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진원의 생각을 읽은 연수가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바로 하고는 입을 열었다.
“육합권은 배운지 얼마 안 돼서 미숙합니다.”
“아! 그랬군요. 그간 어떤 무공들을 배우셨는지···.”
말을 하던 진원은 공숙이 노려보자 아차 싶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타인의 무공내력을 묻는 것은 무례였다.
하여 사문을 묻고 상대가 답하지 않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강호의 관례였다.
“어려서는 제가 무공에 관심이 많고 몸이 약해 아버님께서 여러 무인분을 초청하여 기초를 잡아 주셨습니다. 대력금강세라는 별호로 유명하신 황 막이라는 분이 대부분의 무공 기초를 잡아 주셨습니다.”
뿌듯하게 자랑하듯 말하는 연수를 보며 진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대개 강호에서 저런 거창한 별호를 쓰며 유명하지 않은 자들이라면 별 볼 일 없는 인사들이 많았다.
거창하게 자신을 뽐내며 별 볼 일 없는 실력으로 돈깨나 받고 허접한 무공을 가르치며 생색을 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셨군요.”
말을 마치고 다시 육합권을 수련하는 연수.
그런 연수를 지도하는 공숙을 지켜보던 진원의 눈썹이 씰룩였다.
공숙은 연수의 당부대로 굉장히 허술하게 지도를 하고 있었다.
딱히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었지만, 요점을 잘못 짚은 듯 보이는 지도에 진원이 다시 끼어들었다.
“육합권은 저도 좀 알고 있는데 제가 좀 봐 드려도 될까요?”
“정말요? 소협 같은 고수분이 지도해 주시면 감사하죠.”
반색하는 연수와 다르게 공숙은 불쾌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괜히 끼어들어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딱 보기에도 공숙은 저 연화에게 호위무사이자 무공을 가르치는 사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함부로 끼어든다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포권을 하는 진원을 보며 공숙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아가씨도 고수분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 좋겠죠.”
말과는 다르게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두고 보겠다는 표정으로 공숙이 물러나자 진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연화의 지도를 시작했다.
권로며 육합권의 요체를 짚어 주는 진원.
‘겨우 이 실력으로 가르친다며 나섰냐? 아휴, 지금 이 권로를 그따위로 해석해서야 완전히 수박 겉핥기로 익혔구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문의 셋째 아들이 뭐가 아쉬워 육합권을 깊이 수련한단 말인가.
한참 수련을 한 후 이마에 나지도 않은 땀을 닦으며 힘든 척하는 연수.
“소협 지도 감사합니다.”
“이정도야 뭐 별것 아니죠.”
모닥불 주위로 자리를 잡고 앉자 연수가 입을 열었다.
“소협은 암기와 독을 쓰신다면서 권법에도 정통하시는군요.”
“저희 당가는 단순히 독과 암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공과 권법에는 조예가 깊은 편입니다.”
“그렇군요. 어떤 무공들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진원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저희 집안의 무공은 너무도 많이 있죠. 삼양귀원공과 만류귀원신공을 중심으로 파생된 심법들부터 금룡수 삼양수 적련수 세 가지의 금나수는 강호에서도 일절로 유명합니다. 암기술로도 만천화우 천녀산화 구환살 추혼비접 등 스무 가지도 넘게 존재합니다. 그 외에도 각종 편법과 독공 독진들이 있죠.”
“와 정말 무공이 많군요.”
눈을 반짝이는 연화를 보며 씩 미소지은 진원의 자랑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열한 무공 외에도 가전의 모든 무공에 대해 소상히 떠벌리는 진원.
‘너희 아버지가 이런 너를 보면 참 좋아하시겠구나.’
여인의 마음 하나 얻어 보겠다고 집안 비전에 대해 떠벌리는 진원을 보며 연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떠드는 진원을 부추기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행위를 멈출 생각은 없는 연수였다.
진원의 자랑은 반 시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겨우 끝이 났다.
“...하는 것이 황연만사편의 장점입니다.”
한참 자신 가문의 편법에 관해 이야기를 끝낸 진원의 입이 겨우 다물어졌다.
편법의 이야기에 공숙은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아쉬운 눈빛을 남겼다.
진원의 입이 다물어지자 연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금나수와 편법에 조예가 깊은 것 같은데 저도 좀 배울 수 없을까요?”
밑도 끝도 없이 치고 나오는 연수의 말에 진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진원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공숙이 끼어들었다.
“아가씨, 강호의 무림인에게 비전을 함부로 알려달라 하는 것은 정말 큰 실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강호의 사정에 어두워서 실례를 범했네요.”
포권을 하며 사과하는 공숙을 보며 진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연수 또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대단한 무공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다 보니 푹 빠져서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으니 어서 고개를 드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세 명이 다시 자리에 앉자 연수와 공숙은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고,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자 진원은 괜히 불편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이렇게 불편해지자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불편함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뭐라도 이야기를 꺼내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었지만, 무공이야기 외에는 딱히 밝게 꺼낼 화제도 없었다.
하지만 무공이야기 때문에 분위기가 이리 불편해졌는데 다시 무공 자랑을 하기도 뭐했다. 가르쳐 주지도 못할 무공인데 자랑만 하자니 염장을 지르는 놈 취급당할 것 같았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고, 그렇게 그날의 밤을 마무리했다.
해가 뜨기 시작하자 간단하게 곡물을 끓여 먹고는 말에 오르는 세 사람.
그날 밤이 지나면 이 불편한 침묵도 끝이 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할 때도 무슨 말을 꺼내보아도 모두 단답형으로 끊어지니 대화를 이어 갈 수도 없었고,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자꾸 위축되어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도 힘들어졌다.
그렇게 대화 없이 묵묵히 말만 달리자 이른 저녁쯤 서창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객잔을 잡고 식사를 시켰는데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다 보니 이제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심해졌다.
“연화 소저, 이 당초육이 참 맛나지 않습니까?”
당초육을 입에 갖다 댄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
“소, 소면도 참 맛이 좋네요.”
“네.”
식사를 마친 연수는 일어서며 진원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 예. 힘드실 텐데 푹 쉬십시오.”
두 여인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진원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왜 내가 잘못한 것 같지? 내가 잘못 한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지난 상황을 복귀해보는 진원.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당연했다. 가문의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못 들어주는 것은 그가 아니라 아무리 대범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당사자에게 사과까지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자신이 이리 불편함을 느끼고 죄인이 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이 불편했다.
이제는 불편함을 넘어 두 여인과 있는 순간이 힘이 들 정도였다.
“점소이 여기 홍화주 한 병.”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옆 탁자를 정리하던 점소이가 재빨리 움직여 술과 잔을 갖다 주었다.
술잔 가득 술을 따라 입안에 털어 넣자 후끈한 기운이 목 안을 넘어가며 식도를 지나가자 지난 밤부터 심리적으로 시달렸던 정신이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거푸 석 잔의 술을 털어 넣고 나서야 마음이 안정되며 오르는 술기운에 기분이 풀렸다.
“후우, 그깟 무공 몇 수 못 가르칠 것도 없지. 그래 봤자 초식뿐이잖아? 심공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니 그랬다. 게다가 저 여인의 마음을 돌려 자신의 평생 배필로 삼으려고 노력 중인데 비전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같은 집안 식구가 되면···. 비전의 유출도 아니게 되는 거잖아?”
그랬다. 당가는 기본적으로 데릴사위제였다. 당가의 여식이 출가하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고 간혹 있다 해도 가문의 무공을 모르는 여식에 한해서였다.
데릴사위로 들어와 아이를 낳아도 당씨 성을 쓰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당문이 있을 수 있었다.
든든한 방계의 당가 무인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규모를 유지했고 또 비전의 유출을 막아내었다.
독의 제조나 해독법은 한번 유출되면 돌이킬 수가 없다.
강호에서 당문이 두려운 이유는 독과 암기에 정통해서였다.
그런 당문의 독이 해독이 쉽다면 아무도 당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독공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깟 금나수 몇 수쯤 알려준다고 해독법이 세어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까지 합리화를 마친 진원의 앞에는 네 병의 빈 술병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술이 자신을 먹는지 자신이 술을 먹는지 모를 정도로 취한 진원은 비틀거리며 객방으로 들어가 침상 위로 뻗어 버렸다.
“어떨 것 같아?”
흥미로운 표정으로 묻는 공숙의 얼굴에 기대감이 잔뜩 어렸다.
“글쎄요. 그래도 제대로 정신이 박힌 놈이면 가문의 비전은 풀어 놓지 않겠죠? 계속 지금처럼 쌀쌀하게 대하다가 하독 술에 관해 물으면 몇 가지 털어놓지 않을까요? 운이 좋으면 편법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황연만사편은 꼭 보고 싶은데.”
“지켜보죠. 그리고 저놈을 달고 가면 숭산까지 별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을 거예요. 당가의 셋째 아들이라면 신원보증은 확실할 테니까요.”
“응.”
다음날이 되자 술 냄새를 풍기며 내려오는 진원.
“과음하셨나 보군요.”
냉기가 풍기는 듯한 연수의 말에 진원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예···. 한 잔만 한다는 것이···.”
“낙이불음 애이불상이라 하였습니다. 모든 지나친 것은 좋지 못합니다. 소협.”
“죄, 죄송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죄송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장성한 성인이 과음하는 것쯤은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무인들에게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기호품이었다.
영웅호걸 중 술을 멀리한 인물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공자의 말을 빌려 자신을 꾸짖자 자기도 모르게 사과가 튀어나왔다.
‘내가 왜 이러냐.’
머리를 흔든 진원은 든든하게 해장을 마치고는 밖으로 나와 여행길에 필요한 물품을 봇짐에 챙겨 넣고 말에 올라탔다.
한참 말을 달리다가 해가 중천을 넘어가자 말을 세워 잠시 쉬어가며 육포를 꺼내어 내미는 진원.
“잘 먹을게요.”
한마디를 끝으로 말없이 면사를 살짝 올려 육포를 먹는 연수.
진원이 그런 연수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연화 소저. 저희 집안의 금나수 중 금룡수를 배워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나름 금나수로는 강호에서 일절 소리를 듣는 수법입니다.”
진원의 말에 공숙과 연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무나 놀래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하는 둘.
‘아···. 너희 아버님이 정말 대단한 막내아들을 낳으셨구나.’
서둘러 반색하며 연수가 물었다.
“정말 배워도 되겠습니까? 혹 곤란한 일을 당하시는 것은 아닌지.”
“이정도는 괜찮습니다.”
활짝 웃으며 자신감 있게 말하는 진원.
진원이 말을 뒤집기라도 할까 봐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였다.
“가르쳐 주신다면 전심을 다 해서 배우겠습니다.”
밝고 듣기 좋은 목소리.
단 한마디만 들어도 벌써 불편하던 분위기가 사라지며 자리가 편안해지는 감각에 절로 신이 나는 진원이었다.
금룡수쯤 몇 수 가르쳐 준다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진원이었다.
미안한 생각이지만 연화의 자질로는 금룡수 몇 초식을 제대로 익히는데 몇 해는 걸릴 것 같았다.
‘서너 초식 가르친다고 별 탈이야 있겠어?’
그런 진원의 마음을 읽었는지 연수는 마주 웃어주었다.
‘순식간에 쪽 빨아먹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