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노인은 입을 다문 연수를 노려봤다.
“아직도 장난질할 생각이냐?”
“그러는 노인장이야말로 누구기에 이렇게 저를 괴롭히십니까?”
“나? 허허 네놈이야말로 내 이름을 말해도 알려나 모르겠구나. 이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잡스러운 것들이 꼬인 모양이구나.”
말을 마치는 노인의 기세는 다시 한번 변했다.
무서운 폭풍전야의 기세에서 이제는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 같은 기세가 연수의 온몸을 따갑게 자극해왔다. 한발 한발 다가오는 노인이 가까워질 때마다 노인에게서 풍겨오는 기세에 연수는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그 와중에도 노인이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서 연수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지나갔다.
“혹시, 무황노사 십니까?”
순간 연수를 노려보며 다가오던 노인의 얼굴이 실룩였다.
이 세상에서 무황은 죽었다.
무황을 알고 있는 자는 많지만, 아직 살아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단 둘뿐이다.
연수의 입에서 무황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노인의 기세에 살기가 담겼다.
순간 그 기세를 받은 것만으로도 연수는 역류하는 기혈을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결국, 연수는 한 움큼의 피를 토하고도 쏟아지는 노인의 기세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했지? 마지막으로 묻지. 어디서 온 누구냐?”
이제는 다리가 벌벌 떨리고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었다. 노인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을 들은 연수는 그나마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사부님께서는 별일 없이 무탈하십니다.”
창백해진 얼굴의 연수의 입에서 사부라는 말이 나오자 폭풍같이 몰아치던 노인의 기세가 거짓처럼 사라졌다.
노인의 기세가 거둬지자 겨우 버티던 연수는 반발력에 피를 한 움큼 더 토해냈다.
“우웩.”
“두보가···. 그 친구가 제자를 들였다고?”
“하아···. 역시 무황노사가 맞으셨군요. 사부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꼴이 이래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 송구합니다.”
그제야 노인은 연수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피는 두 번이나 토했다. 딱 봐도 고수의 기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약관도 못된 소년이 자신의 기세와 살기에 큰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노인은 다급해졌다.
자칫 사소한 오해로 세상에 딱 하나뿐인 친우가 말년에 얻은 제자를 죽이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노인은 연수에게 다가와 몇 군데의 혈을 짚고는 그대로 둘러업어서 친우의 집으로 달렸다.
연수는 내상을 입은 와중에도 무황의 경공술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을 업고도 말도 안 될 만큼 빠르게 험한 산길을 달려나가는 무황의 경공에 자신의 천리견보는 댈 것도 아니었다.
‘굉장하구나.’
무황이 막 소박한 초가집의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연수의 사부는 툇마루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가 눈을 뜨며 무황을 맞았다.
“기세가 딱 자네 같더니···. 응? 연수야? 아니 무슨 일인 게야!”
무황을 반갑게 맞이하던 사부는 무황에 품에 안겨 허옇게 질린 얼굴로 피를 게워내는 연수의 모습에 대경하여 맨발로 달려 나왔다.
그런 사부의 모습에 무황은 더욱 난감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그게···. 저 사소한 오해가 좀 있어서···. 어쩌다 보니 이리되었네.”
사부는 무황의 말은 듣지도 않고 연수의 맥문을 잡아 진맥해 나갔다. 진맥하는 사부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
“대맥의 경락이 모두 상했구나···. 아니 대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사부는 연수를 받아들여 평상에 눕히며 물었다.
“그게···. 처음 보는 무림인이길래···. 게다가 내가 무황 인걸 알아보니, 어디서 보낸 첩자나 자객인 줄 알고···. 살기를 좀 뿜었더니 내상을 조금 입은 것 같네.”
“이 친구야 이게 내상 조금 입은 거로 보이나? 대맥이 상했어.”
연수의 상태는 무황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편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연수가 무황의 기세에 꼬리를 내렸으면 이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았을 텐데 계속해서 무황의 기세에 맞서다 보니 무리하게 내기를 일으켜 기세를 막아내느라 온 몸의 기혈이 들끓었는데 거기에 치명적인 무황의 살기와 날카로운 기세를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대맥이 심하게 상한 것이다.
무황이 조금만 더 날카로운 살기를 연수에게 보냈다면 아마 대맥이 완전히 상해 폐인이 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이었다.
연수는 익숙한 사부의 목소리에 잠시 잃었던 정신을 부여잡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 사부.”
“정신이 드느냐? 힘들겠지만 요상결을 운기 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연수는 사부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삼재심법의 요상 결을 운기 하기 시작했다.
사부는 연수의 뒤에 앉으며 연수의 등에 손을 얹고는 연수의 운기를 도왔는데 대맥뿐 아니라 경혈부터 많은 경락이 손상되어 운기가 쉽게 되지 않고 있었다.
“우웩”
연수는 요상 결을 운기 하면서 죽은 피들을 계속해서 토해냈다.
그런 두 사제의 앞에 무황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연수의 요상을 돕고 싶었지만 익힌 심법도 다르고 그렇다고 연수의 사부보다 의학의 지식이 깊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저 두 사제를 보며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제는 그 후로 두시진 반이나 꼼짝 않고 운기를 했고 그제야 연수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손상되고 막힌 대맥부터 혈맥까지 어느 정도 치료가 되자 기와 혈액의 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태에 들 수 있었다.
“후유, 이 친구야 이놈의 혈맥과 경락이 비정상적으로 튼튼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소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단명했을 거야.”
무황은 그제야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는지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어했다.
“설마하니 자네가 제자를 들였을 줄이야 꿈에나 알았겠는가?”
무황은 운기가 끝난 연수의 맥문을 잡고 살펴보았다.
“위험한 상황은 넘어갔구나. 후유···.”
“그런데 어쩐 일로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예까지 찾아온 거야?”
“허허, 항주에 볼일이 있다고 떠난 친구가 2년이 넘도록 연락 한번이 없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찾아왔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오던 친구가 갑자기 연락이 끊기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제자 키우는 맛에 나는 잊은 것 같구먼.”
“허허 그랬나 보이. 이놈 자라는 걸 보고 있느라 시간이 그리 지났는지 몰랐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한번 찾아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제자 놈 밥해 먹이느라 그럴 시간이나 나야 말이지.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들어오게나. 차나 한잔하세.”
그제야 무황은 연수사부의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연수는 사부와 무황이 방으로 들어가고도 반 시진을 더 운기 한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후유”
‘내상이란 것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구나. 잘못하면 죽을뻔했네.’
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통 피가 묻은 옷을 벗어서는 우물가에서 빨래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사부와 무황 두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 그간의 회포를 푸느라 밖의 상황은 제대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자네의 목숨을 구해준 소년이 저 아이라는 말인가?”
“그래. 당시 저놈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호검문에 잡혀 죽을뻔했지. 호검문의 암검대가 제법 매서웠다네. 하나하나 보자면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합격진 하나는 대단했어.”
“허허 그러게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항주까지 가서는···.”
“그러게 말이야. 호검문의 소문을 듣고는 괜히 죽을 자리 알아보러 간 셈이네. 호검문 문주의 무공은 그림자도 못 보고···. 어쨌든 똘똘한 제자를 얻었으니 뭐 되었지.”
“그런데 저 아이 자질이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정말 무공에 입문한 지 2년 반밖에 안 되었나?”
“크크크 맞아. 보통의 자질이 아니야.”
“허허···. 영약이라도 먹인 건가? 겨우 2년 익힌 무공으로 내 기세를 받아내기는 무리인데···.”
“개방의 소정환을 하나 먹였지.”
“그리고?”
“그게 다야.”
“그래? 어떤 무공을 가르쳤나?”
“삼재 심법으로 내가 공부의 기초를 닦게 했고 대영심법을 가르쳤네. 거기에 장괘구권과 구면장 천리견보를 가르쳤지.”
“그게 전분가?”
“전부지.”
“상승의 무공을 가르치면 금방 고수가 될 재목이네.”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만한 상승의 무공이 딱히 없다는 게 아쉬운 대목이라네.”
“그 왜 자네가 쓰던 암기술이나 단검술이 있지 않았나?”
“다 상승의 무공이라 하기에는 부족해. 여기저기서 훔친 초식들을 대충 다듬어 쓰던 무공들이라서 무리도 구결도 없어. 그저 초식이 전부네.”
“허허”
“처음 저놈이 내가 공부를 시작할 때 내기를 느끼는 감각이 보통이 아니라서 대단한 재능이라고는 생각했는데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그 무재에 놀랄 때가 많아. 특히나 권각술이 대단하네. 무당의 구면장을 벌써 구성이나 익혔어.”
“뭐?! 3년도 안 되어 구면장 구성을 익혔다고?”
“그렇다니까.”
“허허허. 무당의 도사들이 알면 피를 토하며 성토할 일일세.”
무황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초 입문공이기는 했지만, 무당의 무공이다. 아무리 상승의 무공으로 넘어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는 무공이라지만 겨우 3년을 익혀 구성에 덜할 만큼 그리 만만하고 쉬운 무공은 아니다.
“어때? 자네도 한번 가르쳐 보겠나?”
사부의 은은한 권유에 무황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되네. 사문의 죄인인 나일세. 곤륜의 무공을 전할 수는 없어.”
“그럼 곤륜의 무공은 전하지 않으면 되지. 내 무공을 봐줬듯이.”
“흠···.”
무황은 곤륜에서도 밖으로 나와서도 제자를 키운 적이 없었다. 나이가 먹다 보니 제자를 들이고 키우는 친구의 모습이 마치 자식을 키우는 그것으로 보여 부럽기 그지없었고 그 제자의 무재가 실로 대단하다니 덩달아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육합권이 어떤가?”
“육합권? 구면장과 장괘구권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아인데 겨우 육합권을 가르친다고?”
“어차피 함부로 쓰지 못할 무공이네. 그렇다고 내게 쓸만한 다른 권각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육합권과 삼재검이라면 괜찮지 않겠나?”
“글쎄···.”
무황은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이미 구면장과 장괘구권을 상당히 높은 경지까지 익힌 아이에게 겨우 여섯 초식이 전부인 삼류 저잣거리 권법을 가르친다고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직 무공에 입문하지 않은 아이라면 육합권과 삼재검으로 기초를 닦기에는 적절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잠시간 본 연수라는 아이는 겨우 2년 반 무공을 익혔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보통 명문의 제자들도 고작 3년을 익혀 저 정도로 성장하기에는 힘들었다.
특히나 벌써 쌓은 내공이 35년을 넘었다고 했다.
소정환을 복용했다고 하더라도 적은 내공이 아니다. 그런데 명문의 입문권장 술을 구성에 달하도록 익혔으니 당장 강호에 나가도 이류소리는 들을 아이다.
만약 명문의 문하였다면 타고난 무재라며 온갖 상승의 무공과 영약을 가져다 문파 미래의 기둥으로 키웠을 것이다.
곤륜에서 무황 자신을 그렇게 키워 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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