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첫 번째 목표물
혈우검마는 과거 사공천이었던 시절 교류가 왕왕 있었다. 무공을 이해하고 수정할 수는 있지만, 그걸 직접 활용하진 못한다는 다소 역설적인 방식으로 나는 마교에서의 삶을 선택했었다. 당연히 처음엔 의심 어린 시선이 많았지만, 천마의 귀기 어린 눈빛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십 년 이상을 버텨 왔기에 마교는 물론이고 교주까지 나에 대한 기대를 버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주는 알면서도 날 놔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또, 당시에 그럴 각오로 무공을 익혔다면 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의 나는 미련하고 억척스러웠으며 고집불통이었다. 그런데도 용기가 없어 마교를 떠나지도 못했었다.
솔직해 말하면 마교를 떠난다면 피를 나누고 피가 이어진 가족과 영엉 헤어진다는 생각에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감상 어린 생각이 헛된 것이라는 걸 죽는 순간에야 깨달았지만… 지금 나는 살아 있었다.
아무튼, 혈우검마는 내가 청해성 서녕 지부장으로 있을 때 가장 많이 찾아왔던 인물 중 하나였다. 무공의 재능은 내가 보기에도 뛰어났으며,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모두 무공 수련에 집중할 만큼 노력파였다.
그는 내 조언을 듣기 위해 자주 방문했었다.
나 또한 굳이 그를 쳐 내지 않았다. 그가 익힌 혈영신법을 그의 육신에 딱 맞게 수정해 주었다. 결국, 혈우검마는 장로에서 부교주가 되었으며 교주의 최측근이 되었다.
‘여전히 취미는 기루에 들르는 것이군.’
그는 서녕 지부에 올 때마다 기루에 들렀다.
오로지 무공 수련에 생을 바친 노괴가 가진 유일한 취미. 그것은 여색을 밝히는 것이다. 나 또한 기루에 많이 들렀지만, 육체적인 관계를 원하느냐와 정신적인 교류를 원하느냐가 혈우검마와 나의 차이였다.
당연히 그러한 유흥을 욕할 생각은 없다.
그는 마교의 장로였던 만큼 금자를 펑펑 써 댔으며, 서녕의 기루에선 그를 모셔 가려고 안달이 났었으니까. 더군다나 백발이 지긋한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아무튼.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서안에 왔음에도 기루를 찾았다. 칠 주야 동안 교주가 머무는 객잔에서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극마에 오르고 환골탈태를 겪고 달라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일곱 밤이 지나자 그는 객잔을 나서 기루로 향했다.
나로선 좋은 기회였다. 교주와 일대일로 싸우는 것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옆에 극마의 고수가 둘이나 있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기껏 복수를 다짐해 놓고 무턱대고 돌진하는 것은 미련한 행위다. 이제까지 강자와의 싸움을 피해 오진 않았지만, 용기와 만용은 구분해야 한다.
쉽게 말해 전략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무영혼을 이용하여 기척을 완전히 죽인 후, 화양루로 잠입했다. 무영혼은 그림자마저 숨기는 것을 추구하는 무공으로, 기존의 상식과는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말 그림자마저 감출 정도로 삼라만상의 진리를 비틀 수준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기척을 숨기는 데에 이만한 무공은 없었다.
극마 또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경지라 할 수 있다.
지척에 도달한다면 그 또한 나를 느낄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암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화양루는 사 층 높이의 건물로 층마다 화려하고 수려한 장식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객실 또한 그 수가 많았는데, 넓은 건물에 손님이 전혀 없으니 기묘한 침묵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고, 삼 층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신음이 들려온다.
“…….”
혈우검마는 성격이 급했다.
그는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지 않으려 한다. 기루를 찾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풀기 위함이다. 기루에 들어온 지 그리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바로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급한 성격은 여전하군.’
분명히 외형은 젊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것이 참으로 반가웠다.
내가 목이 잘린 후로 십 년도 넘게 지났다. 그런데 복수의 대상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뭐, 그가 개과천선하여 도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딱히 즐겁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즐거웠다.
내 기억 속에 남은 혈우검마와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으니까.
전각에 오를수록 점점 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듯하다.
* * *
혈우검마는 단목장룡의 생각처럼 욕정을 풀며 감정의 찌꺼기들을 배출해 냈다.
사실 무공도 그렇지만 부교주라는 직책은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천마신교는 강자존의 세계.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곳이다. 심지어 천마라 불리는 교주마저 더 강한 무인이 등장하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아니, 양보가 아니라 강탈당하게 된다.
그것은 혈우검마 또한 마찬가지다. 극마나 화경에 오른 고수는 목표를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었지만, 교도들은 그러지 못한다. 극마라는 절대의 경지에 오르더라도 결코 방심해서는 아니 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자’라는 정의가 천마신교에선 조금 다르게 적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문의 독에 중독되어 평소보다 활용할 수 있는 내공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치자. 거기서 패배한다면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패배자가 된다.
승자가 강하고, 패자는 약하다.
약육강식. 먹고 먹히는 세상에서 정파에서 말하는 협의 따위는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마구잡이로 독을 풀어 천마신교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죄다.
애초에 독을 풀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 증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 그것 또한 강함의 증거였다. 완벽을 추구하는 강함. 그것이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강자존(强者尊)이었다.
단목장룡이 천마신교에서 떠나려 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정을 붙인 이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평소에 강한 모습을 보이던 인간들은, 죽을 때가 되어서 비참해진다. 떳떳한 척하더라도 옆에서 비웃는 교도들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다.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곧 죽음이요, 적응하더라도 죽음과 계속 싸워야 한다.
천마신교는 아귀들이 판치는 지옥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도원향(桃源鄕)이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혈우검마는 천마신교를 도원향으로 여겼다.
태어날 때부터 강자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이들의 위에 서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언젠간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기 자신을 향한 회의감. 그런 감정은 조금씩 쌓이고 쌓여 정신을 갉아먹는다.
교도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러한 압박에서 해방되곤 하는데, 어떤 이들은 다른 이의 생명을 뺏으며 쾌락을 느끼는 자들도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느낌으로써 그 감정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가장 많은 경우가 혈우검마처럼 색욕을 탐하는 것이었다.
“후우.”
혈우검마가 곰방대를 피워 문다.
눈앞의 여인은 기력이 다하여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극마의 고수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혈우검마는 오늘을 위해 화양루를 통째로 빌렸다. 천마신교의 부교주에겐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천마신교였다면 사실 돈을 지불할 필요도 없었으나, 소교주의 계획으로 움직이고 있는 천마신교였기에 혈우검마는 그 명을 충실히 따랐다.
“다음.”
드르륵.
시비 두 명이 혼절한 여인을 들고 빠져나간다. 시비 중 한 명은 스치며 보게 된 혈우검마의 몸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근육이 마치 조각이라도 한 듯이 아름다워서? 아니었다. 혈우검마의 몸에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사람 몸이…….’
시비가 기녀를 데리고 나가고 새로운 기녀가 들어온다.
그녀 또한 혈우검마의 육체를 보고 흠칫 놀랐다. 혈우검마는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단숨에 바닥에 눕혀진 여인.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는다. 인간의 몸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흉물스러운 그것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등불을 가리고, 여인이 마음의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상상했던 그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여인이 살짝 눈을 뜬 순간.
“……!”
혈우검마의 살기 어린 눈과 마주했다.
“기루에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 그, 그게 무슨…….”
처음으로 느껴 보는 죽음의 그림자. 그것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매섭고 진득했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마교의 교도들은 모두 이러한 걸까? 그런데 대체 누구를 들였다는 말인가?
타닷!
그녀도 들을 수 있었다. 문밖으로 누군가가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말이다.
“쥐새끼가 숨어들어 왔었구나.”
혈우검마가 순식간에 장포를 걸치고 검을 쥔다.
여인은 순간적으로 닥쳐 온 공포로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혈우검마는 기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말할 뿐.
“기다리고 있어라.”
꿀꺽.
기다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당연히 기녀는 되묻지 못했다. 혈우검마의 살기를 마주하기 두려운 것도 있었으며, 그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방을 빠져나가 버린 탓도 있었다.
“허억!”
공포에 질려 제대로 쉬지 못했던 숨을 들이마셨다.
“유향아, 대체 무슨 일이더냐?”
화양루의 주인 화양루주가 심각한 얼굴로 방에 들어선다.
마교의 부교주를 손님으로 받는 것은 위험했지만, 그가 던져 준 액수는 거절하지 못할 만큼 컸다. 애초에 돈이 없었더라도 마교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몹시 위험했다.
“자, 잘 모르겠어요… 쥐, 쥐새끼가 숨어들었다고…….”
화양루주의 표정이 굳는다.
규모가 있는 기루가 대부분 그러하듯 그녀 또한 하오문의 소속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대체 어디에서……!’
심각한 문제로 번질 수도 있었다.
청해성 서녕의 만월루를 몰살한 배후는 마교였다. 아는 이가 그리 많진 않았지만, 화양루주는 그것을 아는 하오문의 간부 중 하나였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터인데…….’
하오문의 생사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사마련에서도 하오문은 그저 쓰다가 버리는 패쯤으로 생각한다. 물론, 하오문을 진심으로 돕는 ‘은인’들도 있었지만… 마교와 싸울 은인은 아무도 없으리라.
화양루주의 손끝은 공포와 걱정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 * *
토옥!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오르는 한 사내. 경공을 펼칠 때는 무게를 받쳐 주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힘을 받으려면 그만한 반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밟고서 일 장을 뛴다면, 무게의 중심을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경공의 경지가 최상승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일 장을 전진한 사내는 속도의 관성도 무시하듯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네놈?”
사내, 혈우검마가 인상을 찌푸린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과 마주한 탓이다. 쫓을 때만 하더라도 제법 경공술의 수준이 높은 무인이라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그 사내는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거기다 고작 경공술의 수준이 높은 무인이 아니었다.
“무림맹주.”
“정말 오랜만이군.”
무언가 묘한 억양의 말투였다.
고작 칠 일 전에 만났을 뿐이건만, 단목장룡은 마치 십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치졸한 수를 썼군.”
서안의 중심부에서 맞붙게 된다면 분명히 교주가 나타날 것이다.
교주와 만나지 않도록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고, 도주했다. 당연히 혈우검마는 그를 뒤쫓았고 결과적으로 서안의 중심부에서 꽤 멀어지게 되었다.
천마의 경지가 아무리 하늘에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의 싸움을 알아챌 순 없었다.
하지만 혈우검마는 당황하지 않았다. 무림맹주가 된 단목장룡이 강한 것은 안다. 그 공공 대사를 이겼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혈우검마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수라장에서 살아왔다.
위기를 극복했으며, 피를 튀기는 전장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비무 따위에 집착하는 정파의 조무래기 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비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실전을 매일 겪어 왔다.
“치졸한 수에 당한 네 잘못이 아닌가?”
그렇지만 단목장룡의 말에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천마신교를 잘 아는 듯한 말이었다. 그가 아는 정파인이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치졸한 수를 썼다고 하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소리치는 것이 중원의 정파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치졸한 수에 당한 혈우검마를 탓한다.
맞다.
천마신교에서는 당한 놈이 잘못이었다. 그 어떤 변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알려진 것과 정반대의 성격이로군.”
단목장룡은 사실 정파 무림의 선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태상노군의 환생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가?”
단목장룡은 몹시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몹시 기분이 나빠진다. 불쾌감이 엄습해 왔다. 그는 단숨에 검을 뽑았다. 그리고 한심하게 말싸움을 하려 하진 않았다. 천마신교에선 행동으로 증명해야 했다.
혈영신법을 펼친다.
본래 마교에서도 최상위급 무공이었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더욱 완벽해진 신법. 몸을 움직일 때마다 퍼져 나오는 혈기(血氣)는 상대를 혼란에 빠트린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검마(劍魔)의 검에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목장룡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 대비하기 전에 제대로 한 방 먹인다.
혈우검마는 상대의 힘을 천천히 알아보며 견제를 하기보단, 단번에 승부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파밧!
혈우검마라는 별호처럼, 붉은 검강이 빛을 내뿜는다.
‘정확하게 닿았다.’
고도의 집중력.
욕정을 풀어 냈기에 현재 혈우검마의 상태는 최상이었다.
이제 핏빛 검강이 거미줄처럼 퍼져 단목장룡의 몸에…….
“……?”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단목장룡이 이것으로 쓰러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또한 수준에 이른 무인이니 기습했더라도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문제는 그가 막아 냈다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그의 검법은 닿는 순간, 거미줄처럼 넓게 퍼진다.
상대를 옭아매고, 피에 절어지게 만든다.
“어떻게 네놈이 그것을……?”
혈우검마가 펼친 혈살지망(血殺蜘網)과 똑같은 검법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 낸 단목장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