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29화 (29/202)

# 29화

마치 망나니가 목을 칠 때 쓰는 것처럼 무식한 도를 어깨에 기댄 채 몸무게가 200근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 거대한 빡빡머리 사내가 건들거리며 반점 안으로 들어왔다.

반점을 꽉 채우던 손님들은 이미 빡빡머리 사내가 반점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사람이 날아와 처박히는 그 순간 썰물 빠지듯 나간 후였다.

빡빡머리 사내는 망연자실 멍한 연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처박혀 있는 남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남자의 머리를 그 우왁스러운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게, 진작 진작 갚으면 좋잖아. 이 동네에서 빌어먹고 살려면 내 돈을 제일 먼저 신경 써야지. 나 투계방 방주 흑돈이야.”

“끄으···. 제발···. 갚겠습니다. 갚을 테니 제발···.”

“그래 갚아야지. 겨우 은자 스무 냥 때문에 이 마을에 최고 미인인 네 딸이 기루에 갈 수는 없지 않겠어? 큭큭큭”

“스, 스무 냥이라니요?”

빡빡머리 사내에 말에 고통에 몸부림치던 남자는 깜짝 놀라며 다물었다.

“모든 돈은 시간이 지나면 말이야, 이자 라는 게 붙는 거지.”

“허···.”

남자는 따져 물을 힘조차 없는지 허탈한 한숨과 함께 드러누웠다.

“현명하네. 괜히 어쩌고 저쩌고 따지면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려 했는데, 흐흐, 그래 언제까지 갚을지 정해보자. 음···. 이달 초하루 이달 초하루가 좋겠어. 그때까지 갚지 못하면 말이야, 내 친히 네 딸을 내 첩으로 맞이하러 가주지.”

“...”

빡빡머리의 말이 끝나자 끝내 남자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이제 열네 살 된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외모가 남달라 눈에 띄던 아이였는데 겨우 열네 살 된 올해부터는 이 마을에 최고 미녀로 소문이 자자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저 어린 딸일 뿐인데, 그런 아이를 저 200근도 가뿐히 넘는 더러운 돼지 같은 놈에게 뺏기게 생겼으니 허망하고 허망할 뿐이었다.

“킥킥킥 잘 알아 들은 것 같군. 그럼 초하루 때 보자고. 크크크”

빡빡머리 사내가 거구를 일으켜 뒤로 돌아 나가려는데 연수의 정신 수습이 끝났다.

“어이, 돼지.”

빡빡머리 사내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빡빡 대가리 돼지 새끼, 너 말하는 거 맞아. 뭘 모른척하냐?”

이번엔 빡빡이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들어오는 남자는 막 소년티를 벗은듯 보이는 청년.

“응? 못 보던 놈인데?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냐?”

“흑돼지라며? 빡빡이 흑돼지.”

“크크크 제법 재미있는 놈이구나. 어디서 무공 한 자락 배운 모양이지? 그런데 말이다. 애송아 나 같은 사파인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야.”

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튄 음식물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어이 빡빡이. 너 같은 것도 사파의 이름을 팔고 사니까 하는 말인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말로 할게. 너 때문에 날아간 내 음식값 은자 한 냥 곱게 내놓으면 곱게 보내준다.”

“어린놈이 강단이 제법이다만 그러다 병신 되는 거다.”

빡빡이는 거도를 연수의 코앞에 들이밀며 말했고 그 순간 연수는 자신의 코앞에서 실룩이는 거도를 스치듯 빡빡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퍽! 빡!-

육합권의 일 권이 빵빵하다 못해 거대한 빡빡이의 배에 들어가자 거대한 빡빡이의 허리가 구겨지듯 굽혀졌고, 빡빡이의 머리가 연수의 가슴 밑으로 내려오자 연수는 빡빡이의 뒤통수에 밤 주먹으로 있는 힘껏 꿀밤을 먹여 주었다.

“큭! 이···. 이 개자식이!”

빡빡이는 고통보다는 수치심이 더 컸는지 얼른 일어나며 분통을 토해냈다.

“감히 기습을 해?”

아까처럼 대충 도를 뻗어 연수를 희롱하는 게 아닌 제대로 잡힌 기수식을 취하는 빡빡이의 기세가 아까와는 달랐다.

“하면 어쩔건데?”

양손으로 도를 쥔 빡빡이의 손에 힘줄이 돋아나며 빡빡이가 도를 휘둘렀다.

“죽어야지!”

양손으로 도를 치켜들고는 일도양단의 기세로 연수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오는 빡빡이의 도.

빡빡이는 자신의 육중한 체중을 제대로 자신의 도에 실어 일격을 날려왔다.

그에 연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아 왔는데 빡빡이는 자신의 도가 저 멍청한 놈의 왼팔을 그대로 잘라버릴 것을 의심치 않았다.

-깡!-

빡빡이는 뭔가 이상했다. 날붙이인 자신의 도와 연수의 팔이 만났는데 왜 금속음이 울린단 말인가?

그제야 연수의 팔을 살펴보자 언제 꺼내 들었는지 연수의 손에 쥐어진 단검이 자신의 도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래도 빡빡이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의 체중은 200근을 넘어 300근 가까이 된다. 저 애송이의 체중은 고작 100근이 넘을까 하는데 저 작은 단검으로 마치 어린아이 목검 막듯이 가볍게 자신의 도를 막는다?

이제는 두 가지의 가정 밖에 설명이 되지를 않는다.

애송이 놈이 자신은 상대도 할 수 없는 진짜 무림인이던가 아니면 엄청난 괴력을 가진 괴물 같은 놈이던가.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신상에는 이로울 것이 없어 보였다.

웬만한 칼 밥 좀 먹었다는 무림의 삼류 무사들 쯤은 자신의 타고난 완력과 어려서 무관에서 배운 칠력도면 몇 초식 안에 도륙을 냈던 자신이었다.

한때는 자신이 천재인 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삼류 무사들을 추풍낙엽으로 베어오다 보니 이류고수와 싸워도 어느 정도 자신의 솜씨가 먹혀들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만난 삼류 무사와 이류고수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내력이 미약한 자신의 도가 아무리 대단한 완력과 체중을 실어 휘둘러도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존재들이 무림의 이류고수 수준이었다.

그 이후로 목숨을 부지했던 자신은 무림에 꿈을 접고는 이 시골 촌구석까지 물러나 흑도에 몸을 던져 투계방이라는 작은 조직에 우두머리가 되어 연명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 촌구석에 무림인이 그것도 자신을 가볍게 물리칠 고수가 왔던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래도 한때 무림에서 지내본 자신의 눈은 고수의 풍모를 풍기는 무사들을 제법 알아보아 피할 수 있었는데, 이런 애송이가 그런 고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빡빡이는 차마 가로막힌 도를 거두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 은자 한 냥이라고 했소? 내 금방···.”

“누가 은자 한 냥이래? 금자 한 냥이지.”

빡빡이는 자신의 호구가 잡히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보다 자신이 힘없는 백성들을 상대로 많이 해봤던 짓거리이기에 그 감각을 예리하게 느꼈다.

그런데도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반발심을 누르진 못했다.

“방금 은자 한 냥만 주면···.”

“누가 그러더라고. 돈은 시간과 만나면 이자를 낳는다고.”

“그, 그런 폭리가!”

-꽝!-

순간적으로 연수의 오른손에 또 다른 단검이 쥐어지더니 빡빡이의 넓적한 도면을 후려치듯 찍어버리자 빡빡이는 도를 놓치고 말았다.

그의 도는 연수의 단검에 찍혀 바닥에 처박혔는데 도면 전체에 실금이 가 있었다.

겨우 단검으로 자신의 큰 도를 저 지경으로 만든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빡빡이는 자신의 손목이 골절되어 욱신거리는 통증도 잊고는 입을 열었다.

“그, 금자 한 냥 드리겠소. 내 바로 가서 가져···.”

“누가 금자 한 냥이래?”

“!!!”

빡빡이의 등에 서늘한 감각이 뒷목을 타고 올라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빡빡이는 확신했다.

자신은 물릴 수 없는 호구를 잡혔다.

이제 둘 중 하나였다.

저 애송이 놈이 부르는 돈을 얼마가 되었든 감당해 내던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 부하들을 모두 불러와 저 애송이 놈을 죽이던가.

하지만 부하들을 모두 불러온다 해도 저 애송이 놈을 죽일 수 있는 확률은 낮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호구 잡혀 한번 뜯기기 시작하면 시도 때도 없이 뜯겨 남아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고심 끝에 빡빡이는 입을 열었다.

“그럼···. 얼마입니까?”

“금자 열 냥.”

금자가 열 냥이라는 말에 빡빡이는 다리가 후들거리며 몸이 주저앉았다.

이 작은 시장의 흑도로 부하 10명과 함께 연명하는 자신이다.

물론 악독하게 상인들을 쥐어짜서 잘 먹고 잘 살긴 하지만 부하 열 명의 입에 풀칠하고 자신이 풍족하게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살림인데 금자가 열 냥이라면 앞으로 두, 세 달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렇지만 빡빡이는 결심할 수밖엔 없었다.

“드리겠소, 금자 열 냥.”

연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오, 제법 대가리를 굴리는 돼지구나. 투계방이라고 했지? 투돈방이 아니라···. 큭큭. 가져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지.”

“예.”

힘 없이 대답한 빡빡이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연수는 부서진 탁자 옆에 멀쩡한 탁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고는 멀리서 숨죽이고 있던 점원을 불렀다.

“여기 오리구이와 탕수육을 다시 해다 주시오.”

“예, 예. 그,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는지 연수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바닥만 보며 주문을 받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처음 날아와 연수의 식사를 방해했던 남자가 엉거주춤 다리를 절며 연수에게 와서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무사님.”

“뭐가 감사해요?”

“무, 무사님이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됐습니다. 뭐 딱히 나서려고 나선 것도 아니고.”

차가운 연수의 대응에 남자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빌었다.

“무사님! 제발 저희 딸 좀 구해주십시오. 이제 열 네 살 된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를 저런 못된 놈의 첩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남자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연수는 이제 열 네 살 되었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하여튼 이 변태 새끼들은···. 어디를 가나 있구나.’

남자를 일으켜 의자에 앉힌 연수는 남자에게 물었다.

“따님 이름이 뭡니까?”

연수가 자신의 딸 이름을 캐물어 오자 남자는 당황하여 다시 무릎을 꿇으며 빌었다.

“아이고, 무사님 저희 딸은 아직 자라지도 않은 아이입니다.”

‘아니 이 양반이···.’

연수는 다시 남자를 진정시키며 앉혀 놓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저 돼지 새끼 같은 변태로 보입니까? 그냥 돼지 놈에게 전해두려 하는 것이니 걱정 말고 말해 보세요.”

남자는 여전히 못 미더운지 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계년이라고 합니다만···.”

“정계년이라.. 이름이···. 참···. 직접적이네요.”

“닭띠해에 태어난 딸년이라...”

“그렇군요. 그런데 저런 나쁜 놈 돈은 왜 빌린 거예요?”

“후우, 재작년 가뭄이 심해 세금 내기도 빠듯한 때가 있었습니다. 무슨 짓을 하는지 세금은 오를 대로 올라 흉년임에도 전년보다 많이 거둬 가더군요. 저희같이 농사나 짓는 무지렁이들은 이 몸뚱이가 재산입니다. 농사가 망해도 흥해도 일을 해야 내년에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금을 낼 수가 없을 정도의 흉년이다 보니 위험을 알고도 저 더러운 돈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금을 못 내면 반년 이상 잡혀가 형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앞으로 우리 가족은 다 굶어 죽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빌려 쓴 돈이 은자 스무 냥쯤 됩니다. 그동안 안사람 또한 빚을 갚는다며 여기저기 허드렛일을 다니다 올 초에 병들어 몸져누웠고요. 그렇게 지금까지 갚은 돈만 은자 40냥은 될 겁니다. 그런데도 저 나쁜 놈이···. 큭”

남자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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