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정상회담
사마련주와 무림맹주의 두 번째 회담. 올해 무림맹주는 몇 번이나 바뀌었다. 혼란스러운 정파 무림이었지만 단목장룡의 평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파훼식이 배포된 이후로 마교의 도발 또한 뚝 끊겼다. 당연히 정파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섬서성 서안의 분위기는 활기찼다.
새로운 무림맹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고 있었다.
“너무 많군.”
붉은색의 피풍의를 두른 사내. 눈가엔 기다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사방으로 생기가 뻗어 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사내의 주변으로는 삭막하고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맹주님의 외모가 정말 대단하다고 하던데? 눈이라도 한번 마주치면 좋겠다…….”
“얘는? 무림맹의 맹주님이 우리 같은 애들을 거들떠나 본대?”
“어머? 그렇게 말해 놓고 아침부터 분칠을 한 시진이나 한 건 누군데?”
“흥, 너처럼 그런 허무맹랑한 기대를 한 건 아니거든?”
잔뜩 멋을 낸 여인 두 명이 아옹다옹하며 길을 걸어간다. 인파가 워낙 많았기에 몇몇 사람들과 부딪혔지만, 부딪히는 이들도 여인들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의 서안은 그것이 당연했다.
툭!
“꺄앗!”
“뭐야?”
하지만 두 여인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과 스치듯 몸을, 어깨를 부딪쳤지만, 이처럼 볼썽사납게 쓰러진 경우는 없었다. 마치 일부러 힘을 주어 밀어 버린 듯한 감각. 친우가 넘어지자 길게 머리를 땋은 여인이 쌍심지를 켠다. 말로 다투긴 했지만, 두 여인은 둘도 없는 친우였다.
“저기요! 사과하셔야죠!”
붉은 피풍의를 입은 사내가 멈춰 선다.
여인은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몸이 굳고 말았다. 대체 사람 눈이 어찌 저토록 차갑단 말인가? 거기다가 허리춤에는 기다란 검이 매달려 있었다.
“사과?”
사내가 천천히 다가온다.
여인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고 있는데, 그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난다. 깔끔하게 머리를 묶고, 잘 다려진 백의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감히! 여인을 희롱하려 드는 것이냐!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 북검문의 삼대제자 이벽진이 용서치 않겠다!”
구세주의 등장에 공포로 물들었던 여인의 표정이 밝아진다.
늠름한 사내의 체격으로 볼 때, 당연히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다.
청년이 호기롭게 검을 뽑는다.
관리가 잘된 검날이 예리하게 빛난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 여인들을 살핀다. 이런 곳에서 인연이 되어 연인이 된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부릅떠진 두 눈동자. 왜 자신을 보고 저런 눈빛을 하는 거지? 너무 놀라서 그런가?
순간 후끈한 감각이 검을 든 팔을 덮친다. 뭐지? 왜 어깨가 타오를 듯이…….
“……?”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청년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히 붙어 있던 자신의 팔과 애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으,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청년.
“마음 같아선 목을 자르고 싶었지만, 오늘만은… 봐주도록 하마.”
서늘한 감각이 심장을 파고든다.
청년은 감히 사내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함부로 검을 뽑으면 이렇게 되는 거다. 알아 둬라.”
좌중은 싸움이 났다고 생각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청년의 팔이 잘려 있었다. 다행이라면 나머지 팔은 자르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피풍의를 걸친 사내가 떠나가는데도 누구도 그의 앞을 막지 못했다.
“붉은 피풍의… 설마!”
그리고 강호에 꽤 지식이 있던 한 인물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외친다.
“천무광인(千武狂人)!”
광인곡(狂人谷)의 주인 천무광인 시운량.
이제는 네 명이 되어 버린 사파의 절대 고수 오성(五星). 혈세귀막이나 암천회처럼 대규모의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 혼자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고수였다. 자신에게 검을 뽑은 이들을 용서하는 법이 없으며, 주화입마를 극복하여 극마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었다.
“…….”
지금 서안은 새로운 맹주의 탄생에 잔치 분위기였다.
하지만 팔이 잘리는 광경을 본 좌중은 이번 회담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 * *
단목장룡은 서안 중심부의 객잔에 도착했다.
금일 오후가 첫 회담의 시작이었지만, 그가 서안에 도착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마교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중원 이곳저곳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었기에 전투단을 파견하여 조기에 진압하도록 했다.
또, 혹시 모를 일이기에 육왕들에게도 상황이 위급해지면 바로 움직여 달라는 서신까지 작성했다.
회담까지는 두 시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오랜만에 휴식을 취해 보려던 단목장룡.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서안 지부장 서문일도라고 합니다.”
서안 지부의 대처는 서신으로 모두 전달해 놓은 상태. 굳이 지부원들을 배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 놓았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은 거추장스러울 테니까. 무언가 일이 생긴 걸까? 서안 지부장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서안 지부장이 방에 들어와 포권지례로 예를 표한다.
단목장룡도 포권지례로 그의 인사에 화답한다. 맹주라고 하여 권위적인 모습만을 보여 줄 순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여러 사건.
인파가 몰리는 만큼 싸움이 벌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건 정파인들끼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무광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군요.”
“예……?”
지부장이 예상한 반응은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사마련주와의 회담 날에 천무광인이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피가 난자해 왔었다. 물론, 지부장은 그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긴 했었지만… 지부장 정도의 연륜이라면 천무광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단목장룡이 말을 덧붙인다.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요.”
“마, 만약 사마련주와 천무광인이 합공이라도 한다면…….”
“괜찮습니다.”
그는 왜인지 모르게 여유로웠다.
“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여, 역시 그렇군요!”
단목장룡 혼자 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무림맹주였다. 홀로 회담장에 나타날 일은 없었다. 지부장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무림맹의 정예 무사들이나 어쩌면 화산과 무당의 장문인이 은신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맹주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시구나.’
공공 대사를 물리치고 맹주의 좌에 오른 사내다.
나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숱한 경험을 쌓고 무림맹의 지부장이 된 서문일도는 감탄하며 단목장룡을 우러러보았다.
* * *
구천루.
서안의 자랑이라 불리는 명루. 오늘 이곳에서 무림맹주와 사마련주의 회담이 있었다. 구천루의 주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백도천하!”
“단목천하!”
그 인파 중에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신흥 세력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낯간지러운 구호를 외치며 단목장룡의 등장을 촉구했다. 단목장룡은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인지 이제까지의 맹주들보다 훨씬 추종자가 많았다.
알게 모르게 그가 태상노군의 환생이라는 괴상한 소문까지 돌고 있을 정도였다. 집단의 이름은 백단부흥회. 태상노군의 환생인 단목장룡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분출된 세력인 만큼 딱히 세속적인 이득을 위해 결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단목장룡 또한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뭐, 존재 의의가 변질된다면 단목장룡은 언제든 그들을 해산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백단부흥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을 때쯤.
사마련주와 피풍의를 입은 중년 사내가 등장한다.
한눈에 보아도 잘생긴 얼굴.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마주한 이는 중원 최고 미남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특히 외관의 나이가 이십 대로 느껴지는데 백발이 조화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연출하고 있다.
사마련주 사마백혼.
사파의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 선 중년인은 광인곡의 주인인 천무광인이었다.
순간 단목장룡을 기다리던 이들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새로운 맹주를 보기 위하여 이곳에 모인 것인데, 사마백혼의 외모와 천무광인의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특히 여인들은 사마련주의 외모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어머… 저분이 맹주님?”
“아니야, 이년아! 정신 차려!”
심지어는 사마백혼을 무림맹주 단목장룡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개중에 천무광인에게 분노와 공포의 감정을 보내는 자들이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있었던 천무광인의 범죄를 직접 목격한 이들이었다.
조용한 웅성거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 은근히 신경을 건드리는 소음에 천무광인이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는다.
“아가리 닥쳐라.”
“…….”
다시금 침묵이 감돈다.
살짝 앞에서 걸어가던 사마백혼이 천무광인과 눈을 마주친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는데, 그러자 천무광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아갔다.
“백도천하!”
“단목천하!”
그에 맞서 백단부흥회의 목소리가 커진다.
사마백혼의 제지 덕분일까? 천무광인은 그들을 무시하고 구천루로 입장했다.
그들이 입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드디어 무림맹의 주인공 단목장룡이 등장했다. 그는 수행원 한 명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당당해 보였다.
“맹주니이임!”
“백도천하-!”
“단목천하-!”
지축을 울리는 듯한 외침. 단목장룡은 그 환호와 열기를 마주했다. 그는 권위 의식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렇듯 많은 인파가 몰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으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아가던 중.
단목장룡은 가장 앞에 선 두 여인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슬픔과 분노가 공존하는 눈빛. 여기에 모인 시선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단목장룡이 무신경하게 두 여인을 지나쳤을 때.
“맹주님……!”
머리를 길게 땋은 여인이 절박한 목소리로 단목장룡을 부른다.
당연히 들리지 않았다. 워낙 많은 인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단목장룡을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도 많았다.
“천무광인은… 백도 후기지수의 팔을 잘랐어요……. 그런데 아무런… 아무런…….”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실 사건의 발단은 그녀가 천무광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과를 요구한 탓이다.
분명히 자신들을 도와주려 했던 백도의 젊은 무인에게도 검을 뽑은 것이 문제의 소지가 된다. 무림에서 검을 뽑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강호의 그러한 규칙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유명한 무림맹주가 서안에 있었기에…….
무언가 보여 주지 않을까?
제멋대로인 천무광인이라도 단목장룡의 앞에서… 달라지지는 않을까? 그런 기대가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정파는 마교와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파와도 사이가 틀어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
구천루에 들어가기 전 왜인지 한차례 단목장룡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대를 품진 않았다.
‘백단부흥회를 본 것이겠지.’
그녀의 뒤에는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단목장룡을 외치는 이들이 있었다. 무림인도 있었지만,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백성들도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을 바라본 것은 아니리라.
‘모두 다 내 잘못인데… 누굴 탓하겠어.’
그녀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아 버렸다.
원래 세상은 냉정한 법이었으니까.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자네, 인기가 상당하군?”
층을 통째로 회담실로 꾸며 놓았다. 커다란 탁자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고 먼저 들어온 사마백혼은 의자에 앉아 음식을 맛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천무광인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단목장룡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은은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단목장룡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옆에 있는 사내는 누굽니까?”
“천무광인이다.”
“광인곡의 주인이지. 자네를 보고 싶어 하기에 데려왔다네. 아, 그렇다고 오해하진 말게나. 합공 따위를 하려고 데려온 것은 아니라네. 단지…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더군. 내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돌발 행동을 했을 수도 있어서 말이야. 이해를 부탁하네.”
단목장룡이 자리에 앉자 천무광인이 대뜸 묻는다.
“공공 대사가 남긴 것은 없나?”
“공공 대사랑 어떤 사이지?”
그러자 천무광인이 코웃음을 친다.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다.”
“운량, 진정하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면 누가 자네에게 대답을 해 주겠는가?”
사마백혼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목장룡이 미소를 짓는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천무광인을 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대충 예상이 가긴 했다.
“사마련주님의 말씀이 맞다. 부탁할 때는 예를 차려야 하지 않겠어?”
“이 어린 새끼가…….”
타고난 성정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한번 미쳤다가 다시 되돌아왔길래 그러는 것일까? 그는 단목장룡의 실력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있었다.
스윽.
어느샌가 단목장룡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손엔 뇌왕검이 들려 있었다.
“검을 뽑았다고 팔을 베었다던가?”
“…….”
“그래, 이제 어쩔 건가?”
사마백혼과 천무광인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몹시 여유로웠다.
천무광인의 얼굴이 괴팍하게 일그러졌으며.
사마련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단목장룡을 응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