 미소가 진원의 얼굴에서 씻은 듯 사라졌다.
같은 사천에 존재하는 문파 같은데 솔직히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문파의 문도들이 이 사천에서 자신의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니 노기가 끓어 올랐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며칠이 넘도록 노숙을 하며 와서 여독을 풀고 싶으니 길을 터 주시지요. 저야 괜찮지만, 일행에 유약한 소저들이 계십니다.”
나름 정중을 가장한 진원의 말에 무인은 난감했다.
분명 상대는 당가의 사람이 맞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천에서 당문의 이름을 함부로 팔았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저놈이 당가를 가장한 사파 무리라면 나중에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최근 사천에 존재하는 사파 무리를 겨우 소탕하여 사천의 전선을 꾸리기 시작했기에 완전을 기해 조심 또 조심하라는 명이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저 그것이, 시기가 시기인지라···.”
진원은 뒤에서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정확히는 연화의 앞인지라 치기심이 올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평소 같았으면 애초에 이런 중소문파가 감히 당가의 셋째 공자 앞을 가로막지도 않았겠지만.
끓어 오르는 노기를 그대로 드러내려는데 멀리서 경공을 펼치며 다가오는 도사 하나가 보였다.
칼날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날카로운 인상의 도사.
그 도사를 보며 장내의 무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가볍게 내려서며 청년에게 말하는 도사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런 도사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네는 진원.
“오랜만에 뵙네요. 정형. 그간 무공이 진일보 하신 것 같습니다.”
그제야 평범한 차림의 진원에게 눈을 돌리는 정 화명이었다.
청성의 일대 제자로 공석인 대 제자의 자리를 놓고 청성 최고의 기재라는 정 수운과 경쟁 중인 도사였다.
“이제야 알아봤습니다. 당 공자셨군요. 형님께서는 잘 계십니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진원.
“뭐 덕분에 절치부심하고 계십니다. 이제 길 좀 열어주시지요.”
화명의 시선이 자연스레 진원의 뒤로 넘어갔다.
말 위에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두 여인.
설명을 바라듯 진원에게 시선을 다시 옮기는 화명이었지만 꾹 닫힌 진원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피식 웃은 화명이 입을 열었다.
“길을 터 주거라.”
-옛!
그대로 먼지가 나게 땅을 박차며 말에 오른 진원.
“소저 가시지요.”
-히이이이잉!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요란하게 출발하자 무인들의 주위로 심하게 먼지가 날렸다.
무인들을 지나쳐 멀어지자 연수가 조심히 물었다.
“저 고수처럼 보이는 도사는 누구인가요?”
“저자는···. 정 화명이라는 청성의 일대 제자입니다.”
‘청화심수 정 화명. 그렇구만.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했다.’
청화심수 정 화명과 당가의 첫째 아들의 비무는 강호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화였다.
칠 년 전 강호 초출이었던 두 사람이 시비가 붙어 비무를 벌였고, 독첩까지 날린 비무라기보다는 생사 투에 가까운 결투였다.
그 비무에서 정 화명에게 크게 낭패를 당한 당가의 첫째 아들 당 가원은 그 후 지금까지 강호에 나오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당시 사천의 무림에서 당문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고, 호사가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차이는 명확하다며 떠들어 당문으로서는 그때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고 있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연수는 짐짓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무릇 도사란 자비를 가슴에 품고 도를 추구해야 하는 데 저리 흉흉한 기세라니. 도사라는 이름이 아깝군요.”
화명을 만나 기분이 좋지 못하던 진원은 연화가 화명의 흉을 보자 은근히 맞장구를 쳤다.
“도가치고는 무공에 살기가 짙기는 하죠. 실전 살검을 추구하는 청성의 검이 패도 적인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랍니다.”
“도가에서 살검이라니···. 그 무슨 모순이란 말입니까? 저들이 정말 정도의 문파가 맞습니까?”
“정도의 구파 중 일파이니 정파는 맞습니다.”
“청성산이 도가의 삼대 성지라 하더니. 틀린 말 같군요. 청성산은 앞으로 쳐다도 보지 말아야겠어요.”
“산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머무는 사람이 문제인 게지요.”
“청성파는 소림의 관대와 자비를 본받아야 미래가 있을 거예요.”
연화의 말에 어느새 싱글벙글하던 진원이 말을 받았다.
“그럼요. 저런 도사 흉내나 내는 말코들이 오래갈 수는 없겠죠.”
진원의 기분이 한껏 좋아진 것 같이 보이자, 연수는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호위에게 이야기를 듣자 하니 사천 당문 하면 전 중원에 모르는 이가 없는 대단한 무가라 하더군요.”
“하하 공 소저가 금칠해 주셨군요.”
기분 좋게 대소를 터트리며 공숙을 향해 눈을 찡긋하는 진원.
“하독술에 정통하다 하던데 그게 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독을 푸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한 표정으로 말하는 연화를 보며 진원은 미소를 지었다.
“하독술은 그냥 독을 푸는 것과는 궤가 다릅니다. 하독술의 기본은 독을 완벽히 통제하여 나와 의도하지 않은 자가 다치지 않는 것이 기본이요. 목표를 제압하고 생명을 뺏지 않는 것이 상승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독이란 건 위험한 것이잖아요?”
“소저는 독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짐짓 짓궂게 묻는 진원을 향해 연수는 풀죽은 목소리로 기운 없이 말했다.
“저희 양 아버님은 아시겠지만, 황제 폐하를 모시는 내관이십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신다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여 같은 내관들끼리도 정쟁이 끊이질 않으십니다. 아버님의 양아들이자 제 오라버니는 그런 정쟁에 휘말려 독살을 당하셨죠. 하여 언제 아버님이 화를 입을까 항상 걱정이 큽니다. 독에 정통한 소협께 독과 하독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우면 아버님에게 혹시 있을지 모를 화를 미리 방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울먹이며 이야기를 하다 끝내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지며 면사를 적시자 진원은 당황하여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장난을 걸려다 여인을 울려버렸으니 어찌나 당황이 되는지 횡설수설 아무 말을 해대며 연화를 달래는 진원.
“그, 그러셨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께선 분명 좋은 곳에 가셔서 성불하셨을 겁니다. 그 독이란 것이 원체 위험한지라···. 그러니까 제 말은···. 그렇죠! 제가 하독술에 대해 소상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실상 몰라서 당하는 것이지 알면 방지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진원 몰래 씩 미소를 지어 보인 연수가 과장되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당 소협.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하독 술을 가르쳐준다고 약속해 버린 당가의 직계 삼 공자 당 진원이었다.
‘뭐 하독술쯤은 가르쳐 줘도 되겠지.’
‘하나 주기가 힘들지 한번 내주면 다 내어주게 되어있단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감락현으로 들어서는 일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