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혈우검마
단목장룡은 마교 무공의 파훼식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마교의 간부 중 하나가 오래전부터 배신했다는 말이 된다. 단목장룡 혼자서 마교의 무공서를 빼돌리고 홀로 파훼식을 만들었다고 어찌 믿을 수 있으리?
현재 소교주의 지휘 아래 교도들은 마도육문의 문주급이나 장로들의 뒤를 캐고 있었다. 단목장룡과 내통한 이들을 발견하게 되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을 받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최근까지도 간자를 찾아내려고 했던 혈우검마였다.
‘대체 그 간자가 누구길래……!’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무림맹에서 배포한 파훼식은 분명히 범위가 넓었다. 하지만 마교의 무공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다. 가령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천마신공의 파훼식은 없었다. 세상 최고의 무공이고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무공이니만큼 파훼식은 존재할 수 없었으며, 천마신공의 파훼는 천마보다 더 강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천마신공뿐만이 아니다.
천마신교의 부교주들이나 장로들이 익힌 독문무공 같은 경우에도 당연히 무림맹에 배포한 파훼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구파일방의 절기들과 비견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간부급들의 무공. 아무리 마도육문의 문주라고 하더라도 부교주나 장로급들이 익힌 무공서를 빼돌릴 순 없었다. 설사 빼돌린다 할지라도 천마신공처럼 파훼법을 만들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혈우검마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지금 단목장룡이 펼친 무공은…….
“네놈이 어떻게 혈살지망을 알고 있는 것이냐!”
쿠응!
눈동자에 핏발이 가득한 혈우검마. 그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검을 또다시 휘둘렀다. 이번에도 혈살지망이다. 검 끝에서부터 퍼져 나온 거미줄과 같은 붉은 검강. 혈우검법의 오의 중 하나였다.
무공의 오의는 구결을 안다고 하여 쉬이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구파일방 무공의 진본을 수도 없이 강탈한 마교도들이 시기적절하게 정파의 무공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떨 때는 화산의 매화검법을 펼치고 또 어떨 때는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을 펼쳐 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각 무공에는 알맞은 내공의 활용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적절하게 지키지 않으면 비슷하게 연출은 할 수 있더라도, 심득을 얻어 쌓아 올린 본연의 힘을 모두 펼쳐 낼 순 없었다.
“네놈이!”
까아앙!
“어찌 그것을!”
카아앙!
“펼칠 수 있냐는 말이다-!”
쿠웅-!
연격으로 들어오는 혈우검마의 검격. 반드시 상대를 찢어 놓겠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단전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혈우심법의 내력.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진득한 내력이 거미줄 형태로 폭사된다. 혈우검마의 혈살지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 내는 것 또한 혈살지망이다.
단목장룡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혈우검마의 공격을 막아 냈는데, 그의 검에서도 거미줄과 같은 검강이 맺혀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단목장룡이 신형을 움직이며 펼치는 무공 또한 혈우검마의 절기라는 점이다.
혈우신법.
보법을 펼칠 때마다 강렬한 핏빛 기운이 바닥을 때려 댄다. 한창 펼치고 있는 와중엔 핏빛의 안개가 자옥하게 피어올라 장관을 이룬다.
“어찌……?”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단목장룡이 자신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말인가? 혈우검마의 무공은 천마신교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공이다. 당연히 평범한 교도들은 무공을 견식하는 것만으로도 개안을 했다면서 찬양하는 수준의 무공이다.
그 무공의 비급을 가지고 있는 자는 혈우검마 본인이었다.
비급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 담겨 있기에 적절한 후계를 찾는다면 전수해 줄 수 있으나 아직 혈우검마는 자질에 맞는 아이를 찾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의 무공이 유출되었는가?
이 무공의 구결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곤 소교주나 천마신교의 지존인 천마뿐이었다.
‘설마 소교주께서……!’
차마 천마는 의심할 수 없었다.
소교주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천마신교를 만들겠다며 이제까지 시도하지 않은 것들에 손을 대었다. 교도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간자를 찾는데도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한 이유. 혹시… 소교주가 간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
그의 위치라면 천마신교의 비고에 출입이 가능하다. 그는 천마가 될 사내였다. 천마신공까지 익힌 마당에 다른 무공서를 열람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라면 충분히 마교의 파훼식을 만들 수 있었으며, 그럴 시간도 충분했다.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것을 준비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체 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 몇 합을 나눠 본 결과 무림맹주 단목장룡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내용을 교주님께 보고해야 한다.
그래야지 천마신교의 염원인 무림일통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날 찾아온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혈우심법의 내력이 눈에도 가득 찼다는 증거였다. 혈우검마의 세상이 붉게 물든다. 보이는 것은 오직 단목장룡뿐이다. 그에게서 생존해야 한다. 천마신교라는 지옥에서 생존하여 부교주에까지 오른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자신은 생존하리라.
독기를 품고 검을 꽉 쥔다.
“죽여 주마.”
타닷!
혈우검마가 보법을 펼쳐 단목장룡의 후방을 점했다.
진득한 검붉은 검강이 검에 일렁이고 있었다. 혈살지망이 촘촘한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는 검강이라면, 혈천혼암(血天混暗)은 닿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검강이다. 혈우검법의 최종 오의.
십 년 전만 해도 완성하지 못했던 오의였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불안정했던 혈우검법은 개선되었고, 그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혈우검마는 극마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그를 극마에 이르게 한 오의가 오늘 달빛을 머금은 채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혈우검마가 이것을 실전에서 펼친 것은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단목장룡은 이것을 펼쳐 내지 못하리라. 아무리 혈우신공을 익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촤르륵!
검을 휘두르자 검붉은 검강이 물보라가 이듯 앞으로 터져 나간다. 당연히 검과 떨어지면 그 위력이 급격히 줄어들지만,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연약한 육신 따위는 순식간에 녹여 버릴 수 있었다. 반탄지기를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막아 낼 수 없었다.
인간의 육체에 닿은 혈천혼암은 상대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반탄지기로 이것을 막아 낼 순 없었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오로지 피하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단목장룡의 보법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사방으로 뻗어 가는 혈천혼암을 모두 피해 내지 못하리라.
쉬이익!
쉬이잇!
혈우검마가 단목장룡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휘두를 때마다 진득한 검붉은 검강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물론, 이것만으로 극마에 이른 고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순 없었다. 이렇게 혈천혼암의 검강을 마구 흩뿌린 후, 그다음이 중요했다. 혈천혼암이 단목장룡의 반탄지기를 먹어 치우고, 그의 살점을 녹이려는 순간, 혈천혼암의 기운이 가득 담긴 검으로 그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찰나의 순간.
혈우검마가 단목장룡의 주위로 혈천혼암을 뿌려 댔다.
이제 저것이 닿기만 하면…….
“……!”
혈우검마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진다.
혈천혼암은 평범한 반탄지기나 검강으로는 막아 낼 수 없었다. 검강을 발현하여 그것을 쳐 내지 못한다. 혈천혼암은 거머리처럼 상대의 기운을 빨아먹는 게걸스러운 힘이었으니까.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은 나락 속으로 끌어들이는 심연(深淵)이었다.
천마신공 정도는 되어야만 그 기운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같은 무공인 혈우신공의 혈세지망으로는 당연히 그것을 막아 낼 수 없었다. 혈세지망보다 몇 차원은 더 높은 오의였으니까. 펼칠 때마다 단전의 내력이 일 할이 소모되는 최후의 수단이었으니까.
평범한 검강으로는 막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했을진대…….
붉은 광채가 흩날리는 거미줄 형태의 검막이 단목장룡의 주위로 뻗어 나간다.
그는 몸을 회전시켜 검을 휘두르며 혈세지망을 펼쳐 냈다. 당연히 혈우검마는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잠깐 지연시키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혈세지망으로는 최종 오의인 혈천혼암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게걸스럽게 상대의 내력을 포식해야 했을 혈천혼암은…….
“말도 안 된다!”
찬란한 광채를 뽐내는 거미줄에 닿는 순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졌다. 녹아내렸다. 단목장룡이 혈세지망을 펼치는 것으로 봐서는 그 또한 혈우심법을 익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내력이라도 어떻게 변환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극마에 오른 혈우검마가 할 수 있는 검강의 최종 단계 혈천혼암.
그것이 고작해야 혈세지망의 검강에 가로막힌다.
파바밧!
단목장룡의 혈세지망은 이제까지와 전혀 달랐다.
만약 처음부터 저러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면, 처음 몇 합을 나누는 과정에서 혈우검마가 느낄 수 있었으리라. 그의 혈세지망은 무참히 깨졌어야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단목장룡은 힘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노오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망연자실하여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혈우검마는 자신에게 뻗어 오는 혈세지망을 향해 검을 뻗었다. 진득한 형태로 검신에 흐르던 혈천혼암의 검강이 자신의 손에 닿는다. 그것을 펼친 혈우검마라 할지라도 검강의 포식엔 대항할 수 없었다. 그의 살점이 녹아내린다.
그는 고통 따위를 느끼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두 손으로 검을 휘둘러 혈세지망을 겨우 찢어 냈다. 이미 검을 떠난 혈세지망이 어찌하여 이렇게 거대한 탄력을 가지고 있는가? 검강이라는 것은 검에 깃들어 있는 순간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제가 가르쳐 준 대로만 무공을 펼치고 있군요, 혈우검마 장로님.”
우뚝.
단숨에 혈세지망을 뚫어 내고 그에게 직접 혈천혼암을 펼치려던 혈우검마의 신형이 멈춘다. 그의 눈동자엔 의문이 가득했다.
지금 저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놈이 가르쳐? 무슨 개소리를…….”
부글부글!
붉게 타오르는 검강이 조금씩 검게 변해 간다. 마치 깨끗한 물에 먹을 뿌린 것처럼, 붉은 검강은 본연의 색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단단하게 압축된 검강이 아닌.
마치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검강. 그것은 혈우검마가 펼친 혈천혼암과 매우 흡사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네놈이 대체 어떻게 그걸……! 누구냐! 네놈은 대체 누구냔 말이다!”
“모르시겠습니까?”
검붉었던 검강이 이젠 완전한 어둠이 되었다.
완벽한 심연(深淵). 혈우검마가 그토록 펼쳐 내고자 했던 최종 오의의 완성본이 눈앞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 황홀한 검강의 자태에 매료됐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걸 펼친 이가 무림맹주였기 때문이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아니라 정파인이 어찌 혈천혼암을 저리도 완벽하게 펼쳐 낼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혈우신공은 혈(血)의 기운으로 마(魔)를 제어하려는 무공이지요. 그것을 완벽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심법의 구결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천마신공은 태초부터 마(魔)를 품고 있다면, 혈우신공은 그게 아니니까요.”
“…….”
혈우검마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도 완전히 그것을 지배하진 못하신 모양이군요.”
“누구냐.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느냐.”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
혈우검마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 소공자의 곁에서 머물렀다. 혈우검마는 결국 그의 도움으로 혈우신공의 한계를 극복하고 극마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물론, 소공자가 말했던 대로 완벽하게 마의 기운을 제어하는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천마신교 부교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네놈, 사공천과 무슨 관계냐!”
오랜만에 남에게서 들어 보는 그 이름.
단목장룡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이젠 제가 장로님의 목을 벨 차례로군요.”
목을 벤다?
혈우검마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고고하게 죽음을 맞이하던 소공자. 사실 살아남기 위해 상상 속에서 이혼대법의 구결을 해석하던 사공천이었지만, 혈우검마의 눈에는 죽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었다.
설마?
그건 말도 안 되지 않은가?
목이 잘려 죽은 소공자가…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고 썩어 갔던 그가 어떻게…….
단목장룡의 눈빛에 푸른 귀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태초부터 만마(萬魔)를 복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다. 지난 세월 교주님을 모시며 보아 왔던 눈빛이 단목장룡의 눈에 맺혀 있었다.
그는 혈우신공도 모자라 천마신공까지 펼쳐 내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존재는 딱 한 명 있었다.
천마라 불리는 교주 또한 경악했던 재능을 뽐내던 찬란한 보석.
혈우검마 또한 그가 다음 세대의 천마가 되리라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당신은…….”
언젠가부터 그 찬란했던 빛이 흩어져 버려 변방의 지부로 쫓겨났던 소공자.
그의 환영이 단목장룡과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