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넉살도 좋게 말을 붙여오는 청년의 얼굴에 일 권을 먹여 이를 털어놓고 싶어지던 연수는 최대한 진정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숙소를 잡으셨군요. 혹시나 노숙하시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어제 새벽부터 이 근방을 잠 못 이루고 배회하였습니다.”
‘네가 내 걱정을 왜 하냐?’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지금 변장하고 있는 설정상 그럴 수만도 없었다.
“소협의 마음 씀씀이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받아주셔서 영광입니다. 합석해도 될까요? 저도 아직 식전 인지라.”
능청스럽게 웃는 청년의 얼굴을 보자 정말 밤새 연수를 찾았는지, 눈 밑이 어둡고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그, 그러시죠.”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는 공숙을 보는 연수의 속이 뒤집혔다.
“연화 아가씨는 이 사천까지 어인 일로 오신 건가요?”
잠시 생각을 하던 연수의 머리로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혼처가 정해져 시집가기 전에 세상 구경을 해 보고 소림사에 불공을 드릴 겸 여행 중입니다.”
혼처가 정해졌다는 연수의 말에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한 청년을 보며 고소를 머금은 연수는 짐짓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소협께서는 무가의 자제분 같으신데 저는 무림 무가에 대해 견식이 짧아서요. 어떤 가문이신가요?”
잠시의 충격이 지나가자 청년은 정신을 차리며 눈을 빛냈다.
마치 포기는 이르다는 듯 자신을 다잡는 듯한 그 표정을 보며 연수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저희 가문은 당가인데 강호에 동도들은 사천 당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 사천에서 유명한 무가인가 보군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청년.
“그럼요.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희 당문은 독과 암기로 강호에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눈에 두려움과 거부감의 감정을 담아 말하는 연수였다.
“도, 독이요?”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청년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희 당문은 중원의 정파에 소속되어 있어 절대 정파의 정기를 해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독을 쓸 때도 꼭 당첩을 날려 상대에게 경고한 후 독과 암기를 사용하죠.”
‘퍽이나 그러겠다.’
속으로 한껏 비꼰 연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데 어제는···.”
청년의 표정에 당혹감이 가득 찼다.
“그, 그것은···. 그러니까···. 그들은 사특한 무리로 어제 겪으셨듯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금수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금수들을 상대로 인간적인 대우를 할 수는 없죠. 자칫 고귀한 연화 소저에게 화가 미칠지 몰라 과감히 손을 썼습니다.”
‘말은 재상감이네. 정치해도 잘 하겠다.’
“그렇군요. 다시 한번 어제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자꾸 이러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면사 위에 드러난 눈을 반달처럼 기울이며 눈웃음으로 화답한 연수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몸 둘 바를 모를 놈의 태도냐고.’
때마침 식사가 나오자 대충 끼니를 때운 셋.
식후에 차를 마시는데 청년이 물어왔다.
“혹 이곳에는 언제까지 머무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처 묻고 있잖냐?’
“갈 길이 바빠 이제 길을 떠날까 생각 중입니다.”
청년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역력했다.
“그렇군요. 하남으로 가는 길이라면 큰 위험은 없겠지만 절대 관도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현재 강호에 정사 간 큰 싸움이 일어나 자칫 휘말리면 큰 화를 입으실 수 있습니다.”
“예. 명심할게요.”
더 할 말이 없나 머리를 굴리는 청년을 보며 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은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길을 서두르는 눈앞에 아가씨가 너무도 매정하게 느껴졌다.
밝은 표정으로 달려와 음식값을 받는 점소이는 말을 찾아 떠난다는 연수의 말에 세상 아쉬운 표정으로 마사로 걸음을 옮겼다.
당진원은 뒤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애를 태우고 있었다.
연수는 연수대로 저 철없는 애송이 놈이 또 무슨 소리를 하며 들러붙을까 불안에 떨고 있었다.
말을 가지러 간 점소이가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은자를 한 냥이나 쥐여줬는데 빠릿빠릿 움직이질 못하고!’
지금도 안절부절못하고 이쪽을 뚫어지기 바라보며 망설이는 듯한 저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객잔 밖으로 나서며 점소이를 기다리는 연수.
객잔 밖으로 나서는 연수를 본 진원이 뛰어나왔다.
“연화 소저! 잠시만···.”
왜 나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면사가 나풀거리게 한숨을 쉰 연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부르셨나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연화 소저의 기품과 성품에 반했습니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소저를 더 알고 싶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다리를 후들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는 진원을 보는 연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진정 일어나는구나.’
“저, 저는 정인이 있습니다.”
“저 또한 집안 어른들께서 혼처를 정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번 얼굴도 못 본 무가의 여인입니다. 아직 강호의 경험이 미천하지만 많은 무림의 여인들을 보아왔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도 많았고, 똑똑한 여인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그 어떤 여인도 연화 소저처럼 정숙하고 기품과 좋은 성품을 갖춘 여인은 없었습니다. 도리를 따지기 전에 검을 뽑아 드는 억센 여인들이 대부분이었죠. 저는 무가의 여인과 혼인하여 평생을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느냐고.’
급격히 피로가 몰려와 목 뒤가 뻣뻣해지는 연수는 침착한 목소리로 변명을 시작했다.
“저 또한 무공을 배웠습니다. 몇몇 사례를 들어 전체를 확정하고 단언하는 것은 좁은 소인의 시야입니다.”
무공을 배웠다며 자신감 있게 말하고 자신의 좁은 시야를 점잖게 타일러 주는 연수를 보는 진원의 눈이 더 확신에 가득 찼다.
“역시, 연화 소저의 고견은 깊군요. 연화 소저를 잘 모르지만 소저!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단박에 거절하여 거머리 같은 이놈을 떼어 내려는데 문득 한줄기 번쩍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선 살짝 튕기고.’
“정혼자가 있는 사내가 다른 이의 정혼자에게 연정을 품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진원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를 악물며 연수를 바라보는 진원.
“도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자의 도리보다 저는 소저에 대한 제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한 번만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단 삼일. 삼 일 후면 둘째 형님께서 이곳에 오십니다. 그럼 하남까지 제가 호위하며 소저를 모시겠습니다. 그 여정 동안 저를 봐 주십시오. 그 여정이 끝난 후에도 제게 마음이 생기지 않으신다면 돌아서겠습니다.”
한숨을 푹 쉬며 연수의 입이 열리는 동안 진원의 심장은 요동을 쳤다.
“좋습니다. 강호가 그리 흉흉하다니 소협의 호위를 받는다면 안전한 여행길이 되겠네요. 하지만 저는 정인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소협의 뜻에 따르겠어요.”
뜻밖에 말에 공숙의 눈이 부릅떠졌다.
주먹에 힘을 주며 위로 뻗는 진원.
“아자! 헛, 죄, 죄송합니다. 소저. 추태를 보였네요. 그것이면 저는 충분합니다.”
때마침 힘없이 말을 이끌고 오는 점소이는 며칠 더 묵다 간다는 말에 올 때와는 다르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말을 다시 마사에 집어넣었다.
진원이 돌아가고 객방으로 다시 올라온 연수와 공숙.
안에 들어서자마자 공숙이 물어왔다.
“무슨 생각이야?”
“뭐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인의 흉내를 내는 연수.
“장난하지 말고. 대체 무슨 생각인데?”
“당가의 하독술과 독공.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제야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치는 공숙.
“그렇구나! 그런데 순순히 알려 줄까?”
“잘 홀려 봐야죠.”
“역시 꼬리 아홉 달린 여우였어.”
“큼큼! 그보다 누이 변장이 망가졌네요. 좀 더 어둡고 남자처럼 하고 다니세요.”
좌우로 쭉 찢긴 듯 당겨놓은 눈매가 살짝 풀리며 본래의 미색이 나오려는 기색이 보이자 견제하는 연수였다.
“정말이네? 손 좀 봐놔야겠다.”
‘누이 미안. 당분간은 미모 좀 몰아주세요.’
객잔에서 묵은지 이틀이 더 지났지만, 진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거머리처럼 들러붙던 놈이 기다려달라더니 인사 한 번 오지를 않자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연수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반 시진 가까이 화장하느라 용을 썼는데 이 새끼가 누구 놀리나?’
결국,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객잔으로 찾아온 진원.
얇은 면사로 바꿔 얼굴이 슬쩍 비쳐 보일 듯 말 듯 한 연수가 눈을 빛내며 진원을 맞이했다.
“소협 오셨군요.”
“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한 진원이었다.
사실 지금 같은 시기에 수녹대를 이끄는 당가의 삼 공자인 자신이 한가하게 하남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둘째 형에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냐며 욕을 먹었지만, 인생에 배필을 만났다며 인정에 호소한 결과 겨우 둘째 형을 설득할 수 있던 당 진원이었다.
만약 가주인 아버지나 큰형이 있었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거의 둘째 형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다시피 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잔 진원은 무언가 분위기가 변한듯한 연수를 보니 피곤이 날아가는 듯했다.
“떠날 채비는 모두 되셨나요?”
“예. 모두 마쳐 놓았습니다.”
“그럼 일찍 길을 나서죠.”
세 사람은 말 위에 올라타 현을 벗어났다.
말을 달리며 어떻게 저놈에게서 독공을 훔쳐낼 수 있을지 고민하던 연수는 공숙과 전음을 주고받았다.
한참을 달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진원은 말을 세웠다.
“이쯤에서 노숙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안 가고요?”
“예. 어차피 오늘 안으로 서창현에 도착하기는 힘들 듯하니 이쯤에서 일찍 쉬고 내일 길을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사천은 제 안방이나 다름이 없으니 맡겨 주십시오.”
“그럼 소협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진원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장작으로 쓸 나무를 구하러 움직였다.
-쯧쯧 저놈 저거 조만간에 간이며 쓸개며 다 빼주게 생겼네.
씩 미소를 지으며 공숙의 전음에 대답하는 연수였다.
-아까 이야기 했던 그대로 하시면 돼요.
-응.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마른 나무에 불을 댕겨 모닥불을 피운 진원이 말에 매어놓은 봇짐에서 쇠줄이 달린 냄비를 꺼내어 곡물과 물을 붓고 모닥불 위로 올리자 금세 주위로 고소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봇짐에서 식기와 나무 그릇을 꺼낸 진원이 진득하게 끓여진 죽을 퍼서 연수와 공숙에게 건넸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이정도야 기본이죠. 따뜻할 때 드십시오. 먼 여정을 다닐 때는 노숙하며 몸이 축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든든히 곡물을 먹어주어야 몸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소협.”
“잘 먹겠습니다. 소협.”
두 여인의 감사에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히는 진원.
간단한 식사를 마친 연수와 공숙이 자리를 털며 일어서자 진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여인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닥불에서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고 육합권을 수련하기 시작하는 연수.
그런 연수를 공숙이 옆에서 지도하기 시작했다.
모닥불 옆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진원이 엉덩이를 떼며 다가왔다.
“육합권을 수련 중이시군요.”
권로를 향해 어설프게 손을 뻗으며 수련하는 연수 대신 공숙이 대답했다.
“예. 아가씨께서는 어려서부터 무공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해서 어려서는 강호의 인사들을 초대하여 무공을 배우기도 하고 몇 해 전부터는 제게 무공을 배우고 계세요.”
진원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무어라 칭찬이라도 하면서 끼어들고 싶었는데 어려서부터 강호의 인사들에게 무공을 배웠고 몇 년을 넘게 호위무사에게 무공을 배운 사람의 육합권 수준이 겨우 이렇다면 이건 자질을 떠나 무공을 배워서는 안 될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