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73화 (73/202)

# 73화

소개는 연수를 안심시키듯 급히 말을 이었다.

“당연히 뒤따라 온 무사들에게 바로 발견되어 치료받았지. 그리고 암수일살이 이렇게 만들고 깊은 숲 쪽으로 도망갔다고 말했고.”

“그 후에는?”

“그 후로는 의원으로 옮겨져 네놈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정말 어찌 된 거야? 그 후로도 많은 무인들이 투입돼서 열흘을 넘도록 근처를 이잡듯 뒤졌어. 추적술에 일가견 있는 놈들 모두가 투입되었지만, 머리카락 하나 발견하지 못해서 가슴을 쓸었다고.”

연수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는 쭈욱 들이키며 소개와 헤어진 이후 있었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털어놓았다.

연수의 말이 이어질수록 공숙은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고생 많았네. 그 늪에 숨어있었다니···. 잘했어. 아니었으면 반드시 잡혔을 거야. 그 이후로도 그 근처 산이란 산은 무림맹과 남궁세가에서 다 뒤졌어. 설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는···.”

“항상 등잔 밑이 어두우니까.”

두툼한 고기 한 점을 집어 소개의 접시에 올리는 연수.

“그 후로는 불이익받은 건 없고?”

“뭐 본타에서 실망의 눈초리를 좀 받긴 했지만 네 목숨값에 비하면 싼 거지.”

연수의 눈썹이 씰룩했다.

“실망의 눈초리?”

“그래. 아무래도 첫 실전이었는데 공은커녕 중상을 입고 실려 왔으니 좋은 소리는 못 듣지.”

연수는 소개의 술잔을 계속 채워 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남궁진수···. 왜 죽인 거야?”

“후우. 이야기가 긴데···.”

“남는 게 시간이야.”

연수는 술을 한잔 들이키며 남궁진수와의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 안에는 공숙과 그녀의 사부에 관한 이야기도 모두 담겨 있었다.

“그랬었구나. 그놈 소문과는 다르게 음흉하다는 이야기는 본타에서 자주 들었었는데···.”

“뭐 이미 죽은 놈 이야기해서 뭐해. 어차피 남궁세가와는 끊을 수 없는 원한의 고리를 만들었는데.”

연수의 입에서 남궁가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공숙의 주위로 스멀스멀 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이. 진정해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공숙은 잠시 멈췄던 젓가락을 다시 놀리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 죽일 거니까 뭐.”

연수는 잠시 공숙을 살피고는 고개를 돌려 소개를 봤다.

“그런데 괜히 나 때문에 방 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거 아니냐?”

“생각해보면 일개 평개가 분타주의 제자가 되어 승개가 될 수 있던 것은 다 네 덕이니까. 눈칫밥 좀 먹는다고 해도 큰 불편은 아니야.”

여전히 연수의 표정이 무거워 보이자 소개는 피식 웃었다.

“그런 표정 말아라.”

“전극공합... 이라는 거 알아?”

“전극공합? 그게 뭔데?”

연수는 한숨과 함께 술잔을 들이켰다.

“지금 전해주는 말이 네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극비의 위험한 정보야.”

이어지는 연수의 이야기에 소개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구파일방의 비전이라니! 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소리 맞아?”

“알아. 나도 믿기 힘들지만 아마 사실일 거야.”

연수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가···. 조사님들의 피가 서린 비전을······.”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그다음?”

“바람결에 무선이 한자락···.”

연수의 말이 시작되자 공숙과 소개는 어깨를 흠칫 떨며 눈이 커졌다.

“설마···.”

“맞아. 전극공합은 오행선신공의 기초를 만드는 영약. 육십 년에 딱 두 개만 만들 수 있는 천고의 영약이더군.”

“말도 안 돼···.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이 말을 해준 양반 신분으로 보아 헛소리나 하고 다닐 양반은 아니라서.”

먹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벌리고 있던 공숙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누구야? 누가 말해준 거야?”

“사황성주요.”

“뭐?!”

“헛!”

공숙과 소개는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며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예전에 한번 인연이 닿아 얼굴을 익힌 적이 있었거든.”

“어···. 그러니까···.”

소개와 공숙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인이 모래알처럼 많다는 강호 무림이지만 그 정점에 서 있는 네 명의 최정상 중 하나를 만난 것이니. 만나 인사하기도 힘든 사람을 만났는데 무림맹의 극비 정보까지 받았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만약 연수가 아닌 다른 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듣지도 않고 무시했을 소개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럼 방주는 모두 알고 있겠네. 전극공합과 무림맹의 일들을.”

“모를 수가 없겠지.”

“하아, 어쩌자고···.”

“이건 그냥 그동안 있었던 일. 진짜 정보는 그 전극공합을 무림맹은 강탈당했다. 이거지.”

“뭐?!”

오늘 소개는 평생을 살며 놀랐던 것보다 더 많이 놀라고 있었다.

“말 그대로야 나와 공숙 누이가 오는 길에···.”

연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소개는 머리가 어질하며 정신이 없어 도무지 맨정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기를 돌려 술기운을 손끝으로 몰아 주정을 배출하는 소개.

이러지 않고는 지금 들은 이야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누가 전극공합을...”

“아마도 사황성. 나도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 그 부분은 말을 해주지 않더라고. 하지만 혼자서 무림맹의 맹주 직속 비밀무력대를 도살할 수 있는 수준의 절정고수야. 무기는 도. 중도 위주의 무공일 거야.”

“사황성에 중도를 쓰는 고수라고?”

“응. 뭐 아는 거 있어?”

“아니. 사황성의 고수에 대한 정보는 제법 빠삭하게 꿰고 있는 편인데···. 그 중 도를 쓰는 절정고수는 개방이 알고 있는 한은 다섯 명이야. 하지만 그 중 중도의 무공은 없어. 다들 쾌도의 고수들이야.”

연수는 술잔을 들이키고는 중얼거렸다.

“비밀무기라는 건가?”

“그런데 연수야···.”

“응?”

“솔직히 말해 줬으면 좋겠다.”

“알겠어.”

“너···. 정사 대전이 일어난다면 참전 하는 거냐?”

“아니.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후우···. 다행이다.”

“제일 좋은 건 정사 대전이 일어나지 않는 거지.”

“그렇지. 하지만···. 일어날 거야. 정사 대전.”

소개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구나.”

“응. 판단뿐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어. 정사 대전을.”

잠시 멈칫거리며 말을 못 하는 연수를 보며 소개가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다 해도 된다.”

“너와 다투던 날을 지금껏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 알량한 자존심으로 친구를 잃은 날이니까.”

“... 내 오지랖이···.”

“아니야! 오지랖 따위가 아니야. 돌리지 않고 말하자면 이제야 알겠어.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듯한 불안한 마음.”

“...”

“소개야 너는 일류 고수지?”

“응···. 이제야 알 것도 같네. 그날의 네 기분.”

“오지랖일까?”

“친구의 걱정이지.”

“하아···. 정사 대전에서 나는 네 편을 들어줄 수가 없어. 그럴 힘도 능력도 입장도 못돼.”

“알아.”

소개는 애써 몰아낸 주정을 잊고 술잔을 들이켰다.

“연수야.”

“말해.”

“너는 절정 고수인 거지? 여기 이 분도 그렇고.”

“응.”

“...”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 알려줄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마 자존심 때문에 할 수 없던 말을 연수가 먼저 뱉어주자 소개는 고마웠다.

“우리 사이에 이제 자존심 같은 건 버리자. 원래 그랬었는데 떨어져 있는 동안 많이 생겨 버렸네.”

“무인이니까.”

연수는 술잔을 들이키고 심득을 외우기 시작했다.

연수가 심득을 외기 시작하자 소개는 입에 갖다 대던 술잔을 내리고는 눈을 감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 여기까지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초절정 검객의 심득이야.”

“초, 초절정 고수?”

“응.”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어. 아무리 너라도 그분의 정체는 몰랐으면 해.”

“네가 그렇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한 번 더 들을 수 있겠냐?”

연수는 피식 웃으며 외워놨던 심득을 풀어주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소개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뭔가 잡히는 게 있어?”

“모르겠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인명은 재천이고, 될 놈은 되지 않겠냐?”

“...”

연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개를 바라봤다.

한동안 소개와 그간의 밀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며 사위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사부께는 언제 가는 거야?”

“네 안부도 확인했으니까 내일은 가 봐야지.”

“그렇구나. 혹여 나를 다시 찾아올 때는 상록 객잔의 점소이에게 나무를 심어달라고 전해.”

“알았다. 부디 조심하고. 전극공합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해. 보고 해봤자 방주님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일 거고.”

“그래. 도움 되는 정보는 못 주었네.”

“괜찮다니까. 그래도 아직 서호에서는 잘 나가는 개방 고수라고.”

연수는 그런 소개를 잠시 바라보고는 노를 지어 배를 몰았다.

소개와 헤어져 아쉬운 발길을 돌리며 객잔으로 돌아온 연수와 공숙은 가벼운 저녁을 먹고는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찍 구룡산으로 떠나려면 일찍 쉬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번 사부를 찾아뵐 생각을 하니 바쁘게 지나갔던 그간의 시간이 아득해지며 사부와의 단란했던 생활들이 그리워졌다.

하루빨리 사부의 얼굴을 보고 사부의 밥을 먹고 싶어지는 연수였다.

‘사부 제가 갑니다.’

심상 수련마저 거르고는 일찍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연수.

하지만 평소 잠을 적게 자는 습관 덕에 잠은 들지 않고 사부와의 추억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갔다.

‘그러고 보니 처음 사부를 따라 구룡산을 올라가다 러너스 하이가 왔었지.’

누운 자리에서 씩 미소를 지으며 과거의 추억에 빠져드는 연수.

그렇게 옛 추억을 회상하며 잠이 든 연수는 해가 뜨기 전에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연수가 눈을 뜨기 무섭게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오는 공숙.

연수는 자연스럽게 가부좌를 틀며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운기 조식을 끝내고 객잔 밖으로 나오자 밝은 해가 주변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겨놓았던 말을 찾아 올라타는 둘.

“그새 살이 쪘네. 둔해진 거 같아.”

“말이 그렇죠. 뭐. 달리다 보면 금방 본래의 모습을 찾을 거예요.”

“그래?”

“그럼요. 일단 가죠.”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을 벗어나 넓은 관도가 나오자 둘은 힘차게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달리는데 공숙이 말을 걸어왔다.

“얼마나 가야 해?”

“이대로 달려가면 사흘이면 닿을 거리에요.”

“금세 가겠네.”

“예. 내일쯤 노숙을 하며 변장을 새로 해요. 그리고 모레 마을에서 말을 팔죠.”

“말을 왜 팔아?”

“누이 말은 너무 눈에 띄어요. 저희 사부님은 몸을 숨기신 분이신지라 만에 하나라도 조심하는 게 좋아요.”

“이 백마 마음에 들었는데···.”

“사부님을 뵙고 내려올 때 더 멋진 말을 사면 되죠.”

“백마는 흔치 않은데···.”

“꼭 구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알았어.”

이틀 후 연수와 공숙은 젊고 평범한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는 큰 마을로 들어섰다.

-가슴이 답답해.

붕대로 큰 가슴을 압박해 놓은 공숙이 투덜거렸다.

-조금만 참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청둥귀 사줘.

-네. 사줄게요.

연수는 공숙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소개와 헤어지며 귀에 파고들던 소개의 전음이 떠올랐다.

‘고, 공숙 누이는 정인이 없는 거지?’

없다는 연수의 전음에 얼굴이 뻘게져서 달려가던 소개의 뒷모습에 웃음이 나는 연수였다.

“왜 웃어?”

“그냥요.”

“그냥이 어딨어?”

“누가 데려갈까 걱정이 많았는데 누이가 시집은 갈 것 같아서요.”

“응?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습니다.”

말을 마치며 먼저 걸어가는 연수.

한참을 걷고 있는데 공숙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공숙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나 눈동자가 점점 날카롭게 변하는 모습을 보니 살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연수가 황급히 공숙에게 달려가며 공숙의 앞을 막고는 공숙을 진정시켰다.

“무슨 일이에요?”

말 없이 한기를 품어내는 공숙.

연수가 뒤를 돌아보자 청의를 입은 무사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궁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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