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종장 (2)(完)
계획대로 적하 진인이 무림맹의 맹주가 되었다.
아직 중원 곳곳에선 단목장룡이 맹주로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긴 했지만, 그들이 추앙하는 단목장룡이 직접 적하 진인을 지목했기에 백단부흥회에서도 단목장룡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무림맹을 떠나기 전, 이새붕을 비롯한 무림맹에서 만든 인연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뭐, 단목장룡이 중원을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겠지만, 그들에겐 마지막으로 직접 인사를 하고 싶었다.
설비연은 무림맹을 떠나는 단목장룡을 따라 보좌하고 싶다고 했지만 단목장룡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녀의 충심이 부담스럽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서로 으르렁댔던 남궁일몽과 설비연의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를 느꼈기 때문이다.
설비연과 남궁일몽이 겉으로는 부정하는 사이였다면, 단목장룡이 직접 무공을 가르쳤던 이새붕과 조연연은 진짜 연인 사이가 되어 있었다.
듣자 하니 이새붕이 먼저 마음을 고백했다는데, 그 부분에서 단목장룡은 꽤 놀랐었다.
과거 여인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못하던 이새붕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목장룡 또한 이 몸으로 살아가며 사공천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성장해 왔다. 그처럼 이새붕도 세월이 지날수록 성장한 상태였다. 무인으로서도 사내로서도 말이다.
단목장룡은 그들에게 고이 접은 서신 하나씩을 전달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은 아닐 것이며, 조만간 또 만나게 될 것이다.
호북성 무한의 한 장원에서 말이다.
서신에 적힌 내용은 단목장룡과 교류가 있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천당문의 장녀와 단목세가의 차남의 혼인.
무림 역사 이래로 가장 관심이 쏠리는 혼인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 * *
“…….”
두 여인과 한 사내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단목장룡은 저도 모르게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무림맹주로 복귀한 후, 해남도에도 한번 찾아갔었지만 갈유화를 만나진 못했었다. 암천회주는 갈유화가 여행을 떠났다고 했었는데… 지금 이곳에서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단목장룡과 당옥정의 장원에 찾아왔다.
과거 맨살을 훤히 드러내던 옷은 아니었다. 마치 명문가의 여인처럼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었으며, 눈도 내리깔고 있었다.
“인사드려요, 언니.”
“…언니요?”
갈유화와 당옥정이 만난 것은 과거 사천의 한 객잔에서였다.
당연히 첫인상은 최악이었었다.
당옥정은 갈유화를 보고 눈을 흘긴다. 나이로 따지면 갈유화가 훨씬 연상이었다. 그런데 언니라고 하는 이유가 뭔가? 무림맹에 입맹하기 전 당옥정이었다면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옥정도 나이가 든 만큼 성숙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천성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목장룡은 그녀를 귀여워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당옥정을 귀여워할 순 없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단목장룡의 어깨를 짓누른다. 사실 당옥정에게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천향옥로단을 취했을 적에 그는 갈유화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방법은 꽤 애매했다.
그런 죄책감과 갈유화에 대한 고마움도 마음을 스친다.
갈유화 또한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타고난 외모로 사내를 도구처럼 보고 이용하려는 그 영악함이 별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단목장룡을 도와주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복수의 시간이 꽤 많이 늦춰졌으리라.
단목장룡이 느끼는 긴장감은 최강의 적이었던 천마와 마주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실로 오랜만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나와 평생을 함께할 여인을 속일 순 없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단목장룡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먼저 선수를 친 것은 갈유화였다.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찾아왔답니다. 두 분께서 반년 뒤에 혼인하신다고 하셔서요.”
“감사 인사요?”
“네, 단목 공자님이 아니셨다면 아버지는 섬서성에서 죽었을 테니까요.”
“그게 이곳에 찾아온 이유인가요?”
갈유화가 잠시 단목장룡의 얼굴을 마주한 후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사실 못된 마음도 품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답니다. 공자님께 미움을 받는 건 죽기보다 싫거든요.”
죽기보다 싫다는 말에 당옥정이 무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갈유화를 경계하기만 하던 눈빛이랑은 확실히 달랐다.
“…….”
단목장룡은 갈유화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간다.
“아마 혼인식 때는 축하를 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미리 이렇게 방문했답니다. 두 분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평생 행복하셨으면 해요. 아마 사마련주께서는 두 분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실 거예요.”
갈유화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몸을 홱 돌린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고여 있었던 듯했다.
당옥정도 경지에 접어든 여인이었다.
그것을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잠시만요.”
“…….”
갈유화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저랑 단둘이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당옥정의 말에 갈유화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그녀의 눈물은 거짓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우러나온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 또한 거짓이 아니다.
갈유화가 몸을 돌리는 순간.
“옥정아,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고백이라는 말에.
당옥정과 갈유화, 두 여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린다.
단목장룡은 이미 각오를 다졌다.
사실 양심을 속인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다. 천향옥로단 때문에 성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해도 잘못은 잘못이었다. 단목장룡은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갈유화, 너도 같이 들어가지.”
그의 말에는 기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힘. 그가 절대 고수라는 이유보다도 사내로서 따르고 싶은 마음이다. 갈유화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깔고 대답했다.
“예, 공자님.”
“응. 들어가자.”
그렇게 세 사람은 같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단목장룡의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당옥정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단목장룡이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다. 오히려 단목장룡이 당황스러워했다. 그녀가 분노하거나, 심지어 뺨을 치더라도 감내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갈유화가 더 놀란 상태였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을 당옥정에게 모두 털어놓는 단목장룡.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할까? 묻어 둔다면 드러날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천향옥로단의 거대한 기운을 제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갈유화는 사파에서 자라 모든 것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취해 왔지만, 당시의 일을 무기로 단목장룡을 협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단목장룡과 자신은 영영 멀어지기 때문이다.
갈유화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기묘한 침묵이 내부를 감싸고 있었다.
“사실 예전부터 느꼈어. 장룡이가 사파 내부의 정보를 빠삭하게 꿰고 있는 것은 갈유화 당신의 도움이 아닐까…….”
당옥정도 여인이었다. 그녀의 촉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갈유화의 이름을 떠올렸다. 사천에서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녀는 갈유화가 단목장룡을 바라보던 시선을 기억했다. 그리고 단목장룡을 보좌하는, 사파에 조력자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무림에서 영웅이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은 평범한 일이잖아. 난 여러 어머니를 두고 있으니까 잘 알아.”
사천당문의 가주는 여러 부인을 두었다.
그건 단목세가의 가주도 마찬가지다.
또, 여인이 득세하는 문파에서는 여러 남자를 곁에 두기도 한다.
당연히 여럿에 속하는 입장에선 그것이 마음에 들진 않을 테지만, 당옥정은 당용아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녀는 단목장룡 수준의 사내라면 주변에 여인이 끊이질 않을 것이라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 했었다.
“난 허락할 수 있어. 장룡, 네게 도움을 준 갈 언니라면…….”
“……!”
갈유화가 두 주먹을 꽉 쥔다.
갈 언니?
어찌 저렇게 착할 수가 있을까? 만약 자신의 앞에 다른 여인이 이렇게 찾아왔다면 그녀는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천의 객잔에서도 느꼈지만, 당옥정은 진정으로 ‘무림오화’에 걸맞은 여인이었다. 자신과는 달리 말이다.
‘왜 단목 공자님이 당옥정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네.’
갈유화가 침을 꿀꺽 삼킨다.
당옥정은 단목장룡과 갈유화 사이의 일을 듣고 ‘허락’을 했다. 큰 산 하나가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넘지 못한 산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당옥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선…….
‘공자님…….’
단목장룡의 저 진중한 얼굴이 무서웠다.
당옥정에게 모든 것을 말해 줄지 몰랐던 갈유화였다. 그는 정면 돌파를 감행한다. 만약 저 굳센 사내가 마음을 먹는다면 갈유화는 그것을 넘을 수 없으리라. 이번에 단목장룡이 자신을 거절한다면 그녀는 다시 도전할 수 없을 것이다.
“후우.”
처음으로 단목장룡이 한숨을 내쉰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두 여인에겐 미안한 점이 많았다. 사실 단목장룡이 갈유화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했다고 봐도 무방했으며, 당옥정에겐 말하지 않고 갈유화와 육체의 대화를 나누었다. 설령 천향옥로단의 영향이 있었으며 완전한 ‘선’을 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두 여인의 시선이 단목장룡의 입으로 향한다.
이제 모든 결정권은 그에게로 넘어갔다.
이미 허락을 한 당옥정의 심장도.
그의 말을 기다리는 갈유화의 심장도.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감각의 예민함이 극에 이른 단목장룡은 두 여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단목장룡이 천천히 입을 연다.
“난…….”
단목장룡의 대답에 두 여인이 숨을 죽였다.
* * *
어둠이 대지에 가라앉았다.
창 사이로 유난히 밝은 월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창 바로 밑에는 넓은 침상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세 명에서 같이 자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단목장룡의 곁에 두 여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오늘은 당 언니의 날이었으니 저는 혼자 자도 됐는데…….”
당옥정이 미소를 지으며 갈유화의 손을 잡는다.
“아니에요. 이제 한 가족이잖아요?”
“정말… 당 언니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내일은 당옥정과 단목장룡의 혼인식 날이다. 갈유화는 그 기간 동안 단목장룡과 동침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오히려 당옥정이 갈유화를 불렀다. 그녀가 외롭지 않게 해야 한다며 말이다. 갈유화는 그것이 몹시 고마웠다.
사실 두 사람의 성격은 완전 정반대였다.
갈유화는 예민한 고양이와 같았고, 당옥정은 순진무구한 강아지와 비슷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지금도 서로를 언니라 부르며 서로를 존중하려 애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단목장룡은 행복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을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매 순간이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 손을 맞잡은 두 여인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단목장룡의 몸이 흠칫 떨렸다. 천마의 주먹 앞에서도 떨리지 않던 육신이었지만, 지금은 몸이 떨려 왔다.
“후후… 우리 낭군님께서도 많이 긴장하셨네요.”
“괜찮아, 장룡.”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하하! 오랜만이야, 친구.”
“찾아와 줘서 고맙군.”
당옥정과 단목장룡의 혼인식에는 오랜만에 보는 인연이 찾아왔다.
녹림의 대호법 동방강수, 그 덕분에 과거 제갈교아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천자산 꼭대기에 설치된 진의 기운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단목장룡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 동방강수는 귀한 인연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달랐지만, 친구가 되었다. 지금 동방강수는 대호법이 아닌 녹림의 총 채주가 되었다.
반가움에 미소를 짓던 동방강수, 그가 단목장룡을 바라보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고금제일인이자 무신이라 불리는 단목장룡이지만 그의 눈빛이 왠지 퀭했다. 기운이 없어 보인달까? 절대 고수가 기운이 빠져 보인다면 착각일까?
“자네, 괜찮나?”
“음, 괜찮지. 별것 아니야.”
“……?”
뭐가 별것 아니라는 건지 물어보려던 동방강수.
그때 두 여인이 장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의복을 걸친 귀여움을 겸비한 미모의 여인. 그 뒤로 그에 못지않은 여인이 다소 단출한 의복을 입고 나타났다. 장원에 모인 모두가 탄성을 내지른다.
“당 부인이시군!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정말 아름답구나!”
“저 뒤의 여인이 소문의 그…….”
“역시 대영웅의 부인이 되실 분들이구나!”
“어머머, 피부에서 광이 나는 것 좀 봐. 어떻게 사람 피부가…….”
당연히 갈유화가 사파의 출신이라 해도 욕하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갈유화는 단목장룡의 부인이 될 여인이라고 찬양을 받고 있었다. 단지, 오늘의 주인공은 당옥정이었기에 최대한 주목받지 않게 행동할 뿐이다.
“암천회의 공주시군. 역시 자네는 대단한…….”
말을 이어 나가던 동방강수가 입을 다문다.
퀭한 눈빛의 단목장룡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빛나고 있었다.
단목장룡과 두 여인이 눈을 마주친다.
세 사람의 입가엔 꾸미지 않은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럽군.’
동방강수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 마음을 바꾸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네, 정말 행복하겠군.”
단목장룡이 두 여인과 계속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에 넘칠 정도로 행복하지.”
동방강수가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다만, 단목장룡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 행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지.”
단목장룡이 두 여인을 향해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동방강수가 작게 뇌까린다.
“자네는 그럴 것 같군.”
오늘은 무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단목장룡이 부러운 마음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