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그 생각을 왜 못했는지. 그렇겠어. 내 심득을 다시 정리해서···.”
활력을 뿜어내며 당장에 두보의 팔을 잡아끌 기세로 서두르는 무황의 말을 끊으며 두보가 활짝 웃었다.
“이제야 자네답구먼. 불구가 된 몸이다 보니 앞으로 노년은 자네에게 얹혀서 수발을 좀 받아야 할 것인데 그리 어둡게 처져 있지 말게. 나까지 가라앉으니, 누가 보면 자네가 불구가 된 줄 알겠어.”
무황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랬는가?”
“그나저나 연수 저놈은 앞으로 어쩔 생각인지···. 요즘은 방에 처박혀 명상만 하고 있으니 보는 내가 다 답답한 지경이야.”
무황이 애써 지었던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이네만. 이만 저 아이 보내는 것이 어떤가?”
“응? 어디를?”
“어디든. 자네와 같이 있다 보니 계속 살심이 끌어 오르는 모양이네. 왜 아니겠나? 사부를 이리 만들어 놓았는걸. 나 같아도 그럴 것인데. 자네의 모습을 보면 계속해서 살심을 억누르기 힘들 것이야. 오랜만에 다시 만난 사제지간을 찢어 놓고 싶지는 않지만 저 아이를 위해 그만 보내주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두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 아이를 처음 구룡산으로 데려 왔을 때만 해도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조그맣고 귀여운 녀석이었는데···. 겨우 십 년도 채 안돼서 잠시도 품에 품지 못할 만큼 커버렸구먼.”
“청출어람 했으니 최고의 효제가 아닌가?”
“그럼. 청출어람뿐이겠나? 부족한 사문을 이리 일으켜 세우니 효제도 저런 효제가 없지.”
차를 입안으로 한꺼번에 털어 넣고는 무황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 아이에게는 도가의 심결과 정심한 법문이 필요하네. 아니면···. 무림 역사에 남을 대 살성으로 이름을 남길 거야.”
“법문이라면 절이나 소림에서 어찌 볼 수 있지 않겠나?”
“단순한 법문이 아니라 정심한 무리를 품은 법문이 필요해. 반야심공의 주요 심결을 옮긴 경문들을 쉽사리 내어주겠는가?”
“자네가 알려준 심결만으로는 어려운가?”
“글쎄, 그날 저 녀석의 그 흉포한 살기를 보아서는···.”
“좀 더 옆에 두고 보고 싶었을 거만.”
며칠 후 평소와 같이 명상을 끝내고 사부와 산책을 하기 위해 사부가 머무는 의방을 찾자 공숙과 무황, 사부가 모두 모여 연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 모여 계셨네요?”
“이리 와 앉아라.”
평소와 다르게 안색을 굳히고 있는 사부를 보며 연수는 얼른 사부의 앞으로 앉았다.
“연수야.”
“예. 말씀하세요.”
“이 사부는 머지않아 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그럼요.”
누구보다 연수가 잘 알고 있었다.
상승무공인 봉익퇴와 무영심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부의 경지는 그간 앞을 가로막던 벽을 점차 허물어 가고 있었으니까.
“이 친구는 초절정고수지. 지금 강호에 알려진 네 명의 입신경 고수를 제외하면 이 강호에 감히 손을 섞을 자가 열이 채 안 되는 그런 경지다.”
연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왜 이리 거창하게 말하는지 사부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사부의 분위기에 묵묵히 대답했다.
“예.”
“그럼 이제 그간의 회포도 모두 풀었겠다. 갈 길 가거라.”
“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연수에게 사부는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고? 여기서 안주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으냐? 아니면 이 사부가 벌써 네게 짐이 되느냐?”
“그, 그건 아니지만···. 아직 사부의 곁에서 사부를···.”
“됐다. 이 친구를 못 믿는 게냐?”
“하지만! 지난번처럼 독을 쓰는 놈이···.”
“그때는!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한 것뿐이다. 놈들로서는 만 번에 한 번 있을까 한 행운이었고 우리에게는 불운이었을 뿐. 설마 이 친구가 한번 당한 수에 또 당할까 봐?”
“사부! 저는···.”
“그만! 장성한 놈이 언제까지 사부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려고! 설마 이 사부가 불구가 되었다고 동정하는 게냐?”
“그런 게 아니잖아요! 사부!”
두보는 연수의 어깨에 하나 남은 손을 올리며 연수와 눈높이를 맞췄다.
“연수야. 이 사부는 걱정이 된다. 훌륭히 고수가 된 네가 드디어 이 별 볼 일 없던 사문을 빛낼 네가 살성으로 이름을 남길까···. 내 손으로 천하에 악명을 떨칠 살성을 키워낸 것이 아닐까 두렵구나. 초절정의 경지. 현 강호에 열을 넘지 않는다는 그 경지가 눈앞에 있다. 지금 이러고 사부와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느냐? 알고 있느냐? 무림 역사상 가장 빨리 그 경지 달한 무인이 이립이다. 너는 그 전에 그 경지에 발을 디뎌 강호를 내려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부 보고 싶구나. 완전해진 내 제자. 변장 따위 변성술같은 하찮은 짓거리 하지 않고 강호를 활보하며 이 사부에게 다가오는 네 모습을 보고 싶다.”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이 연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부···.”
“가거라. 가서 다음에 올 때는 이 사부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당당한 족적을 남기며 나를 찾아오너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연수는 벌떡 일어나 사부와 무황에게 절을 하고는 그길로 의각을 떠났다.
공숙이 어색하게 무황과 두보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데 그런 공숙의 귀로 두보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 아이를 잘 부탁하네.
뒤로 돌아 고개를 끄덕이는 공숙.
전에 묶었던 객잔을 찾아가는 연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괜찮아. 사부도 무사하시고, 저분이 곁에 있는 한 걱정 없을 거야.”
“예···.”
풀이 죽어 있는 연수의 등을 두드리는 공숙.
한 달도 넘게 있다가 찾아온 연수와 공숙을 보며 객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야 오셨소?”
다분히 나무라는 듯한 말투에 연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더 기다려 보고 찾아오지 않으면 맡겨놓은 말들을 팔까 생각했소. 먹는 양도 많은데 그 값을 치를 주인들은 감감무소식이니.”
“아, 그랬군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다급한 일들이 있어서.”
그 말을 듣는 객주의 눈이 반짝였다.
“혹여 말이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소?”
연수와 공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객주를 바라보자 객주가 절룩이며 객잔의 입구 앞에 서서는 객잔 밖으로 표창을 던졌다.
표창에는 작은 구멍이 뚫린 나무가 달려 있었는데 표창이 날아가며 뚫린 구멍으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휘이이이익~!
나무에 가서 박히기 전까지 긴소리를 울린 표창. 그 소리와 동시에 객잔 밖과 안에서 회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핏 보아도 오십여 명이 넘는 고수의 수였다.
다리를 절룩이던 객주가 입을 열었다.
“네놈들이 사라지고 큰 사달이 났다. 네놈들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들어야 할 말이 많아.”
객주를 제치며 회색 무복에 검은 장포를 걸친 풍채 좋은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좋게 말로 할 때 소상히 털어놓거라. 관계가 없다면 좋게 놓아 줄 것이다. 지영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고개를 푹 숙인 연수의 얼굴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현 상황에 모든 걸 포기한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연수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영문이라고···. 당신 누구지?”
몇몇 지영문의 무사들이 예의 없는 물음에 몸을 들썩였지만, 중년인은 손을 들어 그들을 자제시키며 입을 열었다.
“지영문주. 호탁도라고 한다. 내 이름을 걸고 다시 한번 약속하지. 그러니···.”
지영문주의 말을 딱 끊으며 고개를 든 연수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아! 생각보다 어렵네. 이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수를 살피던 공숙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잘 참았어!”
장내에 무인들은 이해가 안 되는 행동과 말을 하는 두 남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참지 못한 객주가 절룩이며 앞으로 나섰다.
“이놈들! 이 분이···.”
“입 좀 다물어봐. 자꾸 종알거리면 진짜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말을 마치는 연수의 눈빛에 객주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한때 강호의 풍파를 뚫으며 무인으로서 살아왔던 자신으로서도 본 적이 없는 두려운 눈이었다.
“후우. 습-하 습-하. 내가 말이야. 사정이 있어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중이거든. 당신들 참 운 좋은 거야. 장문인이라고 했지? 오른손잡이 맞네. 그 오른팔 놓고 가. 그럼 목숨은 살려줄게.”
“뭣?!”
-챙 챙 챙!
주변 사방에서 검 뽑는 소리와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습관적으로 손목을 빙글 돌리다가 멈칫하는 연수.
“흠. 당분간 이건 봉인해야겠네.”
평소와 다르게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앞무릎을 굽히는 앞굽이 자세를 취하는 연수.
“실전에서는 처음 써보는데 좋은 연습 상대구나.”
연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이 붉게 물든 지영문의 문주 호탁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쳐라! 꿇려서 데려와!”
순간 오십여 명의 회색 무복을 입은 인영들이 공숙과 연수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적수공권과 검이 만나면 당연히 검이 유리하다.
날붙이를 맨손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거리가 맨손보다 반장은 더 긴 검이다.
그런 검을 든 무인 오십여 명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온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곧 검에 난자된 적수공권의 사내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갈 것이다.
하나 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수는 유려하게 움직였다.
물결처럼 부드럽게 달려드는 무사들의 인파 속으로 파고들며 달걀을 쥔 것 같은 연수의 주먹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의 인영이 파공음과 함께 날아갔다.
-팡! 콰장창!
날아간 무사하나가 객잔 내의 집기를 부수며 떨어졌다. 부들부들 떨며 간신이 숨을 이어가는 것이 죽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달려든 연수와 다르게 채찍을 휘두르며 한 장 간격으로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지 않은 공숙의 왼손이 휘둘릴 때마다 좁은 객잔 안을 붉은 독장이 수놓으며 무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수많은 인영이 여기저기서 검을 쑤셔대고 있었지만, 연수의 시야에는 그들의 검로와 움직임이 하나의 커다란 흐름처럼 보였다.
각기 다른 개체가 아닌 커다란 물결처럼 보이는 흐름을 피하고 밀어내며 착실히 지동권을 수련하듯 손을 뻗는 연수.
마치 불어오는 산들바람 결을 손으로 느끼듯 부드러운 손짓.
하지만 그 손짓에 적중당하는 이들은 단전이 깨져 나가며 치명상을 입고 무인의 생명을 마감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공숙과 연수의 손에 절반 가까운 무인들이 쓰러지자 호탁도가 몸을 날렸다.
“이놈! 내가 상대해 주마!”
호탁도가 일 검을 뻗으며 날아들자 자연스럽게 끓어 오르는 살심에 부드럽고 유려하던 연수의 움직임이 거칠게 변했다.
코앞에서 검을 휘두르던 무사의 팔이 그런 연수의 주먹질에 날아가 버렸다.
"크악!"
팔을 잃은 무인의 비명소리와 동시에 호탁도의 검면을 주먹의 등으로 후려치는 연수.
날아들던 호탁도의 신형과 함께 검이 휘청이며 뒤로 물려졌다.
호탁도는 정신이 없었다.
절정이라는 경지에 오른 이후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곤륜의 속가제자로 운남에 지영문을 세운 후 삼대가 이 지영문을 키워왔다.
이제는 운남에서 든든한 곤륜의 기세를 받아 무서울 게 없을 정도의 문파로 거듭났다.
운남뿐 아니라 강호 어디를 가더라도 지영문주로서 절정고수로서 한대를 받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단 일수에 적수공권의 젊은이에게 낭패를 보다니 치욕적이었다.
게다가 끌고 나온 지영문의 주요 고수가 반절이나 쓰러졌다.
만약 이 고수들을 모두 잃는다면 지영문은 정사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 정세에서 앞날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이놈!!!”
피를 토하듯 악을 쓴 호탁도가 휘청이는 신형을 바로 잡으며 달려들었다.
주위의 무사들과 함께 지쳐 드는 호탁도의 검이 흔들리듯 하더니 검영을 늘려나갔다.
순식간에 연수의 앞을 가득 채우듯 늘어난 검영의 뒤로 호탁도와 지영문 무사들의 입매가 비틀렸다.
도무지 틈이 없어 보이는 검영안으로 연수의 손이 쑥 뻗어졌다.
“헛!”
-파팟!
호문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저 젊은 놈은 팔이 아깝지 않단 말인가? 아니면 잘린 팔이 도마뱀처럼 쑥쑥 자라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도 아니면 설마 자신의 검이 모두 보인단 말인가?
‘말도 안 돼!’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 젊은 놈은 손을 뻗어 자신의 검영을 뚫고 피륙의 상처도 없이 자신의 가슴을 노려 왔다.
검 손잡이를 비틀어 막고 일장을 뻗어 밀어내기는 했지만 막아낸 검을 쥔 오른손이 찌릿찌릿 아려와 검을 놓칠 것 같았다.
이제야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며 긴장감이 몰려왔다.
자칫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피땀을 흘려 쌓아 올려온 지영문이 끝장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제야 분노로 놓쳤던 연수와 공숙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모두 밖으로! 밖으로 나와!”
무사들을 이끌고 객잔 밖으로 나와 잔뜩 긴장한 채 진을 펼치는 지영문도들.
그들을 쫓아 여유 있게 걸어 나온 공숙과 연수.
귀찮은 표정으로 객잔에 널브러진 시체들과 무인으로서 삶이 끝난 무인들을 돌아본 연수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팔 하나로 끝내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