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벽착공만 익혔어도···. 이런 짓 안 해도 될 텐데.’
웬만한 고수들보다도 손가락단련에 힘을 쓴 연수였지만 아무리 경신공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어도 작은 못 끝만 붙들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것 자체만으로 상당한 내력을 소모하기에 황궁 한가운데에 잠입한 연수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악에 상황이 닥쳐오면 도망갈 최소한의 내력은 유지해야 하는 연수였다.
‘제발 안으로 들어가라.’
겨우 여기까지 왔지만, 문이 열리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나 다름없다.
“또 잠도 못 자고 목록조사야?”
경비가 어린 내관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묻자 고개를 푹 숙인 내관이 애써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상공공이 아끼는 도자기를 깨버렸는데 이 정도면 약과죠.”
“그래, 수고해라.”
연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못을 뽑아서 다시 박아가며 문 쪽으로 이동했다. 만약 저 어린 내시나 병사가 위를 쳐다본다면 단숨에 발각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보화전 문이 열리자 연수는 바퀴벌레처럼 천장에 붙어 내시와 동시에 보화전으로 들어갔다.
보화전에 들어온 내시는 들고 있던 등에서 초를 꺼내 곳곳에 옮겨 붙여 안을 밝혔다.
“하~암!”
‘쳇!’
순간 하품을 하는 내시.
연수는 바로 내시의 머리 위 천장에 매달려 있었는데 만약 여기서 어린 내시 놈에게 들키면 분명 도망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연수의 시선에 천천히 입을 벌리며 고개를 드는 내시의 행동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못을 잡은 손을 놓으며 아슬아슬하게 내시의 바로 뒤로 떨어져 내리는 연수.
아무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떨어져 내린 연수는 숨까지 멈추고 어린 내시의 등 뒤에서 내시의 행동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다.
한순간 실수해서 기척을 들키거나 내시의 시선에 닿으면 모든 게 끝장이라 생각한 연수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시의 등 뒤에서 천천히 어린 내시의 행동에 따라 이동하며 그의 시선을 피하는 연수.
어린 내시가 책장이 도미노처럼 세워진 공간으로 이동하자 조심히 숨을 내쉬며 책장 뒤로 몸을 숨기는데 성공한 연수는 조용히 책장을 타고 천장 기둥에 매달렸다.
어린 내시는 품에서 서책을 꺼내고는 구석에서 책장의 책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연수는 내시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내시와 반대쪽으로 이동해서 책장의 책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무공비급은 단 한 권도 보이질 않았다.
‘이 안에 무고가 따로 있는 건가?’
연수는 보화전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무공비급이나 다른 공간은 보이지를 않았다.
‘쳇! 잘못 찍은 건가?’
그때 어린 내시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는 기척을 느낀 연수.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시가 나갈 때 열리는 보화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다시 천장으로 매달리려 하는데 발끝에 뭔가 묵직한 것이 걸리며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찰캉
순간 숨을 들이마시며 이목공을 끌어올리는 연수.
“또 쥐가 들어왔나? 내일 상공공에게 말씀드려야겠네.”
‘후우.’
연수는 눈에 내력을 집중하며 발에 걸린 물체를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커다란 자물쇠였다.
두꺼운 쇠사슬이 연결된 자물쇠는 바닥에 작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밑에 공간이 있는 건가? 어쩌지?’
지금 내시를 따라 나가지 못하면 이 안에 갇히고 만다.
해가 뜨려면 고작 두 시진도 남지 않았기에 연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수가 망설이는 순간에도 내시는 보화전의 입구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미치겠구만.’
연수는 결국 남기로 결정 하고 내시가 나가며 굳게 닫히는 보화전의 커다란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별거 없으면 진짜 보화전에 불이라도 질러야지.’
연수는 품에서 긴 바늘을 꺼내서 조심히 자물쇠를 따기 시작했다.
-철컹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열리는 자물쇠. 연수는 천천히 자물쇠와 사슬을 치우고 바닥 문을 올렸다.
먼지와 함께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린 것처럼 안의 공간이 연수의 눈에 들어왔는데 안에서 꿉꿉한 책 냄새가 연수의 코로 들어왔다.
연수는 품에서 화섭자를 꺼내 호호 불자 화섭자에 불이 붙으며 컴컴한 공간의 안이 밝아졌다.
다행히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는 작은 등잔이 있어 그곳에 불을 붙인 연수는 등잔으로 주변을 밝히며 밑으로 내려갔다.
보화전의 지하 공간에는 꽤 넓은 공간이 책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책장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일 첫 번째 책장에는 황궁 창위라고 쓰여 있었는데 여러 권의 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그중 대영심공이라는 제목의 비급이 연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대영심공? 설마!’
연수가 비급을 꺼내 펼쳐 보자 역시나 자신이 익힌 대영심공과 똑같은 무공이었다.
‘어쩐지 그 동창 놈들 기척이 익숙하다 했다.’
그 외에도 금의위 위사들이 익히는 무공부터 여러 무공이 있었고 제일 밑에는 무영심공과 음영체심공이라는 비급이 있었다.
연수는 본능적으로 무영심공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대영심공과 단순히 이름이 비슷하고 같은 책장에 꼽혀 있어 손이 갔던 무영심공.
‘대영심공과 궤가 같잖아.’
무영심공의 비급을 읽는데 모든 구결이 대영심공과 비슷하며 조금씩 달라 머릿속에 모든 구결이 정리되는 연수.
맨 뒷장으로 넘어가자 대영심공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대영심공을 5성 이상 성취하고 무영심공을 익히면 상승의 내력을 쌓을 수 있다.-
‘상승의 내력?’
연수는 일단 자리에 주저앉아 무영심공의 구결을 천천히 외웠다.
대영심공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신중하게 한자씩 재차 확인하며 외운 연수는 음영체심공이라는 비급으로 손을 뻗었다.
비급의 첫 장에는 음영체심공의 특성과 부작용이 적혀 있었다.
-음영체심공은 사람의 몸에 음기를 키우는 심법이다.
음한지공을 익혔다면 더 강한 음기를 체내에 길러내어
강력한 위력을 발휘 할 수 있게 해주며 보조의 심공이기에
어떤 심법을 익혔든지 익히는 데에 지장이 없다.
-부작용 남자가 3성을 익히면 목소리가 얇아지고 5성을
넘어가면 수염이 자라지 않게 되며 8성에 다다르면 몸의 선
이 얇아진다.
10성을 넘기면 가슴이 자라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성할 경우 성기가 쪼그라들어 제 기능을······.
-탁!
연수는 음영체심공을 소리 나게 덮으며 책장에 꽂아 넣었다.
‘별 쓸데없는 무공을 다 보겠네. 내시들이 익히는 무공이구만.’
연수는 그 외에도 많은 비급을 살펴보며 혹시 아는 무공이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연수가 아는 상승의 무공은 없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듣도 보도 못했던 수많은 비급이 존재했다.
‘이걸 다 읽어 보고 나가야 하는데···. 아휴.’
연수는 상승 경공의 비급들을 읽어 보며 천리견보가 얼마나 경신의 공부에 훌륭한 무공인지 알 수 있었다.
‘아! 과연 이런 식으로 중심을 잡는구나.’
다른 경공들과 비교하여 천리견보의 수정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연수.
그 외에도 각종 권각술이나 단검술에 대한 비급들을 쭉 읽어 본 연수는 슬슬 해가 떠오를 시간임을 깨닫고는 고민했다.
‘며칠 더 있어 볼까? 어차피 나가려면 어린 내관이 들어올 때를 노릴 수밖엔 없는데···.’
낮이 되면 내정보다는 외조에 경계가 더 삼엄해진다. 황제가 집무를보는 태화전이 있는 외조의 경계가 삼엄해지는 건 당연한 일.
결국, 황제가 내정으로 돌아가는 밤을 노려 탈출해야 하는데 밤이 돼도 그 어린 내관이 다시 벌을 받으러 온다는 보장이 없다.
연수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손바닥 위로 뒤집어 봤다.
우수수 연수의 손바닥으로 떨어지는 벽곡단.
사부의 조언으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항상 지니고 다니던 비상식량이었다.
‘하루 두 개씩만 씹어 먹으면 열흘은 족히 버티겠지. 하지만 물이 없으니 일주일 이상 버티기는 힘들다. 더 버텼다가는 탈출하는데 필요한 기력을 모두 소진할 거야.’
연수는 일단 보화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가서 머리로 바닥 문을 밀며 살짝 들고는 그 틈으로 자신이 열었던 자물쇠를 사슬과 연결하여 잠가 놓았다.
혹시 낮에 누군가 보화전을 살피다가 이 자물쇠가 열려 있는 걸 발견하면 난리가 날 테니.
일단은 버텨 보자.
연수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새롭게 얻은 무영심공을 운기 했다.
호흡을 통해 흡수한 기를 단전으로 보내며 단전에 쌓여 있는 내기를 전신으로 돌리는데 대영심공을 운기 할 때보다 더욱 빠르게 내기가 회전하며 연수의 몸을 휘돌았다.
구결을 외며 전신의 혈에 내기가 돈다.
흡수하는 내기의 양이 대영심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양.
운기 하는 연수의 몸이 마치 어둠과 동화되듯 흐려졌다.
넓고 튼튼한 연수의 혈맥과 기맥을 통하여 흐르는 내기의 양이 많아질수록 단전으로 돌아와 쌓이는 내기 또한 늘어나며 연수의 운기가 끝났다.
‘이래서 상승의 심법이라고 했구나. 내기가 쌓이는 양이 비교가 안 돼. 사부님께 나중에 꼭 전해 드려야지.’
운기가 끝나자 연수는 다시 책장들을 살피며 다녔는데 황궁 창위라고 쓰인 책장을 다시금 지나는데 음영체심공이 또 눈에 들어왔다.
‘아! 공숙누님! 어쩌면···.’
연수는 다시 음영체심공을 펼쳐 그 안에 구결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구결 옆에는 주석이 달려 해당 혈도와 혈맥 그리고 풀이가 적혀 있었다.
천천히 구결을 모두 외운 연수는 음영체심공이 어쩌면 공숙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양기가 강한 독공을 익히느라 수염이 자랐으니까 음영체심공으로 음양의 조화를 맞추면 수염은 사라질지도 모르겠네.’
음영체심공의 부작용에는 여성이 익히면 넘치는 음기로 인해 매일 남자와 방사를 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지만 공숙에게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한참을 구석구석 살피며 여러 책장을 돌아보던 연수의 눈에 특이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잡무?’
연수는 잡무서라 적힌 책장의 비급들을 살펴보았다.
삼재심법부터 육합권 팔방일도 구지보 등등 무림의 하수들이 자주 쓰는 무공들이 쭉 있었는데 그중 연수의 눈길을 잡아끄는 제목이 있었다.
‘파식서?’
연수는 비급을 꺼내 펼쳐 보았다.
-모든 초식을 파훼하는 방법.
무공의 시작은 결국 신체다. 그 말은 모든 무공은 초식이 빠질 수 없다는 말이고 이 초식을 효과적으로 파훼할 수 있으면 천하제일의 무인이 되는 것 또한 불가능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 ... ... 하여 초식의 흐름을 읽고······. 수련한다면 결국 모든 초식은 파훼가 가능할 것이다.
꽤 두꺼운 비급이었지만 안에는 어떤 무공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저 저자의 생각인지 깨달음일지는 모르겠지만 허무맹랑한 세상 모든 무공의 초식을 파훼할 수 있다는 수련법과 방법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는데 연수로서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겨우 이 정도로 모든 무공을 파훼할 수 있으면 누가 고생해서 무공을 익히나.’
연수는 그 외에도 암기에 대한 비급이나 기공에 대한 원론적인 정리를 해 놓은 기서들을 쭉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슬슬 피곤해지자 등불을 끄고 요상결을 운공한 후 구석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연수가 무고에 들어 온 지 나흘째.
‘이제 슬슬 위험하다.’
밤마다 이목공을 펼치며 귀를 기울여 보고 있지만, 밤중에 누군가 들어 오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연수는 더는 비급을 찾아 읽지 않았다.
조금의 기력이라도 더 보전하려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시간을 보내며 요상결을 계속 운기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목공을 펼치며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연수.
그런 연수의 귀로 보화전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