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83화 (83/202)

# 83화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은 사내에게 공숙이 재촉했다.

“그거 나 달라고.”

“이게 뭔지 알면서 이걸 달라고?”

“응.”

“단순한 영약이 아니다. 맹주의 벌모세수가 없으면 공연히 먹어봤자 본래의 내력을 잃을 뿐일 텐데···. 뭐에 쓰려고?”

“에? 왜?”

“원래 그런 물건이니까.”

“쳇 쓸모없는 거네. 그럼 그 단검 줘.”

사내는 품에 넣어놨던 소령도를 꺼내어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이리된 일 그 어떤 효력도 없는 보검일 뿐이었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단검을 던졌다.

단검을 받은 공숙이 활짝 웃으며 방방 뛰었다.

“진짜 주는 거야?”

“그래.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큰 낭패를 봤을 테니.”

“아자!”

단검을 뽑아 들자 영롱한 묵색의 검신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강호에서 함부로 쓰다가는 언제 어디서 칼 맞을지 모르는 물건이다.”

“걱정 마. 녹일 거야.”

“녹인다고?”

“응.”

사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령도는 무림 맹주의 상징이자 애검인 태령검과 한 짝으로 만들어진 단도였다. 그런 보물을 녹인다니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두 짝 나오겠네.”

소령도의 두께와 검신을 살펴본 공숙의 말에 사내는 더는 공숙을 상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몸을 돌려 돌아가는 사내의 등 뒤로 공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사내는 대답 없이 손을 대충 흔들었다.

‘처유희의 제자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건가?’

사내의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의 가슴 깊숙이 남아있었다.

격전이 치러지던 곳으로 사내가 돌아오자 사황성의 고수들이 곳곳에서 돌아오며 사내에게 보고했다.

“도주하는 비익 대원 셋 모두 척살했습니다.”

“둘 척살했습니다.”

“.....”

모든 무사가 돌아오자 사내의 입이 열렸다.

“대주는 보고하라.”

사내의 말에 중년의 우람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예! 대원중 부상 여덟 사망 아홉. 상대 비익 대원 추적결과 모두 전멸시켰습니다.”

“확실한가?”

날카로운 사내의 눈빛에 중년인은 몸에 두른 쇠사슬을 꽉 쥐며 대답했다.

“예! 다만···.”

중년인은 연수와 무황의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곤륜의 도사를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기다려 보지.”

“예!”

사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연수와 무황을 지켜보았다.

격전을 치를 당시에는 자신조차 연수에게서 퍼져나오는 살기에 등골이 오싹했다. 얼핏 살펴본 연수의 무위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아니 마치 일대 종사를 보는 듯한 한없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초식에 아찔한 느낌마저 받았다.

‘대체, 저놈은 뭐 하는 놈일까?’

암수일살이라는 놈이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암살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걸출한 살수가 출현했다고 생각했었다.

성주에게 암수일살이 장수무투의 제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언뜻 이해가 안 되었다. 장수무투가 명문의 무공을 훔치기는 했지만 대단한 고수는 아니었기에.

오늘 그를 직접 본 그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사파에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는 열 손가락 안에 모두 꼽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성주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모든 무공을 성주에게 사사 받았다. 성주의 권력은 나눠 받지 못할지언정 성주의 검으로서 무공만큼은 아낌없이 물려받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아직 이립도 못된 애송이가 이처럼 대단한 무위라니.

강호에 기인이 모래알만큼 많다던 이야기가 뼈저리게 공감되었다.

공숙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무황에게 붙잡혀있기를 한 시진.

무황이 손을 놓아주자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는 연수였다.

“헉···. 헉···. 헉.”

“지금은 긴말할 틈이 없다. 따라오거라.”

무황의 신형이 두보의 옆으로 나타나며 연수의 앞에 있던 잔상이 흐려졌다.

지켜보고 있던 사황성의 무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연수는 잠시 사황성의 무인들을 둘러 보고는 몸을 날렸다.

“갑시다. 누이.”

공숙은 지풍을 쏘아내 도사의 혈을 짚고는 옆구리에 끼고 몸을 날렸다.

사라지는 연수 일행의 등 뒤로 사내의 외침이 들려왔다.

“언제고 사황성에 들르거라!”

대답 없이 사라지는 연수를 아쉽게 바라보던 사내가 표정을 정리하며 특유의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돌아간다!”

-예!

두보는 무황의 품에 안겨 하나 남은 왼손을 무황의 가슴에 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 연수는···. 괜찮은가?”

“걱정하지 말게. 자네 몸이 더 심각하니. 말할 기력도 아껴.”

마을로 내려온 무황은 마을에 제일 큰 의원 담을 넘으며 내력을 실어 외쳤다.

“의원은 나오거라!”

쩌렁쩌렁 울리며 큰 장원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우렁찬 소리에 중년의 의원과 그의 제자들이 자다 말고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할 게다!”

의방에 몸을 눕힌 두보를 살펴보던 의원이 제자들과 눈짓을 주고받고는 치료를 시작했다.

무서운 눈을 치켜뜨고 모든 치료를 지켜보는 무황의 눈치에 의원의 제자 몇이 손을 벌벌 떨자 다가온 연수가 무황의 팔을 잡아끌었다.

“노야···. 방해가 될듯싶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기세가 은연중 세어 나왔음을 깨달은 무황이 연수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공숙이 그제야 의원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그런 공숙의 옆구리에는 몸이 굳은 젊은 도사가 들려있었다.

바닥에 철퍼덕 소리가 나게 도사를 던진 공숙.

“이놈 어떻게 할까? 내가 죽일까? 네가 죽일래?”

젊은 도사를 보는 연수의 가슴에서 강력한 살심이 들끓었다.

“이놈! 살심을 가라앉혀라!”

무황의 노성에 연수는 두 눈을 감고 살심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런 연수를 잠시 살핀 무황은 도사에게로 다가갔다.

“일대 제자겠지?”

혈도를 제압당한 영환의 동공이 흔들리자 무황은 손을 털어내듯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한 가닥 바람이 영환의 몸을 쓸고 지나가자 제압당한 혈이 해혈되었다.

“헉! 다, 당신은···. 누구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영환에게 바짝 다가선 무황이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너희 장문에게 전해라. 한 번만 더 나를 뒤쫓고 내 가족을 건드리면 무황이 곤륜을 찾을 것이라고. 내가 곤륜산에 발을 내디디면 곤륜은 멸문할 것이다. 모든 은원을 잊고 사는 나를 찾지도 건들지도 거론하지도 말라 전해라. 강호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짊어지고 떠난 나를 더 건든다면 내가 강호로 나설 것이고 내 검이 곤륜을 향할 것이라고 전해.”

“서, 설마······. 곤륜무황······.”

“가라.”

살심을 겨우 억누른 연수가 두 눈을 떴다.

“노야···.”

“미안하다. 이번만 내 말을 따라주거라.”

“저놈을 살려 보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만···.”

사부가 누워있는 의방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연수를 보며 무황은 연수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걱정 말아라. 다시 한번 두보와 내게 검을 내미는 자가 나타난다면 내 마지막 남은 곤륜의 정을 끊어낼 것이다.”

무황의 기세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곤륜이 망하든 무황이 죽든 둘 중 하나는 사달이 날 것이다. 곤륜이 무황을 막아내더라도 멀쩡할 순 없을 것이다.

연수는 말없이 돌아서는 무황의 등을 잠시 바라보더니 젊은 도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뭐해? 꺼져.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동공이 풀린 영환은 주춤주춤 일어나 의원의 담을 넘어 사라졌다.

공숙의 걱정스러운 전음이 들려왔다.

-내가 가서 처리할까?

-아뇨. 저놈이 돌아가는 것이 사부가 더 안전할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공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방을 바라보는 연수의 등을 토닥였다.

“걱정 마. 꼭 회복하실 거야.”

“예. 꼭 그러실 거에요.”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가만히 의방만을 바라보는 세무인.

멀리서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의방에서 잔뜩 긴장한 중년의 의원이 나왔다.

“어떤가? 살 수 있겠는가?”

무황의 다급한 목소리에 의원이 눈을 내리깔고 착잡하게 입을 열었다.

“잘린 오른팔의 절단부가 곪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무인이라면 회복해 낼 수 있을 겁니다. 잘린 왼쪽 손가락 네 개도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문제는 옆구리 깊게 나 있는 검상입니다. 대맥까지 상해서 최선의 조치는 취했습니다만 오늘이 고비일 겁니다. 오늘만 넘기신다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뒷말을 흐리는 의원을 보며 연수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풀썩 주저앉은 연수가 의원의 다리를 붙들었다.

“의원님!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다 드리겠습니다. 돈이든 보물이든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저분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땅에 이마를 박으며 애걸하는 연수의 모습에 의원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연수를 말리며 의원이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러지 마시오.”

무황까지 나서서 말리고 들자 어느 정도 진정한 연수는 방으로 들어서며 사부의 맥을 짚었다.

역시나 대맥이 상해서 기운의 순환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의원이 내상에 좋은 탕약을 먹였지만 단번에 좋아질 만큼 만만한 내상이 아니었다.

고민을 하던 연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사부의 단전에 장심을 가져다 대었다.

무영심공을 익혔지만, 대영심공과 궤가 같으니 일단은 사부의 내상을 다스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장 망설여지던 부분은 현재 알 수 없는 살심으로 인해 자신의 내기가 얼마나 사부의 내력에 반발 없이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자칫 지금 사부의 상태에서 내력의 충돌이 벌어질 때 사부는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고 돌아가실 것이 분명했다.

막 내기를 불어 넣으려다 말고 손을 떼는 연수.

역시나 사부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의원만 믿고 있기에는 사부의 내상이 너무나 심각한 상태였다.

한참을 더 고민한 연수는 다시 장심을 가져다 대며 조심스레 내력을 불어넣었다.

'부디 굽어 살펴주소서.'

미약한 내기가 단전으로 들어오자 사부의 내기와 큰 반발 없이 자연스럽게 통했다.

‘됐다.’

그때부터 사부의 내기를 조심히 이끌며 손상된 대맥과 양문혈의 끊어진 경락을 회복시켰다.

진신내력까지 쏟아내어 대맥을 잇고 끊어진 경락을 회복시키자 점차 사부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위기는 넘겼지만, 연수는 그대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대영심공과 무영심공은 궤를 같이하지만, 전혀 다른 공능을 갖고 있다.

무영심공은 대영심공보다 모든 면에서 상승의 심공이지만 특히나 대영심공에서 부족한 요상의 공능이 뛰어났다.

조심스럽게 회복된 기혈을 따라 무영심공의 구결대로 내력을 돌리기 시작하자 사부의 단전에서 대영심공의 내력들이 호응하듯 일어나 연수가 이끄는 대로 돌기 시작했고, 그렇게 세 시진쯤 지나자 대영심공의 기운들이 점차 무영심공의 내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두 눈을 번쩍 뜨는 두보.

눈을 마주친 사부의 목을 부드럽게 받쳐 밀자 자연스럽게 가부좌를 틀고 앉는 사부였다.

단전에 있던 손을 자연스레 등으로 가져다 대며 심결을 외워 주기 시작하자 사부의 눈이 스르르 감기며 두 사제를 중심으로 한차례 바람이 휘돌며 의방에 있던 물건들을 흔들었다.

공숙과 무황은 기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수가 손을 떼자 사부는 혼자서 무영심공을 운기 하며 운공에 빠져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연수의 어깨를 무황이 두드렸다.

“장하다!”

“후우, 다행히 제 심법과 궤가 같아 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도우셨어요.”

해가 지고 달이 뜬지 한참이 지나자 사부의 눈이 떠졌다.

“미안하구나.”

고개를 떨군 채 연수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부였다.

“미안하긴요. 살아주셔서 고마워요. 사부.”

“스승이 되어서 제자의 내공이나 빨아 먹다니···.”

“사부가 없이 감히 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깟 내공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에요. 한 줌도 안 되는 그 정도야 얼마든지 더 퍼드릴 수 있어요.”

연수의 말에 사부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광경을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던 의원과 그의 제자들은 신속히 움직이며 탕약을 들이고 사부를 진맥을 했다.

“경과가 좋습니다. 곪은 상처와 검상의 치료만 지속해서 한다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하나 남은 왼손을 들어보는 사부를 보며 무황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됐어. 겨우 손가락 네 개로 자네를 살렸으면 싸게 먹힌 거지.”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찾아오자 부담스러웠는지 사부가 연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찌 된 일인 게야? 무슨 마공이라도 훔친 게야?”

“그, 그게···.”

연수는 의원들을 물리고는 주위로 기막을 치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풀어 놓았다.

“이게 무영심공이구나!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일이···.”

무황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정이 너무 앞선 결과야. 애초에 정기신의 조화가 무너진 놈이 너무 단기간에 성장하다 보니 정이 앞서다 못해 백회까지 열어 버렸네. 차라리 강호에 나서지 않고 계속 수련만 했다면 참 좋았겠지만, 살인을 하며 살기가 백회로 조금씩 흘러 들어갔네. 아마도 최근 살심이 깊어지며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겠지.”

무황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확히 그러했습니다.”

“하아, 백회가 열릴 정도의 재능이라니 본적은 없다만 들은 적은 있다. 천살지체.”

그 말에 사부의 눈이 커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