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연수의 손에 마술같이 단검이 생기는 것을 본 소개의 표정에 실망감이 어렸다.
마치 그 표정에 ‘겨우 그런 무술을’이라는 말이 쓰여 있는 듯했다.
소개의 그 표정만으로 연수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딱히 기수식을 취하지 않고 자연스레 몸을 틀어 연수를 바라보는 소개.
‘소개야, 네가···. 네가 정말로 나를 무시하고 있었구나.’
연수의 얼굴에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소개를 향해 쏘아지는 연수의 신형 연수는 장괘구권의 초식들을 풀어냈다.
강호에서는 절대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될 무공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눈앞에 답답한 친우를 깨우쳐 주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네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무공의 고하가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비록 빌어먹었을지언정 자유로웠고 얄팍한 선입견 따위로 눈이 어두워 지지 않았던 그 시절의 소개를 다시 찾고 싶었다.
그래서 갖은바 최대의 무공으로 빨리 끝내고 싶었다.
연수의 쾌권이 소개의 요혈로 쏟아졌다.
소개는 대경하여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뒤로 물러서는 것과 앞으로 달려드는 것은 압도적으로 앞으로 달려드는 것이 빠르다. 그에 특화된 장괘구권이기도 했다. 소개에게 거리를 주지 않으며 몰아치는 연수의 쾌권.
소개는 어찌어찌 요혈로 날아드는 연수의 권들을 방어해 갔지만,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와 쏟아내는 연수의 쾌권에 당황하여 제대로 반격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적어도 방심하지만 않고 대비하였다면 이리 수세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을 후회하는 소개.
하지만 연수는 소개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공간 싸움은 무황과의 비무를 통해 적지 않게 단련해온 연수였다.
경구탄권의 초식은 이미 그 묘리를 전부 꿰고 있는 연수.
그의 주먹이 드디어 소개의 방어를 뛰어넘어 소개의 어깨에 작렬했다.
-퍽!
“읔.”
쉴 틈은 주지 않는다.
한방이 어깨에 적중하자 줄줄이 무너지는 방어.
-퍼퍼퍽!
순간적으로 연수에게 중단과 가슴 옆구리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처음처럼 신음을 흘리지 않는 소개.
소개는 과연 개방의 고수라 불릴 만했다.
몸을 웅크리며 내기를 끌어올려 타격을 최소화했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엎드리며 땅바닥에 붙은 듯 낮은 자세에서 연수의 다리를 노려왔다.
연수는 결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낮은 자세로 다리를 공격하는 지당권 종류의 공격에 권법은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번 소개는 각오를 새로이 하며 자세를 바꿨다.
취룡구장.
얼마 전부터 스승에게 전수받기 시작한 비장의 한 수이자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게 해 줄
상승의 무공이었다.
설마하니 연수를 상대로 취룡구장을 꺼내 들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이번에는 선공을 취하며 달려드는 소개.
허 초가 많고 기괴해 어디를 공격하는 것인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은 초식들이 소개의 손에서 풀어져 나왔다.
연수는 구면장으로 맞섰다.
직선적으로 상대를 몰아치는 것이 장괘구권이라면 구면장은 회와 원의 묘를 품은 장법.
방어와 반격에는 더할 나위 없었고, 상대의 힘을 흘리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연수는 이미 이 구면장의 성취가 9성을 뛰어넘었다.
무당의 입문공을 9성넘게 익힌 고수와 개방의 상승무공을 겨우 3성 가까이 익힌 고수.
결말은 너무나 뻔했다.
소개의 오묘한 장법은 연수의 구면장에 모조리 막히고 흘려졌다.
너무나 쉽게.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짧은 생각만큼 연수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도 강하다고 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개구봉을 쥐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개구봉을 쥐지 않은 건 자신의 판단이었다.
이 비무는 완벽한 자신의 패배였다. 그러니 그만해야 한다고 이성은 쉼 없이 떠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가슴이 감성이 무인의 아집이 질 수 없다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내력을 끌어올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준비했다.
취룡운해.
내력을 모아 발출하는 초식으로 지금처럼 가까이 있는 상대에게 잘못 쓰면 살초가 될 수도 있었다.
소개의 소매가 부푼다고 느낀 순간.
연수는 물러나며 두 손에 단검을 쥐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향해 무서운 장력이 취한 것처럼 흔들리며 다가왔다.
이를 악물고 순간 끌어 올릴 수 있는 최대의 내력을 끌어모아 단검을 교차시켜 휘두르자 연수의 단검에서 검기가 발출되어 소개의 장법과 부딪혔다.
-그가가강!
잠시간 묵직한 거석이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연수의 검기가 이기지 못하고 흩어졌고 연수는 최대의 내기를 끌어올리며 소개의 장법을 단검을 교차하여 막아 보았다.
울컥.
연수의 입으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연수는 이 정도 내상에 포기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소개는 꽤 공력의 소비가 컸는지 기진맥진해 보였지만 연수는 아직 여력이 남아있었다.
순간 어째서 호검문 암검대의 대장의 발재간이 떠올랐는지 연수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잘은 모르겠지만 될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연수의 발이 호검문 암검대 대장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갔다.
다섯 걸음을 밟아가자 소개의 지당권이 연수의 오금을 노리며 날아왔으나 연수는 물러서지 않고 세 걸음을 더 밟았다.
소개는 자신의 목에 들이 밀어진 연수의 단검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연수는 물러섰어야 했다, 아니면 자신의 지룡수에 잡혀 다리가 크게 상했을 것이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막 연수의 오금을 낚아채려는 찰나 연수의 움직임을 놓쳤다.
두 걸음. 아니 세 걸음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정확하진 않다.
소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이내 체념이 소개의 얼굴에 앉았다.
“졌다.”
“그래.”
연수는 단검을 거두고는 몸을 돌렸다.
소개는 연수를 붙잡고 싶었다. 설명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고 오해라고 친구의 걱정이었다고.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차마 친구에게 거짓 변명 따위 할 자신은 없었다.
자신은 연수의 무공을 얕봤다. 저 정도로는 이 험난한 강호에서 살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언제 또 볼 수 있는 거냐?”
소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글쎄, 언젠간 보겠지. 우리의 의가 많이 상하지 않았다면.”
연수의 말이 비수가 되어 소개의 가슴에 박혔다.
이제는 정말이지 친구와 자신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다른 길을 가는 것만 같아 말리고 싶었다. 애원하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소개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멀어지는 연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답답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건만 하기 싫은 말만 하고 소개와 헤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저 녀석의 몸을 살피며 다친 곳은 없는지 상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일류 고수가 된 것을 축하하고도 싶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고, 자랑스럽다고 다독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존심? 아니면 무인의 아집? 그것도 아니라면 사파 인으로서의 체면? 뭐라 부를 수 없을 그 무언가가 연수의 발길을 채근했다.
그건 분명 저 녀석도 마찬가지일 터. 서로 못 나눈 이야기와 풀지 못한 회포는 가슴에 묻고 연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객잔으로 돌아와 말을 찾아 타고 서호를 떠났다. 관도를 따라 정처 없이 무작정 달렸다.
그저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문득 실감이 났다.
‘이제 소개와는 절대 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무슨 자존심이 그리 중하다고 세상에 하나뿐인 형제 같은 친구와의 의를 상하게 한단 말인가?
녀석이 조금 짜증 나는 말을 한다고 뭘 그리 예민하게 반응했을까? 그저 잘 천천히 설명했으면 어땠을까?
네 녀석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고 무공을 증명했으면 어땠을까? 하다못해 말 한 필 사면서도 검기의 시연까지 보였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후회가 가득 했지만 이제 와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연수는 도무지 어딘지 모를 관도에 말을 세우고는 하늘에 무수히 떠올라 있는 은하수를 바라봤다.
울컥.
“으아아아!!!!”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악을 쓰며 토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악을 써도 가슴에 응어리진 이 감정은 도무지 씻겨 내려가질 않았다.
“소개야···.”
그제야 연수의 눈으로 눈물이 맺혔다.
연수는 알고 있었다. 이 눈물의 의미가 친구를 잃어 흐르는 눈물이라는걸.
그 시각 소개 또한 연수가 떠난 객잔으로 돌아와 연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연수가 떠났다는 걸 알게 된 소개는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연수와 같은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