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연수는 목이 돌아간 두 무사를 뒤로하고 공숙을 봤다.
“누이···. 이게 무슨 꼴입니까?”
“연수? 연수야? 맞아?”
“맞아요. 저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고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이런 놈들쯤 한 수에 박살 낼 수 있잖아요.”
“그, 그게···.”
막 뭐라 설명하려던 공숙의 눈으로 빠르게 눈물이 차오르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흐어엉 흑”
울음을 터트리는 공숙을 보고는 무언가 사건이 있음을 짐작한 연수는 주변을 살피며 두 시체를 들고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일단 그만 울고 따라와요.”
숲에 들어온 연수는 시체를 내려놓고 말했다.
“일단 시체부터 숨겨요.”
연수가 나무로 땅을 파기 시작하자 공숙도 연수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땅을 파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연수와 공숙.
땅을 파는 공숙의 손에서 그간의 고생이 만만치 않았음이 고스란히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땅을 파는 공숙의 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부님이 돌아가셨어. 크흐흑 그 나쁜 놈이 사부님을 죽였어. 흑흑”
“누가 처 선배를 죽였다는 거예요?”
놀란 연수는 움직임을 멈추며 공숙을 봤다.
“남궁세가 소가주라는 그놈! 그놈이 너와 사부님이 함께 있던걸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시비를 걸어 왔었어. 사부와 싸움이 있었는데, 사부조차 그놈과 그놈의 부하들의 합공에는 상대가 안 돼서 도망을 쳤어···.”
“그랬는데요?”
“사부가 나한테 그랬어. 절대 무공을 쓰지 말고 면도도 하고 작은 마을로 숨어 들어가라고. 절대 무공을 드러내지 말랬어.”
“그리고요?”
“나를 숨겨 놓고 사부와 그놈들이 한판 붙었는데···. 그 비겁한 놈이 사부를 이겼어. 그리고 네 용모파기를 꺼내고는 이것저것 캐물었는데 대답하면 사부를 살려준다 해서 사부가 연수 너에 대해 다 말했어. 그런데 다 말했는데 우리 사부님이 다 말했는데도 그놈이 사부를 죽였어.”
‘그랬나···. 그래서 그놈이 내 변장을 알아보았구나.’
“흐흑... 미안해 사부는···. 사부는 어쩔 수 없었어.”
“알아요. 괜히 나와 엮여서···. 나야말로 미안해요.”
“그런데 소문을 들었어. 암수일살이라는 놈이 그놈을 죽였다고···. 그리고 쫓기고 있다고. 무림맹까지 나서서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암살한 살수를 뒤쫓는다고 들었어.”
연수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쳐 갔다.
지난번에도 들었던 별호다.
암수일살.
분명 남궁진수를 죽일 때 함정까지 이용하고 암습을 망설이지 않았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살수라는 말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사부는 그날 그랬어. 대성하기 전까지 절대 무를 드러내지 말고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던 거에요?”
“내가···. 내가! 사부의 말을 거역하고 하산해서 사부가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사부의 유언은 꼭 지켜야 해.”
연수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숙에게 화가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숙의 사부가 죽은 인과를 따져 보자면 자신의 탓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걸 공숙에게 돌렸는지도 몰랐다.
“아휴! 답답하기는! 그렇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치욕을 당하면서도 무공을 숨겨야 하겠어요? 정체도 다 들켰는데!”
“그래도···. 그래도 사부님의 말을 지켜야 해.”
안타깝고 미안하고 화가 났다.
이런 허접한 놈들이 자신 때문에 활개를 치며 공숙에게 못된 짓을 하려 했다 생각하면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연수는 대충 파놓은 땅속에 두 시체를 대충 구겨 넣고 흙을 덮었다.
그리고는 제법 큰 바위를 밀고 와서 그 위를 막아버렸다.
두 시체가 묻힌 곳 위에 침을 뱉은 연수는 공숙을 잡아끌었다.
“가요.”
“어디를?”
“어차피 갈 데도 없잖아요? 돈도 없을 테고.”
“응···.”
“이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수련을 할거에요. 같이 지내요.”
“사부가···. 너한테 얹혀서 짐이 된 건 잘못이라고 했어.”
“의남매나 마찬가지이니까 짐이 아니고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도···. 안된다고···.”
“내가 괜찮으면 상관없는 거예요.”
공숙은 연수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화났어?”
“아뇨.”
“네가 암수일살이지?”
“아마도요.”
“정말 네가 남궁진수 그놈을 죽인 거야?”
“예.”
“고마워. 사부님 원수를 대신 갚아 줘서.”
“...”
연수는 미안하다는 말을 차마 더는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보다 이 근처 지리를 좀 알아요?”
“어느 정도는 알아.”
“여기 마을 말고 이것저것 물건을 살 수 있는 마을은 없어요? 여기는 무림맹 무사들이 지키는 것 같은데···.”
“사십 리 정도 가면 다른 마을이 있어.”
연수는 공숙을 데리고 이동하여 그 마을에서 솥이며 소금과 쌀 옷가지를 한 아름 사서 큰 솥에 담고는 산길을 올랐다.
연수와 공숙은 큰 솥을 들고 산길을 올랐는데 공숙이 연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다음에 갚을게.”
“안 갚아도 돼요.”
“근데 왜 이 큰솥을 두 개나 샀어?”
“하나는 밥하고 하나는 물도 데우고 반찬도 해야죠.”
“근데 오두막은 어디 있어? 멀었어?”
“이제 적당한 곳에 지어야죠.”
“너 오두막도 지을 줄 알아?”
“지으면서 익혀야죠.”
“...”
공숙은 황당한 표정으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연수가 공숙과 지낼 방 두 칸짜리 오두막을 짓는 대는 열흘도 넘게 걸렸다.
전체적인 구조는 사부와 살았던 초옥과 비슷했지만, 그와 비교하면 형편없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볼품없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두막을 완성한 연수는 나름 뿌듯했다.
고운 흙을 물에 게워 솥 주위에 발라 나름 아궁이까지 만들어놓으니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되었다.
“오늘부터는 이슬은 안 맞고 자겠네요.”
“응!”
“이제 여기 앉아 봐요.”
“왜?”
“알려줄 게 있습니다.”
“뭔데?”
“음영체심공 이라는 심법이에요.”
“나는 이미 심법을 익혔어.”
“중복으로 익혀도 돼요.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어디서 구했는데?”
“훔쳤어요.”
“뭐?”
“황궁에 무고에서 훔쳤습니다.”
“정말 너희 사문이 도둑놈의 문파야?”
“뭐···. 비슷···. 하긴 하죠. 그냥 무투문이라고 불러요. 어감상 이게 더 좋네요.”
“도둑질은 하면 안 되는데···.”
“내가 도둑질한 돈으로 숙누나 거북이도 사 먹이고 고기도 사 먹이고 한 거예요. 누나도 공범이에요.”
“헉! 정말? 나도 도둑년이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공숙.
“됐고, 빨리 앉아 봐요. 사무진독공을 대성해야 한다면서요. 사부의 유언을 어기려고 그래요?”
“그 음영체심공을 익힌다고 사무진독공이 발전하는 건 아니잖아.”
‘이럴 때는 논리적이네.’
“도움이 될 거에요.”
“너는 사무진독공에 대해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
“음영체심공은 음기가 강한 심공이에요. 넘치는 양기를 누르고 음양을 조화로이 만들어주면 분명 무공이 진일보할 겁니다.”
“그래?”
“일단 앉아 봐요. 아시겠지만 심법을 운공하면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제가 일단 진기 인도를 하면서 구결을 알려줄게요.”
공숙은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그 뒤에 연수가 앉아 공숙의 등에 손을 대고 음영체심공의 구결대로 기를 인도하며 진기를 밀어 넣었다.
공숙의 내기가 반응하며 연수가 이끄는 데로 내력이 따라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소주천을 이루자 갑작스레 공숙의 몸속에서 내기가 날뛰기 시작했다.
넘치던 양기가 소주천을 이루며 바뀌는 음기에 반발하며 날뛰는 것이다.
‘헉! 이런!’
연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공숙의 양기를 누르며 진기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상을 입으며 멋대로 날뛰는 양기가 공숙의 기맥과 혈을 모두 상하게 해서 크게 위험할지도 몰랐다.
더 강력하게 진기를 끌어올려 공숙의 양기를 누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공숙의 내기를 인도하고 계속해서 음영체심공의 구결대로 돌렸다.
점점 속도가 붙으며 익숙하게 공숙의 내기가 돌기 시작하자 덩치를 불리며 생성되는 음기가 날뛰던 양기와 만났다.
‘헉! 이대로 두 기운이 부딪히면 위험하다.’
연수는 갑작스러운 두 기운의 반응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공숙의 몸속에서 양기와 음기는 서로 꼬여 가며 공숙의 몸을 휘돌았다.
한참을 기맥을 맹렬히 돌며 점점 합쳐지는 두 기운.
-쾅!
공숙과 연수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공숙의 몸속에서 휘몰아치던 두 기운이 임독양맥을 뚫고 지나가며 연수는 공숙의 몸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헉헉······. 하아···.”
숨을 몰아쉬는 연수.
연수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공숙 역시 운공을 하며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연수는 초조한 마음으로 공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진이 훌쩍 지나가고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공숙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공숙의 눈에서 반짝이는 안광이 폭사 되어 나왔다.
“축하해요.”
“고마워. 연 동생 덕분에 기연이 닿았어.”
“부럽습니다. 앞으로 음영체심공도 열심히 익히면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응!”
연수와 공숙이 산속 오두막에서 지낸 지 반년이 지나가는 어느 날.
“연 동생!”
“예?”
막 오전 수련을 끝낸 연수의 귓가에 공숙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요?”
“음영체심공에 부작용이 있어!”
연수는 마음속이 뜨끔하며 서둘러 공숙의 몸을 살폈다.
‘역시 여자의 몸으로 익힐 수 없는 무공인가?’
“괜찮아요? 무슨 부작용이에요?”
“가슴이 자꾸 커져!”
“에?”
순간 멍해지는 연수의 표정.
“예전에 다 자란 작은 가슴이 이제 와 자꾸 커져. 아무래도 음영체심공의 부작용 같아. 어쩌지?”
“그, 그게···. 음···. 부작용이 맞는 거죠?”
“그럼! 이렇게 계속 커지면 얼마나 불편하겠어?”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공숙이 수염이 자라지 않고 피부가 매끈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했다.
또 몸매의 선이 아름다워진다는 것 또한 느끼긴 했다.
그런데 그게 가슴이 커지며 벌어지는 일인인지는 몰랐다.
“그···. 여자가 가슴이 큰 건 좋은 일일이에요. 아마도.”
“정말? 왜?”
“아마 남자들이 좋아할걸요?”
“그게 뭐야.”
“정말이에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
그때부터였다. 마을만 가면 몸에 쫙 붙는 옷을 사 와서 공숙이 입고 다니던 것은.
그렇게 둘은 무공을 익히며 3년이라는 시간을 어설프게 지어놓은 오두막에서 지냈다.
“숙 누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네요.”
“응.”
“숙 누이는 강호에서 뭘 할겁니까?”
“나는 그날 사부를 몰아붙였던 남궁세가의 그 일곱 무사 놈들의 목을 잘라 사부님의 무덤 앞에 올려야지.”
말을 하는 공숙의 주위로 차가운 한기 피어올랐다.
“그러는 연 동생은?”
“저야 계속하던 일을 해야겠죠.”
“도둑질?”
“그런 표현보다는 투행이라고 해주시면 어떨까요?”
“칫, 그게 그거지. 연 동생은 이렇게 고수가 되어서도 도둑질을 계속하게?”
“더 많은 무공을 보고 싶어요. 영약도 욕심이 나고요.”
“여, 영약?”
“많이 훔치면 하나쯤 줄게요.”
“그래! 약속했다.”
“네. 인제 그만 하산하죠.”
“응!”
“아, 가는 길에 면사를 구해줄 테니 하고 다니세요.”
“왜?”
“주변의 눈길을 끌어 좋을 일 없으니까요. 숙 누이의 외모는 아무래도 눈에 띄어요.”
“그래? 불편할 것 같은데···.”
“조금 불편한 게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는 것보단 나아요.”
“알았어.”
“그럼. 갑시다.”
오래 함께한 오두막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기던 연수가 슬쩍 뒤로 손을 흔들자 그간 시간을 보냈던 오두막이 무너져 내렸다.
하산하는 두 사람의 신형이 경사진 산길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서호요.”
“서호? 거기는 왜?”
“꼭 봐야 할 친구가 있어요.”
“...”
신이 나서 속도를 내는 연수의 뒤를 공숙은 묵묵히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