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어? 이석아!”
평소 연수를 좋아하며 이것저것 참견하기 좋아하던 주충부터 얼굴을 아는 몇몇 무사들이 경화루 1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것이다.
연수는 잠시 한숨을 푹 쉬고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으며 일행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너, 이놈! 어디 멀리 떠난 줄 알았더니 아직 패주에 있었구나.”
“예. 한동안 머리도 식히고 쉬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외출 한번 않던 놈이 웬일이야? 이 비싼 곳을 다 오고?”
“그래도 패주에 있으면서 한 번쯤은 이곳에 와 봐야 패주에 있었다고 어디 가서 말이라도 꺼낼 것 아니에요.”
“하하하 맞다. 패주에선 경화루를 다녀가 봐야지. 이리 와라. 합석하자.”
“예···. 그래요.”
연수는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역시나 1층에는 팽가의 일행이 보이질 않았다. 잠시 위층
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아쉽게 바라보는 연수.
“아서라, 한 층을 올라갈 때마다 가격이 배로 뛰는 곳이다. 우리는 1층이 딱 맞아.”
“그래요? 선배님들. 그동안 잘 대해 주셨는데 제대로 보답 한 번 한 적이 없네요. 오늘은 제가 그동안의 온정에 보답하는 의미로 낼 테니 위층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연수의 말에 몇몇 무사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서라. 일 년 번 돈 하루아침에 날릴래?”
“그깟 돈이야 또 벌면 되지 않습니까? 올라가세요. 저기 여기 자리 좀 옮깁시다.”
연수는 지나가는 점소이를 붙들고 아예 자리를 옮겨달라고 했다.
몇몇 무사들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충을 비롯한 몇몇 무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이 정도 인원이면 못해도 금자 몇 개는 우습게 나갈 거야.”
“선배들한테 사는 술값이 아깝겠습니까? 올라가세요.”
한 층을 올라가자 1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스러운 2층의 모습이 나타났다.
1층은 전체적으로 붉은색 비단으로 안을 꾸며 놓았다면 2층은 금색으로 칠을 했나 싶을 정도로 번쩍였다.
“와~”
묵연대 무사들로서도 이 층에는 올라와 본 적이 없었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2층을 죽 둘러본 연수는 팽가 일행이 안 보이자 한 층을 더 올라갔다.
“2층에 만족하면 안 되죠. 올라갑시다.”
“이석아!”
한층 더 올라간다는 말에 놀란 주충이 연수의 팔을 잡고는 귀에다 속삭였다.
“무리하지 마라, 이곳 술값 장난 아니야.”
연수는 씩 웃고는 앞장서서 점소이를 재촉했다.
3층의 경화루는 화려한 1, 2층과 달리 옥과 흑단목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품격이 느껴지는 검소함에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기품이 느껴졌다.
1, 2층과는 다르게 3층은 제법 한산하여 자리가 많이 남아있었다.
연수가 주변을 돌아보자 창가 쪽에 팽가의 일행이 보였다.
연수는 그들과 반대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들 뭐 하세요? 어서 앉으세요.”
신이 났던 무사들마저 주눅이 든 표정으로 엉거주춤했다.
“저, 저기···. 괜찮겠냐?”
“걱정하지 마세요.”
무사들이 전부 착석하자 연수는 점소이를 불렀다.
“이곳은 뭐가 좋습니까?”
점소이는 침착하게 경화루의 음식과 주종을 설명했다.
“옥연주? 처음 들어보는 술이네요. 그 옥연주 다섯 병과 괜찮은 요리로 서너 가지 넉넉하게 가져다주세요.”
“예. 무사님 저희 경화루의 삼 층은 선금을 받는데 괜찮으신가요?”
“그래요?”
“예. 저희 삼 층 이상부터는 선금을 넣어 두시고 남으면 다음에 오셨을 때 사용을 하시고 모자라면 나가시기 전에 마저 계산하는 식입니다.”
‘머리 잘 썼네. 어떻게 해도 주루에 이익이잖아.’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은자 200냥짜리 전표를 내밀었다.
“이거면 대충 되겠죠?”
점소이는 전표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예, 무사님. 그럼 서둘러 주문하신 술과 음식을 올리겠습니다.”
점소이가 떠나자 주충을 비롯한 주눅이 들었던 무사들이 조심히 물어왔다.
“이, 이석아 정말 괜찮은 거냐?”
“제가 술 한번 대접한 적이 없었잖아요. 같이 어울린 적도 없었고, 그게 죄송해서 거하게 내는 거니 부담 없이 드세요.”
“그나저나 여기 분위기 한번 무겁네요.”
“그러게 마치 어르신 별채에 들어온 느낌이다.”
연수는 무사의 말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어르신 별채도 들어가 본 적이 있으세요?”
“그럼. 예전에 반수 선배랑 대장님이랑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지. 벽과 바닥은 흑단목에 옥을 깎아 만든 탁자가 여기와 비슷했다.”
“이 흑단목 비싸겠죠?”
“그럼. 단단하기가 돌 같고 윤기가 흐르는 걸 봐라. 웬만한 비단보다 비쌀걸?”
무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금색 대야에 얼음을 채우고 그 안에 옥을 깎아 만든 술주전자를 담아 술잔과 함께 무사들이 앉은 탁자에 내려놓는 점소이들.
“이게 옥연주입니까?”
연수의 물음에 점소이가 친절히 설명을 더 했다.
“예. 옥연주는 시원하게 마셔야 그 풍미를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 잔 또한 차가운 얼음 위에 올리셔서 천천히 그 맛을 즐겨 주십시오.”
“이석아 네 덕에 이런 호사를 누려보는구나.”
“이런 날도 있어야지요. 자 다들 한 잔씩 마셔봐요.”
연수는 직접 술 주전자를 들어 무사들에게 한 잔씩 술을 따라주었다.
“다들 그간 감사했습니다.”
“너도 그간 수고 많았다.”
연수는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며 특유의 향을 남기는 옥연주의 맛에 반해버렸다.
“오!”
“키야!”
“음!”
다른 무사들 또한 눈이 휘둥그레지는 맛과 향에 놀랐다.
“독주는 아니지만, 이 향은 정말 일품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연수와 무사 일행들은 올라오는 고급요리와 옥연주를 천천히 즐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연수는 이목공을 펼치며 팽가 일행을 주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 그때 까딱 잘못했으면······.
“이석아, 마시자!”
순간 연수의 미간이 잠시 잠깐 구겨졌다.
팽가 일행의 주의를 집중하며 무사들을 상대하려니 피곤하던 연수는 점소이를 불러 독주를 시켰다.
“시키신 황취주 나왔습니다.”
“이석아 옥연주도 많이 남았는데 굳이 또 술을 시켜?”
“남은 술은 남은 거고 새 술은 새 술이죠. 자 이렇게 반반 섞어서 한 잔씩 올릴게요.”
연수가 커다란 대접에 옥연주 반과 황취주 반을 부어 무사들에게 건네자 무사들은 비싼 두 술을 섞어 붓는 연수의 행태에 기겁하면서도 술대접을 받았다.
“크! 이렇게 마시니까 이것 나름대로 괜찮수다.”
연수가 오기 전부터 미리 술을 마시고 있던 무사들은 연수가 돌리는 대한민국식 폭탄주에 하나둘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인사불성이 되기 시작했다.
“너무들 마셨나 봅니다.”
“응? 그른가? 히히 나도 빙빙 도는 게 마니 마셔썽 히히”
“그런 것 같네요.”
연수는 조용히 점소이를 불러 은자 두 냥을 전해 주며 무사들을 강진령의 장원으로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하고는 옥연주를 홀짝이며 팽가 일행에 집중했다.
“히히 이석아 또 보자! 멀리 가면 안대! 안대! 알아찌?”
“예~ 들어가세요.”
“히히히···.”
무사들이 떠나가자 이목공에 집중하는 연수.
“소가주님 제가 듣기로는 절강성이 심상치 않다고 들었는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글쎄, 표면적으로야 그대로인데, 호검문이 문제 같더군. 주변 사파 여기저기에 시비라는 시비는 있는 데로 걸고 있는 것이 뭘 믿고 저러나 싶을 정도야.”
“서호에는 저희 가문의 사업도 많이 진출해 있습니다.”
“알고 있어. 우리뿐인가? 여기 이 친구 집안도 서호를 비롯한 절강성 전체에 많은 뿌리를 내리느라 좀 고생했는지 알아? 오대 세가 중 절강성에서 사업을 벌이지 않은 집안은 하나도 없다고.”
‘호오 그랬어?’
“진수, 자네 생각은 어때? 호검문이 대체 왜 그렇게 일을 못 벌여서 안달이 난 것 같아?”
“글쎄, 아마도 그동안 키운 세를 과시하려는 것 아니겠나? 젊은 문주가 혈기가 넘치나 보지.”
“그러다 절강성의 협정이 깨지기라도 하면 골 아플 텐데···.”
“골만 아프겠나? 자칫 그동안 들인 공이 다 날아갈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같은 정파를 말리기에도 보는 눈이 많고···. 아버님도 고민이 깊겠어.”
“자네 아버님뿐인가? 오대 세가 중 절강에 가장 큰 투자를 한 건 아마도 우리 남궁 가문일 거야.”
“혹시 호검문에 뒷배가 있는 게 아닐까?”
“뒷배?”
“까놓고 말해 솔직히 겨우 호검문 따위가 절강 사파들을 상대로 저리 배짱을 부리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글쎄···. 호검문에 뒷배라···. 정파에서도 절강의 협정이 깨져서 좋을 곳이 있을까?”
“모르지, 워낙에 속이 시커먼 놈들이 많은 곳이니.”
‘절강성이라···. 큰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만···.’
연수는 절강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에 소개의 얼굴이 떠올랐다.
씁쓸한 마음에 옥연주를 연거푸 털어 넣는데 연수의 시야에 새로이 삼 층으로 들어서는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무복을 맞춰 입은 세 명의 무사는 허리에 유난히 긴 패검을 차고 있었는데 마치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해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무사들은 검을 풀어 탁자에 기대어 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남궁진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는 사인가?’
“이게 누구신가? 귀령문의 대단치도 않으신 무사님들 아니신가?”
남궁진수의 말에 막 자리에 앉은 무사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남궁진수!”
“내 이름은 너희 같은 하찮은 놈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만한 이름이 아닌데 말이야.”
‘저 고깽이 같은 새끼는 볼 때마다 밥맛이네.’
무사들은 모욕을 당하고도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인상만 구기고 있었다.
“광서에서 이 먼 하북까지 무슨 일이지?”
“우리가 왜 너에게 시시콜콜 보고해야 하지?”
“나한테는 안 해도 여기 이 친구에게는 해야지.”
남궁진수가 한걸음 물러서며 옆을 가리키자 술을 홀짝이던 팽이현이 나타났다.
“팽가······.”
“그래 팽가의 소가주 팽이현. 하북에 왔으면 이 친구에게만큼은 보고해야 예의 아니겠나?”
“웃기지 마라! 정파 놈들에게 그럴 일 없다.”
술을 홀짝이던 팽이현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감히···. 쓰레기들 주제에!”
-쾅!
팽이현이 마시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치자 탁자가 주저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서 도를 뽑는 팽가의 무사들.
귀령문의 무사들은 마지 못해 마주 검을 뽑아 들었다.
“흥! 너희 따위가 검을 뽑아? 뽑으면 어쩔 건데?”
귀령문의 무사들은 차마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팽가의 소가주와 남궁세가의 소가주 그리고 팽가의 무사들 다섯이다.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열세였다.
남궁진수는 그런 무사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쓰지도 못할 검은 넣어둬라. 귀령문의 검 따위 보는 것만으로 눈 버릴까 두렵구나.”
“큭! 우리 귀령문을 함부로 무시하지 마라!”
“그러니까 무시하면 어쩔 거냐고? 너희 귀령문 따위 마음먹으면 하루아침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어.”
역시나 거침없는 팽이현의 말에 무사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다.
“쓸모없는 검은 집어넣고 왜 여기서 알짱거리는지 설명이나 하고 돌아가. 너희 같은 놈들이랑 한 공간에서 술 마실 일 없으니까.”
“흥! 네놈들에게 사무를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 밝히게 될지 아닐지 두고 보면 알겠지. 뭐해? 가서 꿇려놔.”
팽이현의 말이 떨어지자 도를 뽑아 든 다섯 명의 무사들이 달려들었고, 세 무사와 격돌했다.
연수는 세 무사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그들의 싸움을 살폈다.
귀령문의 무사들은 팽가의 일류 고수 다섯 명의 합격을 제법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팽가의 도는 유난히 짧은 느낌이 강한 도였고, 반대로 귀령문 무사들의 검은 유난히 긴 장검이다.
세 무사는 서로들 등을 맞대고는 다섯 명의 무사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으며 잘 버티고 있었다.
그때 남궁진수는 발을 구르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남궁진수는 서로 등을 맞대고 격전을 치르고 있는 귀령문의 무사들 위로 떨어져 내렸고, 세 무사는 결국 지키던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떨어지게 되니 수적 열세에 금세 수세에 몰린 세 무사.
“쳇! 저 고깽이 같은 새끼.”
연수의 마음의 소리는 결국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지난번 흡성신공의 고수와 싸움도 그렇고 볼 때마다 하는 짓이라고는 뒤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는 게 전부인 놈이다.
하는 말은 또 어땠던가? 매번 이고깽 판타지를 보는 듯한 오글거리는 우월감에 젖은 말만 뱉어내는 놈이 재수 없던 차에 술김에 속으로 해야 할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연수였다.
당연히 남궁진수가 그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고깽이라···. 재미있는 말이네. 분명 날 보고 한 말이겠지?”
연수는 뒤늦게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