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72화 (72/202)

# 72화

은은한 살기를 일으키며 입을 여는 패천후.

“어찌 알았어?”

“우연히요.”

“우연이라···. 나 우연 별로 안 좋아해.”

“정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욕심낼 물건 아니라는 거 잘 알아요.”

연수의 말에 은은히 풍겨 나오던 살기가 사라지며 패천후가 피식 웃었다.

“풋! 너 참 재밌는 놈이구나.”.

연수는 재차 물었다.

“전극공합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별거 아냐.”

“알겠습니다.”

“응? 더 안 물어봐?”

연수는 차를 홀짝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네. 어차피 안 알려주실 거 같은데 기운 뺄 필요 있나요.”

“너 정말 내 밑에 안 들어올래? 잘 키워줄게.”

“지금도 잘 크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탐나는 놈이네. 기분이다! 대신 욕심내지 마라.”

“목숨보다 귀한 건 없죠.”

패천후는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말을 이었다.

“무림맹에는 재밌는 방식이 있어. 후기지수 중 몇몇을 뽑아서 다음 대의 맹주 후보로서 구파일방의 모든 비전을 쏟아붓는 방식이지.”

“그렇게 되면!”

“그렇지. 비전의 유출 위험이 생기지.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정파 놈들 주제에 용케도 그런 짓을 해.”

“그럼 전극공합은 구파일방의 모든 비전입니까?”

“설마. 그렇게 멍청하진 않지. 전극공합이란 구파일방에서 아니, 정확히는 무림맹에서 극비리에 만드는 영약. 맹주 후보자들에게 지급되는 육십 년에 딱 두 개만 만들 수 있는 영약이다.”

영약이라는 말에 연수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호오! 어째 엄청난 보물 같더니!”

“그 존재를 아는 자는 전 무림에도 몇 안 돼.”

“궁금하네요. 얼마나 대단할지. 어마어마한 내력을 쌓게 해 주겠죠?”

“전극공합의 진정한 공능은 내공 따위가 아니야.”

“그럼요?”

패천후는 술잔을 들이키고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큼큼! 바람결에 한 자락 무선이 흘리고 꿈결에 한 자락 몽선이 흘리고. 전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꿈결 같은. 하늘이 고르고 시대가 고르고···.”

“미래가 정한 영웅만이 당당히 풀어낼 뿐···. 오행선신공!”

패천후의 말을 끊으며 뒷이야기를 마친 연수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정말···. 존재합니까?”

“전극공합은 오행선신공의 기초를 쌓는 신묘한 영약이지. 구결도 없다. 전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신공. 하지만 항상 존재해 왔지. 그 빌어먹을 오행선신공을 익힌 놈은.”

“세상에 그런 무공이 실재하다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 그런 무공이야.”

“와···. 어쩌자고 그런 물건에 손을 대신 겁니까?”

“누가? 내가?”

연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능글맞게 물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사황성의 고수가 아니면 그 무림맹의 무력대를 어찌 난도질할 수 있겠어요. 혈혈단신으로. 그 몰살당한 무력대가 평범한 놈들 같진 않던데···.”

“활검대로 위장한 일종의 수호대지. 맹주 직속.”

“직접 하신 것 같진 않고···. 소름 끼칠 정도의 고수던 데요?”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시체들을 보니까 대충 감이 오던데요?”

“흠···. 그래? 어쨌든 그건 알 거 없고. 정 알고 싶으면 내 밑으로···.”

“알려 하지 않을게요.”

“쩝.”

패천후는 아쉬운 표정으로 연수를 봤다.

“참 탐나는 놈이로다.”

“그래서 정사 대전이 일어나는군요.”

“그건 아니다. 정사 대전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팔방으로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그렇게 된 거야.”

“역시 복잡하군요. 정치란.”

연수의 말에 패천후는 은은한 눈빛을 연수에게 쏘았다.

“내 밑에서 배우면 정말 잘 할 것 같은데. 그 정치라는 거.”

“미련 버리세요. 사문의 업이 있어요.”

“그 정도면 네 사문의 업은 다 푼 거 아닌가?”

“멀었습니다.”

“마음 바뀌면 사황성으로 와. 안 바뀌어도 놀러 와라.”

“봐서 갈게요.”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패천후가 물었다.

“아, 마지막으로 너냐? 암수일살.”

“예. 접니다.”

“볼수록 큰 인재란말야.”

“저 같은 놈보다 영입해야 할 고수는 따로 있잖아요. 사파의 빛나는 별.”

“아, 그놈. 그놈도 참 말을 안 들어서 고민이다.”

“그분은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죠.”

“중요한 놈인데 말이야. 좀 얌전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연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은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네가 말 안 해도 알아. 누가 뭐라 하던 흡성신공의 전인이니.”

“그럼 이제 저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수고하세요.”

“쩝. 큰일 터지기 전에 한 번 찾아와.”

“봐서요.”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는 연수.

연수가 돌아서자 주변을 단단히 막고 있던 기막이 사라졌다.

기막이 사라지며 주변의 소리와 기감에 느껴지는 기척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주루를 빠져나와 객잔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는 연수.

주변 사내들의 시선이라는 시선은 모두 강탈하듯 잡아끌며 당당하게 걸어오는 공숙.

분명 약속대로 가슴이 노출되는 옷은 아니었다.

‘참나···.’

연수를 발견하고는 보란 듯 걸어오는 공숙.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딱 달라붙는 옷에 허벅지 옆까지 길게 찢어진 치마를 입어 한쪽 다리는 거의 내놓다시피 하여 보는 이들을 숨 막히게 하는 옷차림이었다.

“삼촌! 약속한 대로죠?”

“하아···. 그래.”

깊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 연수.

그런 연수의 옆으로 미소를 지으며 따라붙는 공숙.

-대체 그 꼴이 뭡니까?

-왜? 가슴은 안 파였잖아?

-무인이 치마를 입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옆을 확 텄잖아. 움직임에는 전혀 제약이 없어.

“하아···.”

“오늘도 친우분은 못 찾으셨군요?

“그래. 가서 밥이나 먹자.

-그런데 그 옷은 언제까지 입고 다닐 거에요?

-오래오래 입을 거야.

-그러시겠죠.

객잔에 도착한 연수는 식사를 시켜 놓고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소개 녀석 무탈 한 건가?’

“안 먹냐고요!”

오리 다리를 뜯으며 지르는 공숙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는 연수.

“먹는다. 먹어.”

“다 불었어요.”

말없이 분 소면을 젓가락으로 휘젓는 연수.

“걱정하지 마세요. 기다리면 만나겠죠.”

웬일로 투정 없이 위로의 말을 건네는 공숙.

-옷이 마음에 들긴 하나 보네요.

-나도 보고 싶어. 그 친구.

-저도 보고 싶네요.

연수가 같은 주루로 출근한 지 보름째.

“저기요···. 뱃놀이 말인데요···.”

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떼는 공숙.

그동안 시간이 지날수록 심정이 가라앉아 우울해하는 연수의 모습에 몹시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워?”

피식 웃으며 말하는 연수.

답지않게 조심스러운 공숙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긴 열흘을 넘게 얌전히 있느라 좀이 쑤셨겠지. 용케 버텼네. 지금까지.’

“뱃놀이 하루쯤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 그것도 좋겠다.”

-저도 기분전환이 좀 필요하네요.

-그치? 맞아! 너무 앉아만 있어도 안 좋아.

신이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공숙을 보며 연수는 미소를 지으며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주루를 나오는데 연수의 시선에 덩치 큰 거지가 걸어오는 모습이 담겼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연수의 전음이 날아들었고.

스치듯 서로를 지나쳐 가는 둘.

공숙은 신이나 먼저 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연수를 재촉했다.

“빨리요! 삼촌!”

“그래 간다. 가자!”

기운이 넘치는 연수의 목소리에 공숙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봐 배탈 생각하니까 신나지?

-예.

서호에 여러 배를 띄어놓고 배를 빌려주는 곳.

작은 나무 오두막의 입구에 쳐놓은 발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연수.

“배 좀 빌립시다.”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염소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연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헉, 큼! 큼! 어떤 배를 빌리시겠소?”

-이거 좀 봐요! 이 배 진짜 좋다!

밖에서 공숙의 호들갑이 들려왔다.

“좀 보고 골라도 되겠소?”

“그러시오. 나가 봅시다.”

배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작은 나무배부터 탁자와 의자가 달린 배, 거기에 해를 가리는 천막까지 올라간 큰 배까지.

“이 작은 배면 되겠지? 둘이니까.”

“아니. 셋이다. 저기 저 큰 배로 합시다.”

“얼마나 빌리실 거요?”

“해가 떨어질 때까지.”

“저 배는 커서 셋이서는 제대로 못 다룰 텐데. 노를 저어줄 사람이 필요하오?”

“아니요. 됐소.”

연수가 값을 치르자 공숙은 배로 뛰어오르며 방방 뛰었다.

“와! 진짜 크다! 여기 천막 안에도 엄청 넓네! 삼촌 빨리 타봐요!”

“잠시만 기다려 보아라.”

일각 정도 기다리자 웬 거지 한 명이 어깨에 술 몇 병을 메고 다가왔다.

“거 술은 있는데 배를 탈 돈은 없네. 큰 배를 빌린 모양인데 자리 좀 구걸해도 되겠소?”

“좋지요. 올라타시오.”

거지가 제법 먼 배 위로 신형을 날리며 올라탔다.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리는 연수.

배 끝에 노를 한 손에 쥐고 좌우로 짓자 커다란 배가 쭉쭉 뻗어 나갔다.

커다란 서호의 가운데에 멈춰선 배.

연수가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와락 안겨 오는 거지.

“살아 있었어! 잘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금세 어깨를 뜨겁게 적셔오는 눈물에 연수의 떨리는 두 손이 마주 올라가 거지의 등을 감쌌다.

“너도···. 별일 없어 정말···. 정말 다행이야. 소개야.”

소개는 품을 떼며 연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얼굴 좀 보자. 이 자식! 잘난 얼굴 좀 보자!”

연수 역시 소개의 얼굴을 마주 잡았다.

“잘나긴 네놈 얼굴이 더 잘났지. 어디 상한 곳은 없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살피는 둘.

그런 극적인 분위기를 깨며 공숙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다 큰 사내놈들이 울면 불알 떨어진다. 얼레~꼴레~”

공숙의 목소리에 문득 민망함이 몰려오며 서둘러 눈물을 감추는 두 남자.

“그런데 저분은···!”

공숙을 바라보는 소개의 눈이 커졌다.

“너! 내 다리 보고 있지?”

찢어진 치마 옆으로 다리를 쑥 내밀며 짝다리를 짚는 공숙.

멍한 소개의 눈빛이 흔들리며 시선이 돌아갔다.

“아, 아, 아니 그게! 거기를 본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제 눈은 위에···!”

“그럼 가슴 봤구나?”

“아아아니! 아닙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서 공숙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소개.

“그만 놀려요. 이 분은 내 의 누이. 공숙 누이야.”

“의, 의 누이?”

“어. 일단 앉자. 할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답해야 할 말도 너무 많다.”

“그래.”

천막 안 탁자 위에 소개가 술을 올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연수 역시 주루에서 사 온 안줏거리를 탁자 위로 올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맛있겠다!”

신이 난 공숙마저 자리에 앉자 작은 탁자가 꽉 차는 듯했다.

“그날 어떻게 된 거야?”

연수의 질문에 소개는 술잔 가득 술을 따르며 대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상황이 급박했어. 사방에 무림맹에서 급파된 무인들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널 죽이려고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소개는 잔을 가득 채운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나는 네 칼을 들고 일단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만 생각했어. 그래서 최대한 경공을 펼치며 호각을 불어 추격대를 너에게서 떨어트려 놓았지.”

소개의 빈 술잔에 술을 채우며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호각소리 네가 분 것이었구나.”

“그때는 당장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내력이 바닥나고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호각을 불며 달렸어. 그리고 다른 무사들이 내 뒤를 바짝 뒤쫓을 무렵···.”

소개는 상의를 잡아 내리며 가슴을 보여주었다.

소개의 오른쪽 가슴 깊어 보이는 검상이 눈에 들어오자 연수는 그 상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칼을 죽지 않을 만큼 가슴에 박아 넣었어.”

“너, 너..!”

“죽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이라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사혈을 피하고 심장을 피했다지만 연수의 칼은 기형적인 모양만큼이나 살상력이 높은 편이다.

베기 편한 용도이기도 하지만 찔리게 되면 속의 상처를 아물기 힘들게 만든다.

무엇보다 출혈량이 컸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단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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