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여기부터 유료 입니다.)
평소 생필품을 구매하던 작은 마을로 내려온 연수는 옷집을 먼저 들렀다.
“누이 일단 여기서 마음에 드는 옷 몇 벌 사고 면사도 꼭 사서 해야 합니다.”
“너는?”
“저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여기서 옷 좀 고르면서 기다려요.”
공숙을 두고 나선 연수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변장술에 이용할 갖가지 재료와 바늘을 구했다.
얼추 필요한 물건을 전부 구한 연수는 옷집으로 돌아왔다.
“헉!”
돌아온 연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찮지? 이 옷 정말 마음에 들어.”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이런 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예요?”
말을 하며 연수는 옷집 주인을 노려보았다.
연수의 뜨거운 눈길에 늙은 옷집 주인은 헛기침하며 눈길을 피했다.
가슴 부위가 깊숙이 파인 옷은 기루나 가야 볼 수 있을 옷차림이었다.
“별로야?”
“아니, 애써 면사까지 하면서 시선을 피하려 하는데 그러는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그리고 그런 옷은···.”
“이런 옷은?”
“하여튼 무인이 입을 만한 옷이 아니에요.”
“그래? 무인들은 이런 옷 입으면 안 되는 거야?”
“예. 뭐, 되도록 품이 넉넉한 옷으로 골라요.”
“너는 편한 무복을 입고 다니면서 왜 나만 그런···.”
-암기를 숨기기 편하잖아요.
-아! 그런데 너는 그런 옷 속에다가도 이것저것 잔뜩 숨기고 있잖아.
-누이는 그런 요령이 없잖아요. 속에 편한 무복을 받쳐 입으면 돼요.
-더울 텐데···.
-음영체심공을 익혀놓고 덥긴 뭐가 더워요.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아쉬운 표정으로 입고 있던 옷을 내려보던 공숙은 옷을 새로 갈아입었다.
작은 짐을 메고 밖으로 나온 둘.
“만성현이나 가야 말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은 천생 걸어야 합니다.”
“경공으로 달리면 금방 가잖아.”
“아직 하북이에요. 최대한 무공은 숨기세요.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그게 좋아요.”
말을 하는 연수의 얼굴은 긴 수염을 잘 기른 중년인이 되어있었다.
공숙 또한 면사를 하여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신비한 느낌을 주는 초록색 눈동자만이 보이는 공숙의 얼굴.
“이거 답답하다.”
“익숙해 질 거에요. 천진을 가로질러 절강으로 갈 겁니다.”
공숙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가는 길에 안휘를 들러 가자!”
-위험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올 거예요. 분명히.
“그래도···.”
“그놈들은 절강에도 벌려놓은 사업이 많아요.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공숙의 주변으로 한기가 몰아치자 연수가 다급히 말했다.
-누이!
-아, 미안.
“누이 마음은 잘 알아요. 하지만 목표를 이루려면 침착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해요. 그놈들한테는 저도 진 빚이 많아요. 천천히 합시다.”
“응···.”
공숙의 침울한 얼굴을 보자 연수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청둥귀먹을래요?”
“거북이?! 응 먹을래.”
“가요. 떠나기 전에 든든히 먹어놓죠.”
작은 마을에서 그나마 제일 큰 반점에 들러 든든히 배를 채운 둘은 마을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며칠을 걷자 좁던 관도가 넓어지며 천진으로 들어섰다.
해안과 인접하여 해안가가 4 백리가 넘게 이어지는 곳이지만 크게 항이 발전하지는 못한 이곳은 산도 많아 작은 해안마을을 통하여 이동하게 되면 많은 주목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삼촌이라고 부르세요.
-응.
연수의 겉모습은 중년의 나이였기에, 젊은 여성으로 예상되는 공숙이 반말하며 동생이라 부르면 이상하게 보이니 연수는 미리 공숙에게 언질을 주었다.
“아, 이곳은 해산물이 많아서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적당히 경공을 쓰면서 가면 금방 벗어날 거에요. 산동과 강소까지는 조심해야 해요.”
“산동과 강소는 뭐가 달라?”
공숙의 물음에 연수는 경공의 속도를 조금 줄이며 대답했다.
“산동과 강소는 사파가 더 강세에요.”
“산동에는 황보세가가 있잖아?”
“예. 그리고 사황성 열두 가문 중에 세 가문이 강소에 있다고 들었어요. 산동을 지나 강소까지만 가도 사파 세상이에요.”
“너무 좋다! 그럼 그곳에서는 면사를 안 해도 되겠네?”
연수는 공숙의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더 시비를 조심해야 할거에요.”
“왜?”
“사부께서 예전에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정파 놈들은 답답하긴 해도 지킬 건 지킬 줄 안다고요. 그렇지만 자유분방한 사파 놈 중에는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 많다고 하셨어요.”
“응? 우리 사부님은 그런 말 없었는데···. 정파 놈들은 명분밖에 모르는 위선자라는 말은 자주 하셨지만. 전에 나한테 나쁜 짓 하려던 그놈들도 정파 놈들이었잖아.”
경공을 멈추어 천천히 걸으며 입을 여는 연수.
“어디를 가나 나쁜 놈은 있는 거예요. 정파든 사파든 더러운 놈들은 다 있어요.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들도 있겠죠. 개인의 차이일 뿐. 그게 모든 사람의 성격을 규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사파 놈 중에는 경계해야 할 놈들이 많을 거예요.”
공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렇군요. 연 삼촌은 참 똑똑해요.”
“그래. 지금도 보아라. 이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설마 정파겠느냐?”
말을 마치며 양손을 휘두르자 연수의 손에 허공을 가로지르던 비검들이 잡혔다.
여러 개의 손에 잡힌 비검을 코로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보는 연수.
“살펴보거라.”
연수는 손가락만 한 비검 하나를 공숙에게 주었다.
공숙은 망설임 없이 면사를 들어 올려 비검의 날에 살짝 혀를 대 보았다.
“퉤! 삼전독이네요. 비적질이나 해 먹는 놈들이 독을 다 쓰고 제법인데요?”
-보통 이럴 때는 비겁하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너나 나도 독을 쓰잖아?
-...
“큼큼 이제 모습들을 좀 나타내 보지?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려는가?”
연수의 말이 끝나자 숲 곳곳에서 얼굴을 가린 야행복을 입은 인형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로 이리 길까지 막고?”
야행복을 입은 무리 중 제일 강력한 기세를 풍기는 인형이 앞으로 나섰다.
“뭐 특별한 일이겠나? 비루한 비적질이지.”
“보통 무림인에게 함부로 비적질을 시도하는 도적놈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우리는 그런 거 안 가려. 가진 것 다 내놓으면 목숨은 뺏지 않는다.”
“싫다면?”
“죽여서 뺏는다.”
“우리도 나름 사파 인들인데 같은 사파끼리 이럴 필요가 있을까?”
“우린 그런 거 안 가린다고 말했잖아.”
-숙 누이 이런 놈들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아니.
연수는 입고 있는 장포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어디 한번 어우러져 봅시다.”
연수의 말이 끝나자 도적보다는 살수 무리에 가까운 비적들은 넓게 퍼지며 연수와 공숙을 포위했다.
‘열네 명.’
-적당히 상대하고 계세요. 금방 처리하고 도울게요.
-안 도와줘도 돼.
전음을 보내는 공숙의 주변으로 한기가 몰아치자 주변에 비적들이 몸을 떨었다.
연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퍽!
“큭!”
말을 하던 연수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다가와 주먹을 뻗자 겨우 막아낸 인형은 내기가 진탕됨을 느끼며 뒤로 밀려났다.
연수가 공격을 시작함과 동시에 공숙 또한 열세 명의 인형들과 어우러졌다.
뒤로 밀려나는 인형을 쫓아가며 진각을 밟고 반동으로 몸을 띄우며 공중에서 획 돌아 무게를 실은 연수의 다리가 인형의 머리로 떨어졌다.
겨우 몸을 돌리며 직격을 피하는 인형.
연수의 다리가 그런 인형의 어깨에 떨어졌다.
-뻐억!
묵직한 충격과 함께 인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래도 한 수는 있는지 팔꿈치로 어깨를 짓누르는 연수의 다리를 쳐내고 빙글 돌며 일어서서 뒤로 물러서는 비적.
연수가 바로 공격을 이어가지 않자 한숨 돌린 인형은 허리춤에서 긴 채찍을 꺼내 들고는 이를 갈았다.
“죽여주마.”
상대가 보통 고수가 아님을 깨달은 비적은 처음부터 맹공을 퍼부었다.
채찍이 휘둘리며 연수의 주변 사방에서 채찍에서 튀어나오는 편기가 가득 찼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정도의 예측을 할 수 없는 채찍의 움직임과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편기는 위협적으로 보였지만 연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상대를 향해 걷는 연수.
눈밖에 보이지 않는 비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명 천천히 걷고 있지만 모든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는 상대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이를 악문 비적은 내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 순간에도 연수는 고개를 까딱 저치며 채찍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있었다.
삼 년을 공숙의 편법과 대련하다 보니, 이제 채찍을 잡은 상대의 손만 보아도 어디로 채찍이 날아올지 훤히 보였다.
상대의 기세가 제법 거칠어지는 것을 보니 이제는 조금 더 거센 공격이 나올 차례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적의 채찍에서 기사가 뻗어 나오며 복잡한 채찍의 움직임이 더욱 복잡해졌다.
막 연수를 반으로 가를 듯 머리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기사.
연수는 차분하게 한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연수가 물러서기 무섭게 그 자리가 파였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상단으로 날아드는 기사.
연수는 입매를 비틀며 뒤로 드러눕는 듯 기사를 피했다. 연수의 등이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지 않고 일으켜 세워졌다.
복면인은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현 상황에 점점 이성의 끈을 붙잡기 힘들어졌다.
이제 연수와의 거리는 고작 이 장도 되지 않았고, 지금도 연수는 느릿느릿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비적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악을 질렀다.
“아아아아!”
비적의 채찍이 주인의 심경을 대변하듯 휘둘러지며 연수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런데도 채찍은 연수의 몸을 스치지 못했다.
한 장까지 가까워진 둘.
순간 연수의 주먹이 느릿느릿 뻗어져 나왔다.
-퍼퍼펑!
한 장거리에서 연수의 주먹은 분명 한 번 뻗어졌다.
그렇게 보았는데 권기도 아닌 권풍이 순간 가슴에 적중되었다.
이 정도 권풍쯤이야 버텨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충격이 연이어 찾아 왔을 때 어쩌면 내상을 조금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세 번째 타격 당함을 느꼈을 때는 몸이 뒤로 날아가며 중상을 피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분명 한 번이었는데···.’
절정이라는 경지에 오르고 많은 강적을 만났었고 물론 패배한 적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무력감을 느낀 적은 단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쿨럭!”
대자로 누워 기침하는 비적의 얼굴을 가린 검은 복면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답답했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복면을 내리는 비적.
그의 얼굴은 토해낸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누, 누구냐···?”
“내가 물어야 할 말이지. 누구냐? 무림인을 노리는 비적 이야기는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다고. 그것도 천진에서 말이야.”
천진은 하북과 북경에 딱 붙어 있는 지형이다.
바로 위로는 북경을 뒤로는 바다를 양옆으로는 하북이 막고 있는 천진에 고수무리로 이루어진 비적이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북경만 가도 대놓고 칼을 찬 무인들은 찾기 힘든데 천진에 이런 비적들이 있었다면 진작에 관군들이 몰아쳤을 것이다.
“우리의 일을 방해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야.”
“글쎄. 누가 누구를 방해하는 건지.. 나는 그다지 고문 같은 건 좋아하지도 재주도 없어. 그런데 저 여자는 조금 다를걸?”
연수의 말에 겨우 몸을 일으키며 시선을 옮기는 비적.
그의 눈에는 자신의 부하들을 몰아치며 귀신같은 몸놀림을 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공숙은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적당히 제압해 둘 요량으로 상대했더니 옷소매가 찢어져 버렸다.
이 옷은 산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연수가 사준 옷이었다.
힘들게 도둑질 한 돈으로 사준 옷인데 찢어 먹다니 스멀스멀 화가 올라왔다.
더 가관인 것은 앞에 비적 놈들이 잘난 듯 자신을 압박해 오는 것이었다.
순간 살심이 치솟아 오르는 공숙.
살심이 치솟아 오르자 영롱한 초록빛의 아름다운 공숙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지며 꿈에 볼까 두려운 눈으로 변해 버렸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의 눈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