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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86화 (86/202)

# 86화

이제는 예의 따위 개나 줘버린 저 젊은 놈의 무례를 지적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 누구냐! 정체가 무엇이냔 말이다!”

잔뜩 긴장한 채 외치는 호탁도였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건들면 안 되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한 거 아니야? 특히나 요즘 같은 어수선한 시기에.”

말을 마친 연수의 손목이 빙글 돌자 빈손이었던 그의 손에 초승달 모양의 단검이 나타났다.

“아, 암수일살!”

상황을 지켜보던 객주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진을 구성한 무사들의 기운이 크게 요동쳤다.

“네, 네가! 네가 암수일살이라고? 이노오오옴! 쳐라!”

곤륜의 장로 셋과 일대 제자 둘을 죽여 곤륜의 명예를 땅에 처박고 운남 정파의 정기를 훼손한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이 눈앞에 있었다.

자신의 안위나 지영문의 존속 따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설사 지영문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눈앞에 놈을 죽여야만 했다.

“누이 저 검진 상대할 수 있겠어요?”

“응. 별거 아니야.”

“무리는 하지 마시고요.”

“응.”

말을 마친 둘은 서로 갈라지며 달려오는 적들을 맞았다.

공숙은 채찍을 휘두르며 이십여 명이 이룬 검진으로 몸을 날렸고, 연수는 그보다 뒤에서 달려 나오는 호탁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호탁도의 검세는 확실히 쉽게 상대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수와 그의 차이는 너무나 확연했다.

만약 암수검을 썼다면 스무 초식 안에 목을 그을 자신이 있었다.

하나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적수공권에 지동권으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그렇게 사십 초식을 넘게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레 호탁도의 호흡이 읽혔다.

‘보인다.’

좀 전에 검영이 가득한 곳으로 손을 뻗을 때처럼 호탁도의 모든 호흡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의 모든 검로가 자신의 권로와 겹쳐지며 어디를 어떻게 쳐야 할지가 반짝이며 눈에 들어온 순간.

-퍼 퍽! 펑!

호탁도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그의 옆구리로 두 방의 권격을 먹이고는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면을 쳐올렸다.

호탁도가 비틀대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입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런 호탁도의 곁을 연수가 스치고 지나가자 날카로운 예기가 담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과 함께 호탁도의 양팔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푸슉!

소리와 함께 양팔이 있던 자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뒤늦은 호탁도의 비명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르는 호탁도의 단전에 연수의 주먹이 가볍게 닿자 호탁도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문주의 비명에 멈칫하며 흔들리는 검진.

그 검진으로 연수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제법 단단하고 공고히 이루어진 검진이었다.

무엇보다 옥령진처럼 서로의 기운을 순환시켜 상대를 압박하는 검진은 자칫 그 흐름을 읽지 못하면 상대하기 힘들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공숙이 아직 검진을 이룬 고수 중 하나도 죽이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연수의 눈에는 검진의 흐름이 모두 선명히 보였다.

순환하는 기운을 받아 보다 강력한 기운으로 공격을 이어가는 이들.

그렇다면 순환하는 기운과 반대로 움직이며 진을 공격하면 되었다.

순간 연수의 신형이 흐려지며 그의 존재감이 지워져 갔다.

-펑 펑 펑!

속이 빈 가죽공을 때리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무사들이 날아갔다.

한번 쓰러진 무사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며 몸만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어디냐?!”

“정정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라!”

“모두 진을 유지해!”

무사들이 술렁이며 여기저기서 불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공숙의 공격을 막아내는 무사들은 진이 흩트려지며 기운의 순환이 불안해지자 필사적으로 진을 유지하려 다른 무사들을 독려했지만 여기저기서 무사들이 날아가며 쓰러져 가자 금세 진은 와해되 버렸다.

진이 깨어지자 연수의 신형이 무사들의 중심에서 나타났다.

“여기다!”

외침과 함께 검기들이 사방에서 몰아쳐 왔다.

이 감각이다. 무질서한 기운들의 향연 속을 마치 손바닥 위에 두고 모두 조절하는 듯한 감각.

검기를 난사하던 무사들은 점차 커지는 눈으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도무지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기를 마치 산책하듯 느릿한 걸음으로 피하는 저 움직임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모, 모두 도망쳐!”

누가 외쳤는지 모를 그 한마디에 스물이 조금 안 되는 무사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수는 그들을 뒤쫓을 수가 없었다.

놀라운 감각에 휩싸이기 무섭게 살심이 끌어 올랐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고 검기를 날리며 어떻게 움직여야 저 들을 최단 속으로 죽일 수 있을지 그 검로가 모두 떠오르며 몸이 반응하려 했다.

‘안 돼!’

이 감각과 살심에 몸을 맡겨버리면 살성이 된다고 생각하자 필사적으로 몸을 억제하며 무황이 알려준 심결을 외워 살심을 억눌렀다.

잠시 그러고 있자 공숙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후우.”

“괜찮아?”

“예.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네요.”

한숨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자 쓰러진 무사들 외에는 모두 도망친 후였다.

저 멀리 양팔을 잃고도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지영문주가 보였다.

그의 옆에서 다리를 절룩이던 객주가 팔이 잘린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고 양팔이 잘려 아무리 절정고수라도 지혈을 하지 못해 죽을 거로 생각했더니 예상외로 저 객주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연수가 다가오자 잔뜩 경계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드는 객주.

그런 객주의 옆으로 객잔 안에서 어린 점소이가 뛰어나와 옆을 지켰다.

결연한 눈빛으로 연수와 공숙을 바라보는 그 점소이를 보는 순간 올라가던 연수의 손이 내려졌다.

“죽을 줄 알았는데 운이 좋군. 단전도 아직 안 깨졌나 보네?”

분명 깨지라고 쳤거늘 절정고수라는 이름값은 하는 것 같았다.

“사부의 팔을 빼앗은 빚은 갚았다. 나머지 빚은 언젠가 곤륜에서 받을 날이 있겠지. 어이 너.”

점소이는 손에 쥔 아직은 몸보다 커 보이는 장검에 힘을 주며 대답을 대신했다.

“가져와 우리말.”

“에?”

멍한 표정으로 연수와 객주를 번갈아 보는 점소이.

“가져오라고. 우리 말. 팔아 버린 건 아니겠지?”

객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당황하던 점소이가 달려가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또 포동포동 살이 쪘어!”

“금방 빠져요.”

공숙의 투정을 받아준 연수가 잠시 뒤를 바라보고는 말에 올라탔다.

“언제든 빚을 갚으러 와도 돼. 그때는 나도 지영문을 찾아갈 테니까.”

말이 저 멀리 먼지구름을 날리며 사라지자 객주는 한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너는 어서 가서 의원을 데려오거라.”

풀린 다리에 힘을 줘 일어나며 혈색이 창백해진 지영문주를 안아 들고 풍비박산이 난 객잔으로 들어가는 객주.

연수의 안색을 슬쩍 살핀 공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안 죽였어?”

“그냥요. 옛 생각이 좀 나서요.”

“그래도 사부의 원수잖아.”

“예. 그래서 두 배로 갚아 줬잖아요. 진짜 빚은 곤륜에게 받을 거예요. 노야께는 죄송스럽지만···. 원죄는 곤륜에 있으니까요.”

공숙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좀 괜찮아?”

“그다지 안 괜찮아요. 노야가 분명 백회는 닫아놓으셨다 했는데···. 이제 알 것 같아요. 제 정이 앞선다는 의미. 생각보다 억누르기 힘들어요. 자연스럽게 발현되어 나오는 것 같아서.”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한참 침묵하던 공숙이 입을 열었다.

“그럼 싸움을 피하는 게 좋겠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 변장 안 해도 돼?”

“해야죠.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누이 말도 좀 눈에 안 띄는 거로 바꿔야 할지도.”

“어쩔 수 없지 뭐.”

길길이 날뛸 것 같아 조심스레 떠본 연수는 쉽게 수긍하는 공숙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쉽지 않아요?”

“아니. 어차피 뚱뚱해져서 둔해졌는데 뭐.”

“다음에 또 좋은 백마로 구해줄게요.”

“응.”

한참을 말을 달리던 중 공숙이 생각났다는 듯 물어왔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

참 빨리도 물어본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는 연수였다.

“사천을 지나 섬서와 하남을 가볼까 해요.”

“하남? 소림을 찾게?”

“역시 무리일까요?”

“아무리 너랑 나라도 이런 시기에 괜찮을까?”

“저도 그게 좀처럼 걱정이네요.”

“변장을 철저히 해야겠다.”

“예. 그런데 웬만한 얼굴은 다 팔려서···.”

공숙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여장은 어때?”

“아!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지, 진짜 하게?”

반쯤 장난으로 꺼낸 이야기를 연수가 진지하게 받자 오히려 당황하는 공숙.

“사천 섬서 하남은 전부 정파가 그것도 명문이 득세하는 곳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아무리 저희라도 위험하겠죠.”

“너처럼 키가 큰 여자가 돌아다니면 눈에 띄지 않을까?”

“품이 큰 치마를 입으면 무릎을 굽혀 키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어요.”

고개를 갸웃하는 공숙.

“치마를 입으면 말타기 힘들던데?”

“못 탈 정도는 아니에요.”

며칠 후 운남을 지나 사천으로 들어가는 갈색 말 두 필의 위에는 하얀 무복을 입은 여인과 푸른 치마를 입고 짙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사천으로 들어온 두 여인은 사뭇 무거운 도시의 분위기에 절로 긴장이 되었다.

마을 곳곳에는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무인들이 돌아다녔고, 무엇보다 주민들의 활기가 전혀 느껴지지를 않았다.

생업을 위해 장사를 하는 주민들부터 마을 곳곳을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위화감이 들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제야 확실히 정사 대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실감 되어 왔다.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네요. 정사 대전.

-그럼. 예전에 우리 사부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정사 대전이 한번 일어나면 죽는 무인만큼이나 민초들도 희생된다고 했어.

-민초들이 왜 죽어요?

-휘말리면 다 죽는대.

-나라에서 가만둘까요?

-글쎄 그 당시는 명 건국 때와 미묘하게 겹쳤다는데 지금은 또 모르지.

-저희는 조심 또 조심해야겠네요.

-응!

-잊지 마세요. 저는 서하공의 수양딸. 누이는 그런 저를 호위하는 호위무사.

-알았어. 아가씨.

마을의 제법 큰 객잔에 들어서자 객잔 안 손님이 가득 차 있었음에도 조용한 분위기가 위화감이 들었다.

-장난 아니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연수는 적당한 요리와 식사를 시키고는 주위로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 속삭이듯 사천의 정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도강언 근처에서 사천의 사파 무인들과 당문의 대대적인 격돌이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파 들이 전멸했고, 도망친 이들 또한 사천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음식을 먹고 조용히 객방으로 올라갔다.

여인의 변장을 하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방 또한 하나만 얻었다.

품에서 얇은 줄 세 개를 꺼내 양쪽 벽에 매달았다.

줄 위로 몸을 눕히는 연수.

“우와 그거 편해 보인다.”

피식 웃은 연수는 면사를 풀었다.

“아무래도 침상이 편하죠. 이런 줄 위가 뭐가 편해요. 노숙할 때는 숲에서 쓸만하겠지만.”

잠시 고민을 하던 공숙은 침상에 철퍼덕 몸을 눕히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문이 사천의 사파 들을 쓸어버린 것 같은데 이 먼 현까지 왜 이리 긴장감이 넘칠까?”

“잘은 모르지만 사천은 정사 대전에서 중요한 거점이에요. 지금이야 정사 대전이 막 시작되었으니 곳곳의 정파와 사파가 격돌하겠지만 곧 사황성과 무림맹을 중심으로 뭉치며 전선을 구축하겠죠. 사천은 사황성이 있는 귀주와 맞닿아 있으니 정사 모두 차지해야 하는 중요한 거점. 하지만 사천에는 당문과 아미파 청성이 있어요. 구파 일 방중 이 파와 오대세가의 일가가 있다 보니 곧 사황성에서 움직일 거로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죠.”

공숙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 사황성에서 사천을 쳐들어오겠네.”

“글쎄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워낙에 속을 알 수 없는 양반이라.”

“누가?”

“누구긴요. 사황성주죠.”

“헛, 너 그러다 그분한테 혼난다.”

짐짓 목소리를 죽이며 엄포를 놓는 공숙이 귀여워 짓궂은 마음이 드는 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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