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연수는 오전에 일을 좀 보고 객잔으로 돌아오자 홍구가 웬 청년을 데리고 객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연수가 서둘러 객잔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길 떠날 채비는 잘 돼 가느냐?”
“예. 주변 분들에게 인사도 모두 마쳤고, 준비도 다 끝났습니다. 근데 이분은?”
“새로운 점소이다.”
“아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그래. 네가 일 잘한다고 객주님께서 귀에 못이 박히게 말씀해 주셨다.”
“하하 딱히 잘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연수야, 괜찮으면 오늘은 새로운 점소이에게 장부 표기법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네. 글을 배우셨나 봐요?”
“네놈 덕분에 한동안 편히 지냈더니 몸이 게을러져 글 아는 점소이 구한다고 고생했다.”
연수는 조용히 미소 짓고는 오전 장사에 한참인 후임 점소이를 잠시 돕다가 새로운 점소이에게 틈틈이 장부를 표기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사실 뭐 대단한 것도 없었다. 입금 내역에 식사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들어온 돈과 그 출처를 적고, 객방으로 나는 수입은 식사부가 아닌 객방이라고 따로 표기하면 전부였다.
후에 사장이 직접 돈과 장부를 맞춰 보고 식자재부터 직원들의 임금까지 매출 장부는 따로 표기하니 그저 들어오는 돈을 잘 적어만 놓으면 되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연수는 간단한 식사를 들고 3층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준비는 다 끝냈느냐?”
“예. 시키신 대로 마차와 말, 노숙할 때 먹을 수 있는 건량과 육포 천막까지 모두 준비했습니다.”
“마부는 어떤 사람이냐?”
“평소 목수나 채광하는 사람들을 도와 조수로 이런저런 일을 떠맡아 하는 사람인데, 집이 그럭저럭 살던 사람이라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놀고 싶을 때 노는 중년인입니다. 몇 대전만 해도 서호에서는 꽤 부자로 알려졌었는데 그 중년인 아비가 천하의 노름꾼이라 가산을 탕진해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집안 독자로 알고 있습니다.”
“마부 일은 해본 적 있다더냐?”
“간혹 전장이나 표국에서 마부가 부족하면 그 사람에게 부탁해 마부 일을 몇 번 해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자정이 되면 마부 아저씨가 마차를 몰고 객잔 앞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그래. 너는 먹었느냐?”
“예. 마지막이라고 객잔 식구들이 잘 챙겨주어서 잘 먹었습니다.”
노인은 잘 먹었다는 연수의 얼굴을 한번 보고 자신의 식사를 한번 보았다.
“어째 내 식사는 부실해 보인다만?”
“고수들은 기름진 음식은 피하고 화기가 적게 닿은 채소를 주로 먹는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그런 고수가 아니다. 요즘 정파의 도사 나부랭이도 고기를 처먹는 시대인데, 사파인인 내가 무슨 염병할 일이 있다고 채식을 하겠느냐.”
“그럼 새로 상 받아다 드릴까요?”
“됐다.”
“예.”
연수는 돌아서서 1층으로 내려왔다.
“정 없는 놈 어째 두 번을 안 묻네.”
1층으로 내려오자 홍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째서 밤에 길을 나선다는 게냐?”
세상에 밤중에 길을 나선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 홍구였다.
한밤중엔 마을을 벗어나면 달빛에 의지해야 해서 뭐 하나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오밤중에 길을 나선다는 것이 못내 걱정되는 홍구였다.
“저를 데려다주시기로 한 분이 사정이 있어서 밤에 출발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 양반 얼굴을 내가 한번 볼 수는 없겠느냐?”
“낭인분이신데, 돈도 안 받고 제 사정을 듣고는 가는 길에 제가 살던 마을까지 동행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나쁜 분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무림인인데 혹여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직접 뵙는 건 좋을 게 없어 보입니다.”
“무림인이라고?”
“네. 아무래도 세상이 흉흉해서 혼자 그 먼 길을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소개에게 부탁해서 직접 소개받은 무사님이세요.”
“그러면 큰 탈은 없겠지.”
“객주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연수는 허리를 접어 공손히 인사했다.
“나도 네가 열심히 일해 줘서 그동안 고마웠다. 덕분에 여가도 많이 생겼고, 네가 싹싹하게 일해 줘서 단골손님들도 많이 생겼다. 이거 얼마 되지는 않는 다만 네가 그동안 열심히 일해 준 보답이다. 사양 말고 받거라.”
연수는 홍구의 마음이 느껴지는 묵직한 전낭을 사양 않고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네가 부모님께 돌아가는 길이 부디 별 탈 없기를 빌겠다.”
“예. 저도 항상 한서 객잔이 번창하기를 빌겠습니다.”
“허허, 그래, 그래. 그럼 쉬다가 떠나거라. 나는 먼저 들어가 보겠다.”
“네, 사장님. 들어가서 푹 쉬세요.”
홍구는 객잔을 나서며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걸 느꼈다. 자식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애착을 두고 대했던 연수가 내일부터는 없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이다.
“쓸쓸해지겠군. 오늘은 주루에 들러 술이라도 한잔할까?”
연수는 마지막으로 하는 객잔의 뒷정리를 하며 객잔 식구들과도 인사를 끝내고는 자신이 3년 동안 머물며 정들었던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옷가지 조금과 허름한 지필묵 그리고 낡은 서책이 그의 짐 전부였다.
“후, 그래도 그동안 정이 많이 든 보금자리인데···.”
방을 한 바퀴 둘러본 연수는 방을 나서서는 3층으로 올라갔다.
“준비도 끝났고, 이제 자정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그 전에, 내게 구배를 해라.”
연수는 영화나 책에서 많이 보았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때가 왔구나.’
지체없이 노인에게 아홉 번의 절을 한 연수는 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사부님이라고 부르면 됩니까?”
“그래. 이제 내가 네 사부이고 너는 우리 무투문의 3대 제자가 되었다. 이는 한번 맺어진 끊을 수 없는 인연. 너는 앞으로는 싫건 좋건 이를 되돌릴 수 없다.”
“뭐든 좋습니다. 고수만 만들어 주십시오.”
노인을 구해주고 3일. 그 3일 동안 얼마나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연수인가? 그동안 소설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
처음 이 세계로 왔을 때만 해도 밝은 빛을 따라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던 나날도 있었다.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지만, 그마저도 걷어차 버렸다. 오로지 환상과도 같은 무공을 배우기 위해. 손에서 장풍을 뿜으며 바위를 가르고 나무를 밟으며 하늘을 주유하는 몽상과도 같은 일이 가능해진다.
아마도 노인의 말을 들어 보건대, 말로만 듣던 비인 부전의 1인 전승 문파. 영화나 소설을 봐도, 떼거지처럼 많은 문도의 문파들보다도 이런 1인 전승 문파에 진정한 고수들이 있지 않았던가?
연수는 그러면서 생긴 궁금증을 참지 않고 물었다.
“사부님. 우리 무투문은 1인 전승의 문파입니까?”
“꼭 1인 전승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다만 내 사부는 나 말고는 제자를 받지 않았고, 나 또한 너 말고 더는 제자를 받을 생각은 없다.”
“아 그렇군요.”
연수는 속으로 역시 라고 말하며 상상의 나래를 마저 펼쳤다.
수련은 분명 힘들겠지만 뭐 상관없었다.
어떤 환경이든 적응하고 인내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그런 남자니까, 그동안 나름 힘든 역경도 어떻게 해서든 돌파한 경험이 있었고, 남들보다 다른 건 몰라도 끈기 하나는 유별나게 강했다.
고등학생 때는 상금이 걸린 교내 마라톤 대회에서 육상부들을 제치고 1등을 한 적도 있다. 물론 후에 병원에 실려 가고 나흘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지만, 자신은 그런 남자였다.
연수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노인 또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연 이놈이 자신의 무공과 사문의 방침에 적응할 수 있을까? 자신은 어차피 가진 것도 뛰어난 것도 없는 때에 사부를 만났고, 사부의 방침이 크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놈은 어떨까? 자신의 사부와 자신의 꿈은 남들이 들으면 백이면 백 욕을 하고는 한다. 20년이 넘게 강호의 풍파를 맞으며 강호행을 해 왔었지만, 자신에게는 친구라 부를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물론 그 또한 그의 사문의 방침을 썩 내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연수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사부님. 그러고 보니 사부님의 존함을 이 제자가 모르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내 이름은 주두보라고 한다.”
“아 그렇군요. 제자의 이름은 고연수라고 합니다.”
“그래 알고 있다.”
“어떻게요?”
“밑에서 이야기하는 걸 자주 들었다.”
“역시! 사부님은 대단하시군요. 이 방안에서 1층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으시다니···. 고수는 전부 그렇습니까?”
“다 그렇진 않다. 이 사부는 잘 듣는 수련을 했기에 청력이 유난히 발달한 게지.”
“그런 수련도 하는군요.”
“너도 알게 되겠지만, 우리 무투문은 잘 듣고 잘 보고 빠르게 외우고 하는 행위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오! 뭔가 대단해 보입니다.”
“일단 제대로 앉아 보거라, 언제까지 바닥에 앉아 있을 테냐.”
“예.”
연수는 탁자 옆에 의자를 빼 앉았다.
작은 방안에 새로이 사제의 인연을 맺은 둘은 별 대화 없이 서로 다른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연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쁨에 몽상에 공상을 더했고, 노인은 과연 이 새로운 제자가 자신의 방식을 잘 따라올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둘이 한참 동안 말없이 사념에 빠져 있을 때 노인은 문득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자. 마차가 왔다.”
연수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역시 고수는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예.”
객잔 밖에는 중년인이 마부석에 앉아 있었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어두운데 꼭 밤에 가야 합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부터 해가 뜰 때까지는 내가 마차를 몰 것이니 마차 안에서 눈이나 좀 붙여 두시오.”
중년인은 그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인을 따라 연수도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 안은 이런저런 짐으로 가득 했지만 두 사람이 그럭저럭 발 뻗고 앉을 만큼의 자리는 나왔다.
연수는 중년인이 자리를 잡고 눈을 감는 것을 보며 자신도 대충 걸터앉아 다리를 펴고는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아무래도 무공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이 설레어 잠이 잘 오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멀뚱멀뚱 있는 것도 심심하기에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