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걱정스러운 연수의 말을 들은 노인은 별 걱정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운기조식만 잘하면 덧날 일은 없다.”
“그 운기조식이라는 게 상처가 덧나는 것도 막아 줍니까?”
“그야 당연하지. 아니었으면 칼 밥 먹는 무림인들 죄다 상처가 덧나서 썩어 죽었을 거다.”
‘하긴 그도 그렇네.’
“언제 떠날 수 있느냐?”
“저는 음···. 이곳을 정리하려면 3일 정도는 걸립니다.”
“3일이나?”
“예. 그동안 노인장은 음···. 3층에 방을 하나 드릴 테니 그곳에서 묶고 계십시오. 식사는 제가 올릴 테니 내려오지 마시고요. 놈들이 이곳을 샅샅이 뒤졌으니 다시 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동안 몸 좀 추스르시면 되겠네요.”
“뭐 그 정도는 괜찮겠지.”
“그럼 따라오세요.”
연수는 노인을 3층에 있는 구석방으로 안내했다.
“혹시 돈은 있으십니까?”
“왜? 내가 돈도 없어 보이느냐?”
“그게 아니고 객방비를 지불해 놔야 해서 그래요.”
“얼마냐?”
“이방은 3일 치 은자 한 냥입니다.”
노인은 방을 한번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좋은 방은 없느냐?”
“이 방이 제일 몸 숨기기 좋습니다. 문 열고 나오시면 1층까지 훤히 볼 수 있고 창을 열어보면 객잔 앞거리가 한눈에 들어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자 한 개를 품에서 꺼내어 줬다.
“그럼 쉬고 계세요.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안 나갈 테니 걱정 말거라.”
연수는 그대로 1층으로 내려와 전통에 은자를 집어넣어 두고 장부에 표기를 마치고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잠을 잤다.
다음 날 객주가 출근하자 연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물론 노인을 숨겨 준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다른 일은 없었고?”
“예, 그저 객방에 주무시는 손님들이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그랬군.”
“그리고 저 객주님.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보아라.”
“사실 제가 이곳에 거지로 떠돈 이유가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기억을 잃었기에 그렇습니다.”
“그거라면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제 문득 잃은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기억을?”
“예. 기억을 찾고 보니 저는 고아가 아니었습니다.”
“부모가 있느냐?”
“예. 약초 캐는 아버지와 장사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당시 어려서 외삼촌 따라 서호에 왔다가 길을 잃고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었습니다.”
“저런! 네 부모님이 걱정이 태산이겠구나.”
“예. 그래서 이만 점소이 일을 그만두고 부모님께 돌아갈까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죄송합니다. 객주님.”
“네가 죄송할 게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기억을 되찾아 천만다행이다.”
“그럼 3일 후에 떠나겠습니다.”
“어째서 바로 가지 않고?”
“소개와 인사도 해야 하고, 사장님이 새로운 점소이도 구하셔야죠.”
“허허 별걱정을 다해 주는구나.”
“여기저기 도움 주신 분들 인사도 드려야 합니다.”
“그래, 그래. 그렇게 하거라.”
“감사합니다.”
연수는 그날부터 거지 생활을 할 때부터 잘 봐주었던 서호 시전상인들에게 인사를 다녔고, 다음 날이 되자 잠시 시간을 내어 개방의 서호 분타로 향했다.
분타의 앞에 서자 2결 제자 둘이 연수를 보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오?”
“저, 소개를 좀 만나러 왔습니다.”
소개라는 말에 2결제자 둘의 표정이 풀렸다.
“소 선배와는 잘 아십니까?”
“친구입니다.”
‘나이도 소개보다 많아 보이는데 소개가 선배인가 보네.’
문을 지키는 두 명의 2결제자는 자신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다. 그중 키가 큰 거지가 소개를 불러온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서호의 분타주 영방이 손에 닭 한 마리를 들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응? 너는 소개의 친구가 아니냐?”
“예. 소개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분타주님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연수는 어깨에 메고 온 오량주 다섯 병을 영방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 귀한 걸 매번···. 근데 이번엔 다섯 병이나?”
“제가 이번에 서호를 떠나게 되어서 그간 소개를 잘 봐주셔 감사하다고 인사도 드릴 겸 가져 왔습니다.”
“허허 기특하구먼. 일단 안으로 같이 들어가게.”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허허 거지소굴에 뭐 감출 게 있다고 안 되겠나? 들어가게.”
영방이 다시 권하자 문지기 하던 제자가 활짝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데 마침 소개가 나오고 있었다.
“스승님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안 그래도 귀한 손님이 찾아 왔더구나.”
“연수야!”
소개는 한달음에 달려와 연수의 손을 맞잡았다.
“웬일이야?”
“할 말도 있고, 분타주님께 감사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와봤어.”
“스승님 제자 잠시만···.”
“그래, 그래. 나가서 이야기하고 오너라.”
그동안 소개는 분타주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는데 평소 같지 않은 스승의 반응에 유심히 살펴보니 그의 어깨에 주렁주렁 오량주가 다섯 병이나 걸려있었다.
‘어쩐지 저 양반이 쉽게 외출시켜 주더라.’
소개는 소림의 사대금강 정보를 물어온 후에 분타주의 제자로 발탁되었는데, 그 덕분에 분타주는 6결로 승결이 되었고, 소개는 최근에 4결로 승결이 되었다.
2결에서 공로와 구연공의 성취를 인정받아 3결을 건너뛰고 4결제자가 된 것이다.
물론 분타주의 제자가 된 덕분에 다른 평개처럼 여유 있는 생활은 못 하고 분타와 본타를 왔다 갔다 하며 하루 대부분을 무공수련만 하지만, 그 또한 소개 본인이 바라 마지않던 일이라 불만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잠깐 외출하는 것에도 잔소리하던 스승이 입이 귀에 걸려있는 걸 보니 또 연수가 비싼 술을 줬겠거니 했는데 다섯 병이나 걸려있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천천히 이야기하고 오너라.”
연수는 소개를 데리고 서호 객잔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여전히 숙수에게 부탁해 큰 왕만두를 한 바구니 얻어다가 소개 앞에 놓은 연수는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있냐? 그 비싼 술을 다섯 병이나 가져다주질 않나.”
평소 연수는 석 달에 한 번 소개를 통해 오량주를 전해 주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오량주 한 병에 도매로 사는 가격만 은자 1냥이었으니 점소이 주제로는 그것도 과한 접대였다.
“다른 게 아니라 나 이번에 서호 바닥 뜬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소개는 커다란 왕만두를 후후 불며 집었다가 떨어트리며 물었다.
“소개야, 네가 전에 그랬지? 우리 같은 고아가 출세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긴 했지.”
“나 무공 배우러 간다.”
“무공을 배워? 누구한테? 어디서?”
“지난밤에 말이야···.”
연수는 하나도 빠짐없이 지난밤 겪은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뭐? 그럼 사파인이 되겠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아, 이 미친놈이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개방에 입방하면 되지 뭐 한다고 사파의 누군지도 모르는 늙은이를 따라가!”
“소개야, 나는 말이다. 정말이지 거지가 싫다. 아니, 거지의 삶이 싫어.”
“개방 거지는 그냥 거지가 아니야!”
“그래도 거지는 거지잖아.”
“그건 그렇지만···. 너 알고 있는 거야? 나는 정파인이야.”
“알아. 근데 말이다. 그 정파라는 거 꼭 좋은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더라. 그 호검문 무사 놈도 나 같은 민초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베겠더라고.”
“그야···.”
소개는 더 변명할 말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자신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으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왜 갑자기 무공이 배우고 싶어진 건데?”
“사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무림인들의 무위가 허풍인 줄로만 알았다. 세상에 장풍을 쏘고 날아다니고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했지. 근데 그때 그걸 본 후로는 항상 배우고 싶다고 열망하고 있었어.”
“그러면 차라리 다른 곳에 입문하면 되잖아.”
“어디? 개방 말고 나를 어디서 받아서 무공을 가르쳐 주겠냐?”
“그건···. 또 그러네. 그러면 나한테 배워.”
“미쳤냐? 소개야 요즘 잘 나가는 것 같던데 한 방에 훅 가고 싶어? 폐인이 돼서 나랑 같이 구걸하며 연명 하고 싶지?”
“하아···. 그래서 그 늙은이는 엄청난 고수라도 된데?”
“그걸 모르겠어. 말하기를 고수라면 고수고 아니라면 아니래. 그래도 점소이나 하는 것보다야 더 나은 걸 배우겠지.”
“그럼 언제 가려고?”
“모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꼭 돌아오마. 이 서호로.”
“이놈아, 하필 사파냐···.”
“정파에서 나 같은 거 받아 주기나 하겠냐. 그리고 사파면 어떻고 정파면 어때? 너와 내가 친구라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텐데.”
“하아, 그래 그거면 됐지. 그거면 됐어.”
소개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는데 한숨과 함께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연수는 애써 못 본 척하며 침상 밑을 뒤적거리며 전낭과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고 전낭을 그 위로 뒤집자 금자와 은원보가 상자 위로 떨어졌다.
연수는 전낭에 은자 열 냥을 넣어 품속에 넣고는 상자를 닫아 소개에게 내밀었다.
“응?”
“금자 한 냥 은원보 한 개 은자 50냥이다. 받아.”
“야, 이걸 왜 나한테 줘? 그동안 뼈 빠져라 벌어놓고는.”
“그 영감님 말하는 거 보니까 돈 없어서 고생하지는 않겠더라. 잘 보관하다가 굶지 말고 써. 가끔 네 스승님한테 오량주도 대접하고, 괴롭히는 선배 있으면 술도 대접하고, 속세 생활 잘하는 거 다른 거 없다. 윗사람들한테 잘 보이면 그게 최고야.”
“야 내가 평개도 아닌데 나를 괴롭힐 사람이 누가 있다고.”
“자식아, 네가 여기 서호에서나 잘 나가지 본타에 가면 승개가 넘친다며? 본타에서도 눈치 봐서 높은 양반이다 싶으면 비싼 술이나 사다 먹여, 그게 다 몇 배로 너한테 돌아오는 거야.”
“그래도 이 큰돈을 주면 너는···.”
“나야 어딜 가도 돈 때문에 고생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괜히 전낭에 넣고 다니다 잃어버리지 말고 전장에다 맡겨놓고 그때그때 꺼내 써. 그래도 개방 4결 제자인데 전장에서 돈 출처를 묻지는 않을 거다.”
“하아···. 이별 선물인 거냐?”
“그래 인마. 이별 선물로 이 형님이 후하게 썼다.”
소개는 피식 웃고는 품에서 작은 보합을 꺼내 연수에게 건넸다.
“이건 뭐냐?”
보합을 열어보니 거무튀튀한 환이 하나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렇다고 별 볼 일 없는 건 또 아닌데, 소정환이라고, 지난번 네가 준 정보로 스승님이 승결하면서 본타에서 내려온 상이다. 엄청난 영단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개방에서 연단하는 환단인데, 소림이나 무당 화산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귀한 거야. 스승님이 당시 세 개를 받아서 본인이 하나 갖고 나한테 두 개나 줬거든. 덕분에 2년 만에 구연공 5성을 넘어 승결하게 된 거야. 그거 없었으면 몇 년은 구연공만 익혔을 거다.”
“이거 줘도 되는 거냐?”
“스승님이 내상을 입었을 때를 대비해서 하나는 갖고 있으라고 했는데, 뭐 어떠냐? 내가 뭐 어디 싸우러 나갈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몇 년은 무공만 익힐 텐데. 너도 무공을 배울 테니까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이 환단에 대해서는 어디서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 우리 개방이 연단술이 있다는 건 나름 극비사항이야.”
“그래, 알았다. 고맙게 잘 쓸게.”
“휴, 하필이면 내일 본타에 가는 날이라 배웅도 못 하겠네.”
“어차피 영감님이 도망 다니는 처지 같아서 배웅받을 상황도 못 돼.”
“꼭 서호로 돌아와야 한다.”
“걱정하지 말고 잘하고 있어라. 내 돌아오면 분타주 쯤 돼 있어라.”
“그래, 그러니까 출세한 친구 덕 보러 꼭 돌아와 인마.”
“알았어.”
둘은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는 깊게 포옹하며 헤어졌다.
알고 지낸 지는 몇 년 안 되었어도, 힘든 시기에 동고동락하며 의지한 죽마고우가 멀리 떠난다니 소개의 마음에는 큰 구멍이 난 것 같았다.
비록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처지였지만, 같은 지역에 있다는 것만으로 큰 의지가 되는 연수였다.
실제로 자신이 4결 제자가 된 것도, 분타주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연수의 도움이었다.
힘없이 분타로 돌아가는데 소개는 문뜩 호검문이 생각났다.
'이 새끼들이 감히 연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