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오늘도 그는
기(氣)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단목장룡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대자연에 뻗어 있는 기를 느끼고 그것을 단전에 품게 된 이들이라면 처음으로 떠오르는 궁금증이 바로 그것이다. 대체 기라는 것은 무엇일까?
기는 인간의 육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다.
기라는 것은 심법을 통해 내공으로 변환되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기와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르다. 애초에 기라는 것은 인간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숨만 쉬어도 기가 단전에 쌓인다면, 내공심법을 배우기 위해 안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 같은 양의 내공을 단전에 품는다고 해서 똑같은 위력을 발휘한다면 소위 말하는 절세의 내공심법 따위는 무용지물이리라.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같은 양의 기를 단전에 품더라도.
기는 사람에 따라 혹은 내공심법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나뉜다.
소위 대종사라 불리는 이들.
다른 무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내공심법을 창안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넓디넓은 중원에서 수많은 무공이 탄생하게 된 것도 그 이유였다. 기(氣)라는 것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태도도 다르며, 활용하는 방법도 다르다.
화산의 자하신공은 자줏빛의 색을 발현하며 매화를 상징한다.
그들의 검강은 매화 향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다른 인간들을 현혹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무당의 태극신공은 흑과 백을 조화하여 태극을 나타낸다.
그들의 검강은 무엇이든 벨 수 있으며, 어떤 검강을 상대하더라도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 없이 순수한 힘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결국 심법의 ‘색’으로 자신들이 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마다 나타낸다.
물론, 색만이 심법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다. 같은 색이라도 다른 차이로 인해 천차만별인 힘을 내곤 한다. 가장 쉬운 예를 들자면 화산의 자하신공과 나찰마궁의 자미소는 표현되는 색이 비슷하다. 물론, 실제로 마주하면 두 무공의 차이가 얼마나 극심한지 알 수 있으리라.
단목장룡은 예전부터 의문이었다.
기(氣), 그러니까 내공(內功)이라는 것은 꼭 하나의 특성만 지녀야 할까?
사실 하나만 파고들어도 극의에 이르기란 힘들다. 자신이 학자도 되고 싶고, 무인도 되고 싶으며, 장사를 통해 부를 이루고 싶다고 하여 모든 방면해서 뛰어날 순 없었다.
무공도 마찬가지였다.
검법을 다루면서 독공과 암기술도 다루고 싶으며, 자신이 익힌 내공심법이 아닌 다른 명문거파의 심법을 익히고 싶다고 하여 그것을 모두 익힐 순 없었다. 명문거파에서 자신들의 심법을 내줄 리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만약 그들에게 자하신공과 태극신공을 주더라도 그것을 동시에 익힐 수 있을까?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화산과 무당의 시조도 겨우겨우 창안하고, 후대에서 그 무공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만들어 놓은 것이 자하신공과 태극신공이다. 그들뿐 아니라 구파일방이나 사마세가 그리고 천마신교의 것까지 무공은 다양하다.
그들의 무공은 저마다 다른 특징이 있다.
천마신공을 익힌 이들이 자하신공을 보면 그들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 이해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익히려 하진 않는다. 천마신공이 자하신공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무공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무공에서 정녕 통하는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사실이지만, 천마신공을 익히다가 화산의 자하신공을 완벽하게 익히겠다고 한다면 결코 극의에 이르진 못하리라.
단전은 가장 처음 익힌 무공에 따라 성질이 고정된다.
애초에 천마신공을 익히고 자하신공의 내력을 단전에 품을 수 없었다.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전의 성질을 완전히 바꾸려는 노력보다 천마신공을 이용해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수월하다. 아니, 쉽다.
그러니 모든 무인은, 자신들의 위치에 맞는 무공을 익히고.
그것을 통해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고자 한다. 다른 무공의 비급을 읽고 깨달음을 얻을 순 있겠지만, 내공심법이 추구하는 방향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선조들이 다른 무공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내면에 집중하여 발전을 도모하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괴.’
단목장룡은 사방에서 빗발쳐 오는 천마군림보의 보랏빛 악의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상상 속에서 다시금 자신의 ‘지식’을 되새기고 있었다.
천마신공은 만마를 복종시키는 파괴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보법이나 신법이라는 것은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공세를 취하기 전 상대에게 접근하기 위해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천마군림보는 다르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사방으로 보랏빛의 기운이 뻗는다. 그리고 다음 장소에서 발을 디디면 또다시 새로운 기운이 뻗어 나온다. 그것은 파동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서로서로 공명하여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그 파동은 점점 더 울림을 키워 가며 더욱 증폭되고 있었다. 널리 퍼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끼아아아아아-!
파동은 절규와도 같은 곡소리를 내며 중심부로 쇄도했다.
당연히 중심부엔 단목장룡이 서 있었다.
거대한 악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찢어발기려는 그 보랏빛의 기운이 단목장룡에게 집중된다. 당장이라도 경공을 펼쳐 도망가야 할 정도로 기괴하며 공포를 자아낸다.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첫 파동이 닿은 순간 절명했을 수준이다. 그 파동이 겹쳐지고 또 겹쳐지며 파괴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게 상단전을 열어 새롭게 만들어진 천마군림보.’
단목장룡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 또한 긴장하고 있었다. 사방을 채우는 귀곡성에 소름이 돋아난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희열 또한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사공천과 그 시작부터 달랐다.
무공을 익혀야 하는 ‘이유’가 생겼으며.
왜 익혀야 하는지 모르는 무공들을 해체하고 분석하고 수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사공천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익힌 무공은 수라신공이었다. 왜 천마신공이 아니었냐고? 천마신공은 교주나 단 한 명의 후계자에게만 허락된 무공이다. 사공천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것을 익히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불만인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사공천에게 무공의 시작은 타인의 강요와 압박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사공천과 달랐다.
이미 처음 시작부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교가 중원 정벌을 통해 강탈한 무공서들이 그의 머릿속에 잠들어 있었다. 화산파, 무당파, 소림사, 천마신교. 내로라하는 문파의 절세 무공들이 머릿속의 서고에 척척 정리되어 있었다.
해우심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단목장룡이 설계한 내공심법이었다.
선택과 집중이 무인의 경지를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했던가?
단목장룡에겐 그것이 선택과 집중이다. 모든 무공을 ‘이해’할 수 있는 재능을 그대로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한 기회를 얻은 것은 중원에서 단목장룡 한 명뿐이었다.
그는 그 강점을 가지고 성장해 왔다.
자신이 익힌 무공만이 진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각각의 무공에는 그럴듯한 심득이 담겨 있었다. 굳이 그것을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무공의 장점만을 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단목장룡에겐 선택과 집중이었다.
천혜성(天慧星)이 상단전을 개방하여 새로운 진리를 터득한, 파괴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천마신공과 마주했다. 지금 이 순간, 단목장룡의 재능이 또다시 만개하기 시작했다.
* * *
끼아아아아아-!
끼아아아아아아-!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곡소리. 천마가 진심으로 펼치는 천마군림보는 그 자체로 아수라의 강림이라 할 수 있었다.
파괴, 파멸, 괴멸, 멸망, 종말.
무수히 많은 단어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
천마군림보는 종말을 고하는 예언과도 같았다. 보랏빛의 악의는 주변의 생명력을 파괴했으며, 어떤 생명의 존재도 허락하지 않았다. 공간 자체를 잠식하는 그 거대한 힘에 단목장룡은 중심부에 있었다.
쿵! 쿵! 쿵!
파괴의 시작은 천마군림보였으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파천수라장(破天修羅掌).
천마가 자랑하는 장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쿠릉!
파천수라장과 단목장룡의 유성일락이 충돌한다. 검으로 장법을 베어 내는 것은 힘들다. 사실 장법은 피해 내거나 반탄지기로 튕겨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검강이라는 것은 보통 베어 내는 데 용이하지 넓은 반경을 타격하는 장법을 막아 내는 데 수월한 기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목장룡의 유성일락은 파천수라장을 정확히 막아 냈다.
그의 유성일락은 단순히 베기 위한 검법이 아니다. 하늘에서 화려한 빛을 발하며 떨어지는 유성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대지에 믿을 수 없이 거대한 구멍을 만든다. 유성이 미치는 힘의 범위는 대단히 넓었다.
쿠르응! 쿠응!
파천수라장과 유성일락이 부딪치며 고막을 터트리는 굉음을 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냐면, 근처에서 서로 싸우고 있던 독각수라와 암천회주가 깜짝 놀라 싸움을 멈출 정도였다.
“……!”
“…저게 뭐지?”
암천회주가 독각수라에게 묻는다.
조금 전까지 서로에 대한 악의를 잔뜩 쏟아 내며 손속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 적과 대화를 하는 것은 암천회주의 성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독각수라는 천마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천마가 펼치는 저 괴랄한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꿀꺽.
하지만 독각수라조차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천마가 진심으로 무공을 펼치는 걸 처음 목도했다. 신교 내에서 천마가 저리 무공을 펼칠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독각수라와 가끔 비무를 하긴 했지만, 저렇듯 과격하진 않았다.
“…천마께서 얼마나 강한지 알겠느냐?”
독각수라의 말에 암천회주가 콧방귀를 뀐다.
“너도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
“갈! 당연하다! 천마께서는 만마를 지배하는 지존이시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
암천회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다.
“닥치고. 제안 하나 하지.”
“뭐지?”
“잠시 싸움을 멈추는 게 어떻겠나?”
“…….”
독각수라는 본래 이런 사내가 아니었다.
상대해야 할 적이 있으면 어떻게든 상대를 압박하여 목숨을 끊어 놓는다. 혈우검마와 같이 그 또한 지옥과도 같은 마교에서 생존했던 무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보고 싶다.’
암천회주는 독각수라와 비슷한 실력을 가졌다.
사실 끝까지 가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였다. 그만큼 암천회주는 강했다.
그런 암천회주와 싸운다면 당연히 단목장룡과 천마의 싸움은 지켜보지 못할 것이다. 독각수라가 마교의 부교주라 하지만 그 또한 무인이다. 더군다나 마교는 강자존을 숭배하는 종교 집단과도 같았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이 어떻게 싸우는지 견식할 수 있다는 건 발전의 밑바탕이 될 기회였다. 독각수라와 천마가 익힌 무공은 달랐지만, 마교의 무공은 결이 비슷했다. 독각수라는 당연히 천마와 같은 무력을 가지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끼리 승부가 결정 난다고 해도 진짜 승패는 더 두 사람 중 누가 승리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군.”
암천회주 갈천능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천마와 단목장룡이 하는 싸움을 보면, 극마의 고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극마의 고수 다섯이 모여야 천마 한 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뭐, 극마의 고수가 작정하고 힘을 모으고 진을 펼친다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애초에 그런 가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어떻게 인간이 저리 강할 수 있는가?
천마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분명히 단목장룡은 과거 자신보다도 실력이 낮았다. 처음 암천제에 참가하러 왔던 단목장룡을 기억한다. 그는 분명히 마고파심탁을 감지하고 방어하기까지 했으나, 당시의 단목장룡은 암천회주가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지.”
독각수라는 대답을 하고 바로 암천회주와의 거리를 벌렸다.
처음엔 독각수라는 암천회주를 믿지 못하고 슬쩍슬쩍 시선을 옮겨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쿠르으응!
쿠으응!
단목장룡과 천마의 싸움이 펼쳐지면 펼쳐질수록.
독각수라는 그 싸움에 홀딱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극마 그 이상에 오른 고수의 싸움을 이렇듯 생생하게 관전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몇 번 보아 왔던 천마의 무공을 단목장룡이 어떤 식으로 방어하는지도 눈여겨볼 장면이었다.
“암혼뢰(暗混雷)!”
천마의 검지 끝에서 짙은 보랏빛의 뇌전이 터져 나오자 독각수라가 반사적으로 외친다.
단목장룡은 흑색의 검강으로 암혼뢰를 쳐 냈다. 지금도 분명히 단목장룡이 힘 싸움에서 밀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일까?
‘왜…….’
처음 독각수라가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볼 땐, 천마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파악했다. 단목장룡은 인상을 써 대며 밀려나기 일쑤였으며, 천마는 광오한 표정으로 그를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뭔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렸던 단목장룡의 입꼬리는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으며.
천마의 광오했던 표정은 점점 굳고 있었다.
왜인지 독각수라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