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연수는 한동안 요상결을 운공 하며 몇 번이나 피를 게워냈다.
어느 정도 급한 상태를 해결한 연수가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는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 검상을 입은 왼팔에 바른 연수는 천천히 내력을 일으키며 경공을 펼쳐 북동쪽으로 달렸다.
남궁진수의 품에서 훔쳐낸 영약을 복용하고 싶었지만 언제 뒤를 잡힐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길면 몇 시진을 흡수해야 하는 영약이기에 연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일단은 뒤로 밀었다.
최대한 빨리 북경을 벗어나 도망쳐야 했다. 자칫 추적을 당하기 시작하면 살아남기 힘들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연수의 본능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요상 하느라 너무 시간을 지체해 버렸어.’
쉼 없이 달리며 달리고 또 달리는 연수.
며칠을 밤새워서 달리고 걷고를 반복하던 연수는 멀리 보이는 마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내력은 바닥나 한 줌의 진기도 남지 않았고 입고 있던 옷은 다 찢어져 있었다. 거의 탈진하여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연수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객잔을 찾아 음식을 시켜 걸신들린 마냥 음식을 퍼먹고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객잔의 점소이는 혹시나 반 거지꼴인 연수가 도망을 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연수를 지켜봤지만, 연수는 값을 치르고는 새 무복을 사 입고는 다시 객잔으로 돌아와 방을 잡았다.
객방에 들어서자마자 그간 쥐어짜며 텅텅 빈 단전을 채우기 위해 운기를 시작했다. 단전을 채우고 영약을 복용할 생각인 연수였다.
막 운기를 끝냈는데 무인들의 기척이 연수의 기감을 자극했다
급히 이목공을 끌어올리는 연수.
“분명 이런 모습을 한 놈이 여기 왔었던 말이지?”
“예···. 두 시진 전쯤에 삼 층 객방을 얻어 올라가셨습니다.”
연수는 거기까지 듣고 객방의 창문을 열고 객잔을 벗어났다.
물론 밑에 온 무림인들이 찾는 것이 꼭 자신이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연수의 본능은 아직 위험이 끝나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었고, 연수는 그 경고를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겨우 반나절 만에 이렇게 가까워졌다면···.’
만약 자신을 쫓고 있는 이들이 맞는다면 추적술에 일가견 있는 전문 추적조가 붙은 것이 틀림이 없었다.
사실 말을 사서 섬서나 감숙으로 이동하려던 연수였지만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분명했다.
연수는 요녕으로 방향을 잡고 산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산을 통해 이동하면 아무래도 흔적은 많이 남겠지만 말을 통해 쫓기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적에게 퇴로를 끊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특히나 쫓는 자들이 몇이나 되는지 그 규모를 알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십 중 십 남궁세가겠지.’
남궁세가의 추적이라면 분명 자신을 생포하려는 생각 따윈 없을 테니 지금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수들을 보냈을 것이다.
연수의 도주는 열흘 동안은 나쁘지 않았다.
열흘 동안 적과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나름 약초학에 일가견 있던 연수였기에 약초와 벽곡단을 씹어 먹으며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런 연수가 위기와 마주친 것은 도주 열 하루째 되는 날이었다.
낮에 뜨는 해와 밤에 뜨는 별만을 보며 북동쪽으로 이동하는 연수의 도주 길을 미리 앞질러 온 세 명의 무사와 마주친 것이다.
물론 연수는 붙이고 있던 점도 수염도 떼어 냈지만 세 명의 청색 무복을 입은 무사들은 검을 빼 들고 연수의 앞길을 막았다.
“뭐, 뭐요? 녹림의 협객들이시오?”
연수는 청색 무복만 보고도 상대가 남궁가의 무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연수의 물음에도 세 무사는 품에서 꺼낸 용모파기를 보며 연수를 노려보았다.
“아닌 것 같은데···.”
한 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른 무사하나가 다른 용모파기를 꺼내어 들었다.
“이것과는 비슷해.”
다른 용모파기를 건네받은 무사의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류 하나와 이류 둘.’
연수는 양손을 들며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나리님들 저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약초나 캐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약초꾼입니다.”
무사들은 연수를 노려봤다.
“약초꾼이라면 망태기와 약초 캐는 호미는 어디 있느냐?”
연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라면 저기 있지 않습니까?”
연수가 왼손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세 무사의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연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연수의 오른손이 무음의 바늘 세 개를 쏘아냈다.
“큭!”
“다, 당했어.”
“독이야!”
세 무사는 당황하며 검 끝으로 연수를 경계하며 눈을 부라렸다.
“지금 너희가 당한 독은 지사독이라는 독이다. 온몸에 퍼지는 시각은 일각. 독이 온몸으로 퍼져 버리면 무슨 짓을 해도 해독할 수 없다. 지금도 분명 내기를 끌어올려 독기를 막고 있겠지? 너희들 실력으로는 한 시진 이상은 막아놓기 힘들 거야. 살고 싶으면 당장 운기 해서 독기를 발끝 여태혈로 몰아서 중지 발가락을 잘라야 살 수 있다. 그나마도 지금 당장 해야만 생사를 장담할 수 있어. 어때? 목숨 걸고 신호를 보내 나를 막을 것이냐? 그렇다면 너희는 십 중 십 죽는다. 난 해독약 따위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까. 아니면 너희는 운기를 하고 나는 도망을 가고 서로 좋은 일을 좀 해볼까?”
연수의 말에 시시각각 변하던 무사들의 표정은 망설임이 가득했다.
결국, 무위가 낮은 두 무사가 제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큭! 두고 보자.”
“얼마든지. 신호를 보내면 난 꼭 돌아와서 너희와 사생 결단을 낼 거야.”
연수가 경공을 펼치며 장내를 벗어나자 남은 무사 또한 주저앉았다.
‘젠장! 추적의 속도가 너무 빨라.’
연수는 하루 열두 시진 중 한 시진 정도를 빼고는 계속해서 이동했다. 그런데 겨우 열하루 만에 적들과 마주치는 것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대로 가게 되면 머지않아 연수는 적들에게 둘러싸일지도 몰랐다.
결국, 연수는 천리견보를 펼치며 네발로 산세가 험한 길을 뛰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경공을 펼치면 정작 위험할 때 내력이 부족해 저항도 못 하고 낭패를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도무지 답이 없어 보였기에 할 방법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연수는 천리견보를 펼친 지 한 시진이 채 되지 않아서 단전이 공허해짐을 느꼈다.
허리를 펴며 일어선 연수는 두 발로 서서 뛰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대영심공과 다르게 무영심공을 익히며 그나마 운기를 하지 않아도 단전에 채워지는 내기의 양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었다.
‘무영심공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수련할 수만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연수는 무영심공 중 몸을 움직이며 내력을 수련하는 동공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대영심공은 오로지 앉아서 수련하는 좌공이었다면 무영심공은 좌공과 동공을 나눠 수련하는 방식이었다.
동공을 조금이라도 수련하여 그 개념을 익혔다면 지금처럼 달리면서도 내기를 채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쫓기는 와중에 동공 수련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참으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무사들과 마주친 후로 십오 일이 더 지났다. 겨우 십오 일만에 연수의 얼굴은 핼쑥해 져 있었다.
얼굴뿐이 아니라 몸 또한 왜소해진 감이 없지 않았다.
족히 열 근 가까이 살이 빠져 보이는 연수였다.
“헉···. 헉···.”
내력은 바닥을 쳤고, 벽곡단이 떨어지는지도 열흘이 넘었다.
머릿속은 영약을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영약을 지금 먹게 되면 제대로 흡수를 할 수가 없음은 분명했다. 아마도 운이 좋아야 일할 정도 흡수할 텐데 그것이 너무 아까웠다.
하루만 딱 하루만 있다면 영약을 모두 흡수 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계속해서 움직이다가 물소리가 들려오면 목을 축이는 것 외에는 지나가다 눈에 띄는 풀을 뜯어 먹는 것이 전부인 연수.
체력적 한계는 이미 예전에 지났다.
그런데도 잠시도 쉬지 못하고 움직이는 이유는 가끔 등 뒤로 들려오는 호각 소리와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저 새끼들은 잠도 없나···. 질리지도 않고 쫓아오네.”
도무지 안 되겠다 싶었던 연수는 눈앞에 보이는 큰 나무 위로 올라가 커다란 나무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을 시작했다.
‘일각만···. 일각만 내기 좀 채우자.’
내력이라도 채워 놓지 않으면 도무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던 연수는 호흡을 통해 빠르게 채워지는 단전에 따뜻함에 번뜩 눈을 뜨며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아주 잠시였지만 운기를 하며 그대로 수마에 빠질뻔한 연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지금 잠들면 십 중 십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조금 차오른 내기를 돌리며 천리견보를 펼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적술을 배워놨어야 했어. 어떻게든 배워만 났으면 추적을 피하는 방법을 알았을 텐데···.’
연수는 후회하며 빠르게 비어 버린 단전을 느끼고는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이대로는 안 되는데···.’
도무지 길이 없다고 판단한 연수는 달리면서 팔을 휘저었다.
무영심공비급에 적혀 있던 동공을 상체만 사용해서 펼쳐보는 중이었다.
체력 소비가 더욱 심해지겠지만 이제는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규모를 알 수 없는 적에게 위협받으며 도주하느라 이미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몰릴 만큼 몰린 연수였기에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했다.
팔을 휘저으며 동공의 움직임을 따라가자 단전에 얼마 남지 않은 내력이 일어나며 연수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내력이 연수의 몸을 휘돌았다.
상체의 곳곳의 기맥과 혈을 지나며 순환되던 내기들이 단전으로 돌아갈 때마다 조금씩의 내기가 더 붙어 양을 불리고 있었다.
쥐꼬리만큼의 내기였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단전을 차는 그 양이 많았기에 연수는 그나마 만족할 수 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에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며 멈춰선 연수.
“하아···. 헉···. 하···. 헉······.”
잠시 숨을 몰아쉰 연수는 더는 뛸 힘마저도 없어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산딸기 몇 개가 연수의 눈에 들어왔다.
허겁지겁 몇 개 되지 않은 산딸기를 따 먹고는 주변을 파헤치는 연수.
그런 연수의 손에 손바닥만 한 하수오가 뽑혀 나왔다.
‘하늘님 감사합니다.’
연수는 대충 흙만 털어내고는 입에 하수오를 집어넣고는 우적대며 씹었다.
흙과 함께 씹혀지는 하수오로 인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근 열흘 만에 무언가를 입안 가득 넣고 씹는 연수였기에 이것만으로 감지덕지했다.
빠르게 걸으며 하수오를 전부 씹어 삼킨 연수는 이목공을 잠시 펼치며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연수는 그쪽으로 이동하여 차디찬 물줄기에 입을 박고 목을 축였다.
한참을 마신 후 꺽 트림하고는 다시 팔을 휘두르며 달리는 연수.
그로부터 다시 칠 일이 지난 시점에 연수는 한 명의 중년 무인에게 앞길이 막혀 있었다.
가슴까지 오는 제법 긴 검은 수염을 곱게 기른 중년인은 마주한 순간 연수는 과연 내일의 해를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연수의 몰골만큼 중년인의 모습 또한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머리는 오랜 여정에 흐트러져 있었고, 연수의 무복처럼 여기저기 찢긴 옷차림과 퀭한 눈 밑을 보면 연수만큼이나 기력을 소모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소가주의 목을 뺐은건 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