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천살지체라니?!”
사부의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무거운 무황의 음성이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천무지체와 비슷하지만, 살성의 팔자를 타고난다는 무체일세.”
“그, 그런!”
“천살지체는 무공을 익힐수록 정이 앞서며 백회가 먼저 열리네. 무인으로서 맨 마지막에 열려야 할 백회가 제일 먼저 열리며 살심이 백회로 흘러 들어가게 되면 발현된다는 살성의 빛이 눈에 어리게 되네.”
그때 공숙이 손뼉을 짝하고 쳤다.
“아! 그래서 연수의 눈이 빨갛게 변하는 건가요?”
“예? 제 눈이 빨갛게 변해요?”
“응. 너 어제 싸울 때 눈이 점차 새빨개지던데?”
무황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어제 계속해서 그대로 폭주했다면 강호에 희대의 살성이 출현했겠지. 오로지 살인만을 추구하며 모든 무인을 죽이는데 일생을 바칠 살성.”
“그, 그건 순 미친놈이잖아요?”
연수의 말에 무황이 두 눈을 감았다.
“백회가 열린다는 것은 그토록 위험한 일이다. 하다못해 마공을 익혀 마기가 골수에만 닿아도 괴팍한 마인이 되는데, 하물며 진한 살기가 백회를 파고들어 가면 당연히···.”
뒷말을 다 잇지 못하는 무황을 보며 연수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럼 저는···.”
“방법이 없는 건가? 방법이 있을 것 아닌가?”
무황이 연수의 양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내 어제 할 수 있는 한 너의 백회를 닫아놓았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것뿐이다. 결국은 너에게 달렸다. 살성의 재능에 기대지 말아라. 이리 말해도 너에게는 와 닿지 않겠지만 백회를 자꾸 열려는 너의 정에 기대어선 안 된다. 절정의 경지가 되고도 기와 신이 따라잡지 못한 너의 정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래도 백회가 열리거든···. 또 살심과 함께 무리가 떠오르거든···. 명문의 도경과 법문을 훔치거라.”
“예?”
연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황으로부터 무언가를 훔치라는 이야기를 들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었다.
“열린 백회로 정심한 도가나 불가의 기운을 밀어 넣어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너는 살성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살심이 치솟을 때마다 내가 가르쳐준 심결을 외며 살심을 억누르거라.”
“그럼···. 싸움도 살인도 피해야 합니까?”
“얼마든지 싸우고 죽여도 상관없으나 살심에 사로잡히지도 기대지도 말아라.”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으며 혼란스러운 것이 그대로 표정으로 드러나자 그런 연수의 얼굴을 본 무황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초절정. 그때까지만 잘 버텨라.”
초절정이라는 말에 사부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초절정! 연수가 말인가?”
무황은 복잡한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머지않았을 게야. 아마 스스로 느끼고 있겠지. 무인으로 완성되는 경지인 초절정. 그때면 싫어도 정기신의 조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단 절대 그 벽을 살성의 재능에 기대 넘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무황의 조언에 연수는 고개를 숙이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예.”
어제의 싸움 이후 사부의 생사가 다급하여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무리를 깨달았다. 특히나 기사를 더 압축하여 단검에 두르던 수법은 단 몇 수만에 검기를 두른 절정고수의 검을 망가트렸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기의 감각으로 만들어낸 그것이 발전하면 검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만 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지금도 몸에 남아있는 완성된 자신만의 단검술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앞에 모든 검로가 보였다.
“깨달음을 정리하는 것은 좋다만 항상 경계하거라. 특히나 어제 보였던 그 살기가 짙은 단검법은 조심히 사용하거라. 너의 살심을 자극할 것이 분명하니.”
“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연수는 기막을 거둬들이며 의원들을 불러 사부의 몸을 살피게 했다.
이곳에 사부를 모신 지 열흘이 지났다. 이제는 병상을 털고 일어나 가벼운 산책도 가능한 사부였다.
하루 대부분을 정원각이라 불리는 이 커다란 의각을 중심으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적을 감시하던 연수에게 제일 즐거운 시간은 사부와의 산책 시간이었다.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며 사부를 웃게 만들어 주는 이 시간은 연수에게는 마치 먼 여정을 끝내고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듯한 안정감을 주었다.
“하하하 그래서 그놈을 두드려 패주었다는 게냐?”
“예. 한 열흘은 꼼짝 못 하게 눕혀 주었죠. 그랬더니 그 대장이라는 양반이 불러서는···.”
이어지는 연수의 이야기에 사부가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놈 낯짝이 눈에 선하구나. 하긴 그런 놈이었지.”
“그 양반 사부도 아세요?”
“강진령의 집에 머슴살이할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지. 어린 나이에 무장으로 이름깨나 날렸던 놈이야. 그때도 곧디곧은 것이 저러다 부러지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출세는 못 했구나.”
“예. 천상 군인이던데요?”
“그래서 결국 훔쳐냈구나? 강가쾌련창법.”
“예! 제가 알려······.”
엄지 하나 남은 왼손을 들어 보이는 씁쓸한 사부의 얼굴을 보며 연수의 가슴 깊은 곳에서 한줄기 살심이 꿈틀댔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영문과 곤륜을 짓밟아 뭉개 버리고 싶은 마음이 끌어 올랐다.
“후우.”
살심을 가라앉히며 두 눈을 감고 심결을 외는 연수.
잠시 후 눈을 뜬 연수가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사부 손을 못 쓰면 어떻습니까? 제가 황궁 무고에서 훔친 무공을 가르쳐 드릴게요.”
“무영심공 말고 다른 무공이 또 있었느냐?”
“그뿐이려고요? 암동이라는 잠행술을 훔쳐 배웠는데 아주 쓸만해요.”
말을 마친 연수의 신형이 흐릿해지기 시작하자 두보의 눈이 커졌다.
대낮임에도 존재감이 옅어지며 마치 허깨비 같은 연수의 신형을 보니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다.
그런 연수의 신형이 순간 흔들리며 사라졌다.
“쓸만하죠?”
어느새 옆으로 와 말을 거는 연수 때문에 깜짝 놀란 두보.
“대단하구나.”
“이건 별거 아니에요. 이것보다 사부에게 딱 맞는 무공이 있어요.”
두보의 팔을 잡아끌며 의방의 앞에 넓은 앞마당으로 온 연수는 사부를 툇마루에 앉혀두고 마당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사제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던 공숙과 무황까지 나와서 연수가 무얼 하는지 구경했다.
“사부 잘 보세요.”
뒷짐 지고는 다리를 쭉 뻗어 올려 얼굴 옆에 붙이는 연수.
“봉일각타!”
-쿵!
우렁찬 외침과 함께 올라갔던 다리가 땅으로 떨어지며 진각을 밟는 연수.
그 반동으로 허공으로 떠오른 연수의 몸이 뒤집히며 그 무게를 실은 반대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후웅
“구연참각!”
연수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아홉 번 휘둘러지자 사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둘리는 한번 한 번의 힘을 이용하여 몸에 중심을 잡으며 다음 공격을 잇는 것이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도무지 다음 공격을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철령환퇴!”
이번에는 땅을 살짝 밟고 뛰어올라 강력한 일격을 그대로 찍어 내리는 내려찍기의 초식이었다.
그런데 쭉 내려 찍히던 연수의 뒤꿈치가 마치 환상처럼 불어났다.
몸은 분명 하나 이것만 한쪽 다리가 아홉 개로 불어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던 사부의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연수의 시연은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봉황일갈!”
-콰콰쾅!
허공으로 다섯 번의 발을 차며 공중으로 떠오른 연수의 몸이 뒤집히며 땅을 향해 일곱 번의 발차기를 하자 그의 발끝에서 맺혀나온 기운이 땅을 향해 날아가며 커다란 앞마당으로 떨어졌다.
뭉게뭉게 먼지구름이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있는 두보를 보며 씩 미소를 지은 무황이 슬쩍 손을 흔들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앞마당을 꽉 채운 먼지구름을 날려 버렸다.
두보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앞마당에는 깊이가 한 장은 넘을 것 같은 구덩이가 여러 개 파여 있었고 그 뒤로 연수가 밝게 웃고 있었다.
“대, 대단하구나.”
절정고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한없이 뿌듯했지만, 그 무위를 실제로 보고 나니 이제야 연수가 고수가 되었다는 실감이 되었다.
“장하다! 장해! 내 제자 장하다!”
눈가가 붉어지며 칭찬하는 사부를 보자 쑥스러웠는지 연수는 손으로 코를 문지르며 사부에게 달려왔다.
“사부 이 봉익퇴를 익히면 사부도 금방 이리 될 거에요.”
두보의 무위는 일류의 과도기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곤륜의 일대 제자들과 비슷한 경지였다. 절정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단계.
그런 상황에서 불구가 되었으니 무인으로서는 절망적인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강호에 불구 고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손이 없으면 팔이 있고 팔이 없으면 다리가 있다.
암수검과 암기를 주로 쓰는 두보였지만 그런 두보의 제자인 연수가 봉익퇴만으로 이만한 무위를 보여주자 놓았던 무인으로서 삶의 끈을 다시 잡을 수 있는 두보였다.
“이것 말고도 천리견보를 여러 경공서를 참고하여 바꾸어 놓았으니 경공이 떨어질 일도 없습니다. 또 대장간에 사부의 왼손에 장착할 수 있는 단검이 달린 장갑도 만들라 일러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게다가 만약 누가 사부를 멸시한다면···. 제가 다 죽여 사부의 권위를 세울 거에요. 장수무투의 제자 암수일살이 있는 한 감히 사부를 멸시할 수 있는 놈은 없어요.”
말을 마치는 연수의 주위로 살기 어린 기운이 휘돌았다.
“어허, 이놈아 살심을 누르거라.”
옆에서 듣고 있던 무황이 끼어들어 연수를 나무랐다.
잠시 살심을 흩어놓은 연수가 씩 웃으며 사부를 보았다.
“금방 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이실 거에요.”
사부는 환하게 웃으며 연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고맙다.”
그렇게 열흘이 더 지났다.
연수의 기우처럼 사부와 무황을 노리는 무인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하기는 초절정고수와 절정고수가 지키고 있는 곳을 정사 대전이 발발한 정신없는 와중에 신경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곤륜에는 알려진 초절정 고수가 없다.
곤륜의 마지막 초절정고수는 무황이었으니까.
그동안 사부에게 봉익퇴와 독자적으로 보완한 천리견보를 가르쳐준 연수.
오늘도 평소와 같이 명상으로 그간의 깨달음을 정리하며 무리를 정리하는데 주뼛거리는 기척이 느껴져 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의각의 주인이자 이 마을에서 유명한 중년의 의원이 어색한 웃음으로 연수를 맞았다.
“무슨 일이오?”
“저, 그것이···.”
“할 말이 있으면 편히 하시오.”
“환자의 병세도 완화되어 거동에 불편도 없고 하니···.”
거동의 불편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의각의 커다란 앞마당을 차지하고 무공수련을 할 정도였으니 완치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제야 중년인이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수는 공숙에게 받은 소령도를 품에서 꺼냈다.
갑작스레 단도를 꺼내 드니 의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 제가 실언을···.”
소령도의 검집 중간에 박힌 영롱한 붉은 빛을 내뿜는 보석을 떼어 의원의 손에 쥐여 주자 의원이 어찌할 줄을 모르며 의문의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제 사부님을 치료해주시고 그간 저희 때문에 불편을 겪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둔해서 성의 표시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네요. 가져다 파시면 금자 기백 냥은 받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이상 받고도 남을 정도의 보석이었다.
의원의 입매가 찢어지며 연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언제까지고 편히 쉬고 천천히 가십시오.”
인사를 한 의원이 도로 뺏길까 봐 꽁지가 빠지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잠시 보던 연수는 의각을 둘러보았다.
강진령의 장원보다는 작았지만, 이 근방에서는 제법 큰 장원이었다.
운남과 사천에서는 의술로 가장 유명한 의원이었으니 이 정도야 당연하겠지만 의원들 사이에서는 돈만 밝히며 의술을 파는 이로 악명 또한 자자한 의원이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명상을 이어가는 연수.
두보와 조용한 의방안에서 차를 마시는 무황은 불편한 손끝에 작은 갈고리를 달아 엄지와 갈고리로 불안정하게 찻잔을 드는 두보를 보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런 무황의 심기를 읽었을까? 두보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엄지라도 남아있어 천만다행이 아닌가? 아니었으면 차 한 잔 제대로 못 마셨을 거야.”
“내가 부족···.”
“이 친구야, 언제까지 그럴 건가? 애초에 내 업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어디 이래서야 자네와 지낼 수 있겠어?”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무황.
“허허 갑갑한 친구 같으니라고. 정 그리 미안하면 어떻게 내 무공이나 봐주던지. 차는 어찌어찌 마시겠는데 이 엄지 하나로 밥 먹기가 어찌나 힘이든지···. 절정만 되어도 허공섭물로 한결 생활이 편해 질 것 같은데.”
그제야 고개를 들며 눈을 빛내는 무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