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77화 (77/202)

# 77화

방으로 돌아온 공숙이 입을 열었다.

“괜찮을까?”

“글쎄요. 뭐 됐어요. 여차하면 그놈 모가지 따고 도망가죠.”

“응? 너 조금 이상하네?”

“예?”

공숙은 평소보다 과격해진 연수의 느낌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뭐랄까···. 평소와 좀 달라서.”

“아, 그냥요. 정파 놈들 득세하는 곳에서는 몸 사리느라 조심했지만 같은 사파인 동네에서까지 별 무지렁이 같은 새끼가 지랄을 하니까 짜증이 좀 나네요.”

“그래. 잘 생각했어. 여차하면 다 죽여버리면 되지.”

“그, 그건 아니고요.”

말을 마친 연수는 문득 요즘 들어 살기가 짙어진다는 자각을 하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자각하고 돌아보니 무언가 변한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특히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언제부터인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사람을 베면서 어떤 죄책감이나 주저함도 느낄 수 없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연수.

공숙은 공숙대로 그런 연수를 보며 골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다르기는 한 것 같은데···.”

“뭐 됐어요. 어떻게든 되겠죠. 먼저 운기 하세요.”

“응.”

번갈아 운기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둘.

우려와는 다르게 지난밤 무사가 동료들을 이끌고 연수를 찾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 길을 떠나는 연수와 공숙.

잠이 덜 깼는지 말 위에서 연신 하품을 하는 공숙을 보며 연수가 전음을 보냈다.

-누이 독과 해약은 다 만들어 놨어요?

-응. 전오독과 지사독 만들어 놨어.

-수고했어요.

-구사천독전 중에 절독이 꽤 있는데 왜 이런 독을 써?

-절독은 여러모로 쓰기 불편해요.

-그런가?

며칠을 더 말을 달리며 길을 재촉하는데 저 앞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마주 달려오는 큰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말의 속도를 줄이며 관도 옆으로 비켜주는 연수와 공숙.

그런 둘을 스치듯 지나가는 휘황찬란한 마차.

‘응? 저 문양···. 어디서 봤더라?’

연수는 큰 마차 옆으로 새겨져 있는 문양을 보고는 생각이 날듯 나지 않자 답답했다.

뿌연 먼지만 남기고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연수는 공숙에게 물었다.

“누이 저 문양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글쎄? 기억나는 건 없는데?”

“그래요? 분명 한번 본 문양인데···.”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을 달리는 연수.

강서에서 호남으로 넘어가는 경계쯤 왔을 무렵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쩔까요? 강행해서 갈까요? 노숙할까요?”

“괜히 마을까지 가서 방 못 구하느니 여기서 노숙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럼 근처에 자리를 잡죠.”

모아온 마른나무를 쌓는 공숙.

“그런데 그 도사 놈들 서장을 넘어갔으면 어쩌지?”

“글쎄요? 서장 쪽은 하오문의 눈도 닿지 않는 거로 아는데···. 그래도 서장에 함부로 발을 들이기는 그들도 부담이 있을 거예요.”

“왜?”

“사부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서장 무림은 만만치 않은 곳이라고.”

“난 못 들어 봤는데···.”

포달랍궁을 중심으로 한 서장의 무림은 공고한 결집력과 강력한 무력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포달랍궁은 무서운 곳이라고 사부가 그랬어요. 그들은 중원이나 중원 무림에 별 관심이 없지만, 중원의 무림인에게는 까다로운 존재래요.”

“왜?”

“평소에는 만날 일이 없을 테지만 중원인이 서장에 가게 되면 꽤 귀찮게 구나 봐요. 특히나 포달랍궁에는 존배문이 있어요.”

공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존배문이 뭐야?”

가득 쌓인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며 입을 여는 연수.

“중원 무림인들에게는 굴종의 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모든 무인은 존배문이라는 포달랍궁의 초입에 있는 문을 통과하려면 오체투지 해야 하는 관문이래요.”

“왜?”

“전통이에요. 포달랍궁은 중원으로 치면 소림 같은 곳이에요. 모든 무의 종주. 그러다 보니 서장 무인들이 존경의 표시로 해 오던 것이 관례처럼 굳어서 지금은 관문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않으면?”

“아예 안 갔으면 모르되 가놓고 예를 안 올리면 포달랍궁의 라마승들과 결단을 내야겠죠. 서장에서 포달랍궁에 찍히면 살아남기 힘들 걸요?”

“중원인들 중에는 포달랍궁을 찾아가는 무인은 없겠네?”

“그렇죠.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중에는 제발로 포달랍궁을 찾는 이는 없죠.”

공숙은 연수에게 받은 육포를 긴 나뭇가지에 꽂아 불 위에 노릇노릇 구웠다.

“후~ 후~ 곤륜파 도사들을 감시하고 뒤쫓다 들키면 어찌할 거야?”

육포를 후후 불어가며 말을 하던 공숙이 슬쩍 연수의 눈치를 봤다.

“글쎄요···. 될 수 있으면 곤륜파 도사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게 좋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래? 그럼 도망칠 거야?”

“아마도 그렇겠죠?”

공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육포를 뜯어 먹었다.

허기를 달래고는 이제 운기를 하며 힘든 여행길을 마무리하려는데 공숙과 연수의 고개가 홱 하고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선을 고정한 채 경계를 하는 둘.

연수와 공숙이 모닥불을 피운 곳으로 한 명의 젊은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검은색에 금색 수실로 꽃을 수놓은 화려한 장포를 걸친 미남자는 공숙과 연수를 번갈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찾는 사람이 있어.”

“...”

말없이 사내의 짧은 다음 말을 기다리는 연수.

“이런 문양을 한 마차를 탄 여인인데 말이야. 혹시 못 봤나?”

고개를 가로젓는 연수.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근데···. 벙어리야?”

막 대답을 하려는데 사내의 주위 어둠에서 새어 나오는 살기가 연수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살기에 반응하여 심사가 꼬이니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아니.”

“너, 나 알아?”

“모르지.”

“근데 왜 반말이냐? 너 내 친구냐?”

막 거칠게 반발하려는 연수의 귀로 공숙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싸울 거야?

‘내가 진짜 요즘 왜 이러지?’

고개를 저은 연수는 슬그머니 눈을 깔아 내렸다.

“그래. 그렇게 꼬리말고 살아. 그게 너와 나의 차이니까. 계집이라고 구질구질하게 생긴 걸 달고 다니는 게 딱 끼리끼리···.”

-파팟 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흐려진 연수의 신형이 젊은 청년에게 늘어지듯 붙으며 손속을 섞었다.

갑작스러운 암습에 청년은 일 권을 가슴에 맞으며 뒤로 물러섰고 어둠에서 몸을 숨기던 다섯 명의 인영이 청년의 앞을 막아서며 연수를 공격해 왔다.

-쉬쉬쉭!

제법 날카로운 검법을 구사하며 연수를 포위하려는 야행복을 입은 다섯 인영.

연수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 다섯 명의 빌어먹을 놈들의 살기에 반응하여 심사가 뒤틀린 게 이 사단의 시초였다.

얼마나 대단한 호위기에 어둠에 몸을 숨기고 살기를 줄기줄기 흘려보내나 했더니 이제 겨우 일류나 될까 싶은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창궁검대처럼 대단한 검진을 익히지도 못했고, 합격진 역시 별 볼 일 없었다.

앞뒤로 길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진형이 흐트러지며 포위망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막 연수의 뒤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일 검을 찔러오는 인영.

그러거나 말거나 앞으로 뻗어나며 가슴을 찔러오는 상대의 검을 밟고 뛰어올라 상대의 턱을 차며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연수.

-빠각!

턱을 맞은 무사는 뒤로 널브러지며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등을 찔러오던 무사는 자신이 검을 찔러가는 것 보다 더 빨리 앞으로 움직이며 동료의 턱을 박살 내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연수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화려하게 몸을 뒤집은 연수의 다리가 그런 인영의 빗장뼈로 떨어져 내렸다.

-빡!

“컥!”

단번에 빗장뼈가 부러지며 내상과 함께 주저앉는 인영.

지난 삼 년 틈틈이 익혀왔던 봉익퇴였다.

연수의 퇴법에 신체 일부가 부러지며 나가떨어지는 무사들.

순식간에 다섯 명의 무사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입매가 비틀리며 다가오는 연수의 모습에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안 궁금해.”

“뭐?”

“네가 어디에 누구인지 안 궁금하다고.”

“감히!”

“감히 같은 소리 한다. 실력도 없는 놈이 고수한테 까불었으면 그냥 죽어라.”

죽으라는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이는 청년.

지금껏 강호 출두 후 자신을 대놓고 죽인다며 위협을 해 오는 사람은 단연코 없었다. 한데 지금 눈앞에 젊은 놈은 자신을 죽인다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뽑으려는데 떨려오는 손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상대의 살기에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공포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잠시 떨리는 손을 바라보던 청년은 몸을 돌리며 경공을 최대로 펼쳤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연수가 청년의 앞을 막았다.

“다했지?”

빙글 손을 돌리는 연수의 손에 단검이 나타났다.

그걸 본 청년의 입이 벌어졌다.

“아, 암수일살!”

“알았으면 곱게 죽어라.”

“잠깐만요! 같은 사파 인들끼리 이럴 필요는···.”

“같은 사파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연수의 눈에서 살기 어린 광망이 흘러나오며 신형이 흐릿해지는 순간.

청년은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성주님을 봐서 한 번만 봐주세요!”

청년의 목을 향해 날아들던 단검이 청년의 목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단검이 살짝 목을 파고들며 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호흡마저 멈추고는 돌처럼 굳은 청년.

“사황성주를 알아?”

“서, 성주님께 한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수일살을 만나거든 괜히 도발하지 말고 좋게 지내라고···.”

“너 누군데?”

“저, 저는 주결가의 차남 주결인이라고 합니다.”

“근데 뭐 한다고 이 밤중에 시비를 걸고 돌아다니지?”

“그, 그게 귀형가의 부탁을 받고 누구를 뒤쫓고 있었습니다.”

“누군데?”

“그, 그게···.”

청년이 주저하자 단검이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 망노의 제자가 도망을 쳐서 뒤쫓고 있습니다.”

“제자?”

“몇 년전에 얻은 여제자가 최근에 망노놈의 집으로 들어왔는데 도망을 쳤다 합니다. 망노의 체면이 있어 직접 가문을 움직이지 못하고 저희 가문에 조용히 처리해 달라며···.”

“쯔쯔 언제 정사 대전이 발발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현시점에 잘들 놀고 있다.”

연수는 단검을 거둬들이며 혀를 찼다.

“가, 감사합니다.”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인사를 올리는 청년.

“됐어. 꺼져.”

“예. 부, 부하들은···.”

“데려가.”

“감사합니다.”

청년과 일행이 사라지자 공숙이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나한테는 시비에 휘말리지 말라더니.”

연수로서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무안함에 공숙의 눈길을 피하는 연수.

“그, 그게 몸이 먼저 반응을 했네요.”

“근데 주결가면 그 열두 가문 중 하나 아니야?”

“맞죠.”

“그런 가문의 둘째가 왜 저렇게 저 자세지?”

“가문이고 나발이고 모가지 따이면 끝이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거치고는···. 성주의 입김인가?”

“글쎄요.”

“저래놓고 고수들을 끌고 오는 거 아냐?”

“그래 봤자 주결가의 고수들은 별거 없어요.”

“왜?”

“알려진 절정고수는 다섯 명밖에 안 돼요. 일류 무사의 수는 제법 되는 것 같지만 보다시피 제대로 된 검진 하나 없는 무가에요.”

“그러다가 다른 가문을 끌어들이면?”

“그건 곤란하죠.”

“그냥 죽여서 묻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성주의 이름을 파는데 성주 체면은 지켜줘야죠.”

“하여튼 오늘은 운기 하기 틀렸네.”

“예. 일찍 일어나서 새벽에 하고 움직여요.”

“응.”

모닥불 앞에 앉아 자신의 이상행동을 다시 떠올려 보는 연수의 표정이 심란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