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연수.
“혼내 보라죠. 뭐, 모르긴 몰라도 함부로 저한테 뭐라 하지 못할걸요?”
“왜?”
“저를 영입하고 싶어 하거든요.”
“사황성으로?”
“그럼요. 제가 나름 인재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함부로 말하다 들키면 혼날 텐데.”
“제가 그 양반 꽉 잡고 있어요.”
“정말?”
“그럼요.”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공숙의 눈빛에 농담 섞인 허풍을 친 연수는 피식 웃었다.
“이제 적당히 운기하고 눈 좀 붙이죠. 갈 길이 멀어요.”
“응.”
특유의 자세로 운기를 시작하는 공숙. 그런 공숙을 보며 기막을 거둬들이고는 이목공을 펼치며 두 눈을 감자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다음 날 일찍부터 객잔을 떠나는 두 사람.
그렇게 며칠을 말을 달리던 두 사람은 오늘도 관도에서 떨어진 숲에 말을 매어 놓고 나무 사이에 줄을 매어 그 위에서 눈을 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막 잠자리에 들던 연수와 공숙의 신형이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서며 주변을 경계했다.
“몇이야?”
“얼추 삼십 명 이상이요.”
연수와 공숙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매섭게 어둠 속을 노려보는 둘.
그런 둘을 향해 달려오는 무리가 어둠을 뚫고 둘의 시야에 잡혔다.
두 여인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속도를 좁혀 이 장거리에 멈춰선 무인들.
검은 무복에 등과 가슴에 붉은 수실로 수놓아 져 있는 주라는 글자가 그들의 존재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무림인인가?”
얼굴에 세 개의 자상이 강렬한 인상의 사내가 물어왔다.
잠시 사내를 바라보던 공숙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무림인이 아니에요. 이 분은 서하공의 따님입니다!”
사내는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그 사이 옆에 있던 눈매가 찢어진 사내 하나가 축축한 혀로 입술을 핥으며 느끼하게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흐흐 오랜만에 아랫도리 좀 풀고 가는 게 어떨까요? 앞으로 고생문이 열린 것 같은데 이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딱 보니 귀하게 큰 년 같은데 저런 정숙한 년을···.”
“아가리 다물어. 임무 중이다.”
비릿한 눈빛을 흘리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어떻습니까? 조장도 저년들 몸매에서 눈을 못 떼면서.”
그 순간 연수와 공숙의 몸이 흠칫 떨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는 둘.
막 남자가 허리춤을 풀며 과장된 행동을 하는데 장내로 열두 명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연수는 본능적으로 장내에 난입하는 무인들을 살폈다.
‘고수들이군.’
공숙 역시 무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잔뜩 긴장했다.
“역시! 올 줄 알고 있었다. 누가 사특한 무리 아니랄까 봐 입에 담지도 못 할 짓을 하고 있었구나!”
이제 약관을 막 넘긴 것 같은 청년이 호령하자 사특한 무리라 폄하 당한 무리의 조장이 이를 갈았다.
“용케 눈치채고 마중 나왔구나. 당가. 사천에서 떵떵거리며 살다 보니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 놈이 혓바닥 놀리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야. 들은 적이 있지. 당가의 철없는 셋째 놈이 있다는 소문.”
당가라는 말에 연수의 눈이 빛났다.
확실히 인제 보니 붉은색과 검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무복과 이질감이 느껴지는 기운은 공숙의 독공과 그 궤가 비슷했다.
사내의 도발에 청년은 피식 웃었다.
“같잖은 도발을 하는 걸 보니 제법 머리는 돌아가는 것 같구나. 하지만 소용없어. 이미 늦었으니까.”
말을 마치는 청년의 눈이 반짝였다.
그와 동시에 사내가 외쳤다.
“대열을 유지하고 중독에 유의하라!”
“늦었다니까.”
사내의 표정이 찡그려지는 순간, 곳곳에서 침음이 터져나오며 무사들이 쓰러졌다.
연수는 심히 고민이 되었다. 독을 쓰는 처지에서 당문의 하독술은 잘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지척에서 싸움 구경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도 당문의 싸움을.
눈짓을 주고받은 연수와 공숙은 동시에 몸을 뒤로 날렸는데 곧바로 청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소저들! 움직이지 마시오. 중독될 수 있소.”
‘젠장’
속으로 욕을 퍼부은 연수는 공숙과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떻게 하독을 한 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놈들은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몇 마디 나누는 동안 수십의 무인들을 중독시켰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당문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반짝이는 연수.
무인들이 움직이는 순간 느껴졌다. 아니 보였다.
흐릿한 기운의 흐름이.
‘독진이었구나.’
당문의 무인들을 기준으로 안쪽을 빼고 순환되는 독기들이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래서 움직이지 말라 했군.’
참으로 은밀했다. 자신조차 겨우 눈치챘을 정도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독의 위력은 누구보다 연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독으로 인해 목숨을 구한 적도 많았고, 강적을 손쉽게 이겨낸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초절정에 올랐다는 무황조차 독에 중독되어 하찮은 놈들을 상대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도주를 한 적이 있었다.
같은 독을 쓰는 처지에서 이런 하독술이나 독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배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구사천독전으로 쓸만한 위력적인 독의 제조는 할 줄 알지만 하독술이나 독공은 전혀 문외한이었다.
그나마 무영심공의 공능으로 무음의 바늘을 쏘아내는 것이 큰 무기이기는 했지만.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당문 무인들은 중독된 사파의 무인들을 격살하고 있었다.
겨우 열둘의 숫자로 세 배 가까이 되는 적들을 몰아치는데도 사파의 무인들은 제대로 반격조차 못 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겨우 일각도 되지 않아 얼굴에 자상이 나 있는 무인을 빼고는 모두 격살시킨 당문의 무인들.
“혓바닥 잘 굴리던데 말이야. 과연 원곡에 갇혀 심문받는 동안에도 그리 혓바닥이 잘 움직일지 궁금하네.”
연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당문의 원곡.
사파 인들에게는 악명이 자자한 곳으로 한번 잡혀들어가면 온갖 독에 중독되는 실험체가 되며 갖은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쉽사리 죽기도 힘들어 원곡에 갈 바에는 십팔 층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낫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연수는 청년을 향해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소협의 덕분에 파렴치한 놈들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파 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뭘요. 저는 당문의 당 진원이라 합니다.”
공숙이 연수의 옆으로 붙으며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서하공의 따님이십니다.”
진원이 공숙에게서 다시 연수에게 시선을 옮기자 연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서 연화라고 해요.”
“아! 그렇군요. 참 아름다운 이름이십니다. 이런 곳에서의 노숙은 위험하니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게 어떨까요? 이 근방은 언제 사특한 놈들이 쳐들어와 악행을 일삼을지 알 수 없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제의를 거절하는 연수였다.
아무리 변장을 했다지만 정파의 그것도 당문의 무인들과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정파인들 또한 특별한 친분이 없다면 당문을 꺼린다.
당연했다. 독을 쓰는 인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다 보니 당문의 무인이 있으면 차 한잔 밥 한술 맘 편히 먹기가 힘들었다.
“도움을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어찌 이 밤에 초면의 남자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청년의 뒤에 서 있던 무인 하나가 발끈해서 앞으로 나섰다.
“이 분은 사천 당문의 셋째···.”
“그만. 소전 어찌 예의 없이 구는 것이야? 저분은 명가의 도리를 지적하시는데. 이러니 우리 무가가 못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청년은 연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수하들이 무공 말고는 제대로 배운 것이 없다 보니.”
“괜찮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런 곳에서의 노숙은 위험하니 일단 덕창현으로 옮기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뵙는 영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느끼하게 웃어 보인 청년이 홀로 살아남은 무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와 당문이 괜히 당문이 아니네.”
“그러게 말이에요. 독진을 통한 하독술은 눈뜨고 코 베이는 느낌이네요.”
눈을 동그랗게 뜬 공숙이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독진이었어?”
“예. 너무 은밀해서 저도 겨우 눈치챘어요.”
“독기가 도는 것은 느꼈는데. 설마 진을 이뤄 하독 하는 줄은 몰랐네.”
‘독기를 느껴? 역시 독공을 익혀 독기에 민감하구나.’
그간 잘 못 느끼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공숙 또한 독공을 대성한 나름 독공의 고수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연수를 바라보며 공숙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런데 저 당가의 셋째 아들놈 너한테 반한 것 같은데?”
상념이 산산이 깨어지며 연수의 얼굴이 멍해졌다.
“에?”
“내가 요즘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아는데 저거 분명해. 너한테 빠졌어.”
“그 무슨 청천벽력같은 악담이세요.”
“히히히 두고 봐라. 며칠 안에 또 나타나서 이런저런 선물도 주고 차도 마시자고 할걸?”
“사, 상당히 구체적인 예견이시네요.”
“대부분 그러더라고.”
“하아,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이동하죠. 괜한 싸움에 휘말리기 전에.”
“히히히.”
뒤를 따르며 연신 웃음을 흘리는 공숙.
어두운 밤길을 말을 달리며 덕창현으로 들어오니 아니나 다를까 불을 밝힌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잠자리 구하기 힘들겠는데? 여기까지 와서 노숙해야겠어.”
“그러게요. 문을 연 곳이 하나도 없네요. 그렇다고···.”
“그렇다고 뭐?”
“기루를 갈 수는 없다고요.”
“기루는 이 새벽에 문을 열어?”
“아마도 지금이 한창 성황 중이겠죠.”
“그럼, 거기라도 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연수는 차분히 설명했다.
“여인 둘이서 기루에 가면 이상한 취급받을 거예요. 괜히 시선 끌 필요 없죠.”
“그럼 어떡할까?”
“객잔 문을 두드리고 다녀 보죠. 뭐.”
둘은 말을 끌고 터덜터덜 걸으며 굳게 닫힌 객잔의 문을 두드렸다.
벌써 다섯 곳이 넘게 돌아다녔지만, 문을 열어주는 곳이 없었다.
“여기까지 문을 안 열어주면 그냥 노숙하죠.”
“그래야겠네.”
-쿵쿵쿵
“여기! 문 좀 열어 보세요.”
-쿵쿵쿵
한참을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며 흐린 불빛이 굳게 닫힌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아니 이 새벽에 누구시오?”
왜소한 점소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묵을 곳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이 밤중에 폐가 되었습니다.”
말을 하며 품속에서 은자를 하나 꺼내서 쥐여 주자 손에 쥔 은자를 작은 등 빛에 비춰본 점소이가 잠이 확 깨 연수와 공숙을 살폈다.
면사까지 한 여인과 무복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여인.
딱 보아도 무림인이 분명했다.
왜소한 점소이는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이 밤중에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습니까? 말은 제게 맡기고 일단 이 앞에 앉아 기다려 주십시오.”
황급히 달려 나와 공숙의 손에서 말 고삐를 받아 말을 끌고 가는 점소이.
잠시 후 말을 마사에 넣은 점소이가 돌아와서는 두 여인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방이 하나뿐인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레 말하는 점소이에게 기품 넘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늦은 밤에 이리 불청객을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립니다.”
점소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면사를 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이리 아름다운 목소리에 배려심 넘치는 여인이라니.
딱 봐도 대갓집 규수 같은데 이리 상냥하다니 절로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층의 끝방으로 안내한 점소이가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이 누추해서···. 이런 방에 모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역시나 선녀 같은 여인이라 생각하며 물러가는 점소이.
점소이가 문을 닫고 돌아 나가자마자 뒤에서 공숙이 키득거렸다.
“또 왜요?”
“그냥. 크크 너 하는 짓이 꼬리 아홉 달린 여우 같아서.”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그런 게 있어.”
알 수 없는 소리를 마친 공숙이 침상에 눕자 벽에 연결해 놓은 줄 위로 몸을 날려 눕는 연수였다.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끝내고 일 층으로 내려오자 음식 준비 중인지 음식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두 여인을 발견한 점소이는 한달음에 달려와 해가 잘 드는 창가로 자리를 안내하고 주문을 받았다.
가볍게 요리 하나와 소면 둘을 시키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연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젠장!’
창밖에서 연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