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파훼식
육왕 중 하나 남궁세가주와의 싸움은 단목장룡에게 또 다른 배움이 되었다. 그것은 남궁세가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건만, 두 사람은 유대감을 나누게 되었다. 고수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고나 할까?
남궁세가주와 단목장룡은 비무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대화했다.
비단 무공에 대한 것만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다. 무림의 정세와 마교나 사마련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단목장룡은 화산과 무당의 장문인뿐 아니라 남궁세가주의 지지도 받게 된 것이다.
단목장룡의 다음 횡보는 당연하게도 다른 육왕이었다.
잠깐 무림맹에 들러 다른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 바로 아미산으로 향했다.
아미파는 불가의 문파로 사천성에 있었다. 사실 아미파는 소림처럼 무림의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게 특징이지만, 그들 또한 마교에 당한 역사가 많았다. 청해성과 감숙성 다음은 바로 사천성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미파 장문인 여여 신니(如如神尼)와는 남궁세가주와 다르게 몸으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단목장룡이 올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 앉아 대화하고 있다 보면 마치 신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신녀란 존재는 지금의 단목장룡도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결이 다른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다. 역대급 천재라 불렸던 사공천의 재능. 그 재능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해하려면 일단 배우려는 노력은 해야 했다. 하지만 신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느낀다.
어쩌면 여여 신니 또한 신녀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것을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여여 신니는 새로운 맹주 단목장룡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장문인 또한 직접 나서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마교에 받을 빚이 있었다. 또한, 왠지 모르게 단목장룡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렇게 아미파에 들른 단목장룡은 의외의 여인도 만났는데, 사실 처음엔 머리를 빡빡 밀어 알아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저 그녀가 인사하고 나서야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애초에 이 여인에게 관심을 두고 바라보지도 않았었다.
“하후 소저?”
하후예민이 아미파로 떠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태상가주에게 들었던 내용이니까. 미안한 말일지도 몰랐지만, 단목장룡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장문인의 수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 부분에선 조금 놀랐다. 늦은 나이에 불가에 귀의했다고 들었는데, 어찌 그게 가능할까? 소림에 버금가는 불가인 아미파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는 속세의 개념과는 확실히 다르다.
무공을 보면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은 많이 나아져 있었다. 하후세가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곧 자결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들렸다고 했다. 그로 인해 태상가주도 걱정이 많았다고 했지만, 아미파에선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예, 하후예민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단목 공자께선 역시나 무림의 대영웅이 되셨군요.”
비꼼의 느낌은 일절 없었다.
마치 아미파에서 만난 여여 신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후 소저께서도 잘 지내고 계신 모양이군요.”
“예, 사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괜히 온 것이 아닌가… 차라리 중원을 등지고 멀리 떠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배로 향한다.
분명히 나찰마궁 소궁주의 아이를 가졌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듣고 단목장룡도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와 동시에 아미파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목장룡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아랫배로 향한다.
그러자 하후예민이 웃으며 단목장룡에게 답한다.
“소룡이는 지금 방에서 자고 있답니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한 모양이었다.
“다행이군요.”
“예, 정말 다행이지요.”
그녀의 따스한 눈빛. 당연히 단목장룡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그런 하후예민을 보며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사실 최근에 소림의 대허 선사나 공공 대사를 보며 불가에 대한 회의를 품었었다.
하지만 하후예민은 불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깨달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다.
“전 그 아이와 평생을 하고 싶지만, 사내아이라 언젠간 아미를 떠나야 하겠지요.”
아미파는 여인들의 문파긴 했다.
하지만 사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미산의 최정상엔 오르지 못하지만, 아미산 아래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선 사내나 여인이나 상관없이 모여서 살고 있었다.
“꼭 떠나보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단목장룡의 말에 하후예민이 미소 짓는다.
“저 또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답니다. 하지만 어미의 마음처럼 행동하는 자식은 없겠지요. 그리고 저 또한 제 바람을 아이에게 심어 줄 생각은 없고요. 그 아이가 뜻하는 대로 살게 두고 싶답니다. 제가 죄를 지은 것이지…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하후예민이 저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많이 달라지셨군요.”
“아직 한참 모자라지요. 그나마 장문인께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에 다행이랍니다.”
불가에서의 삶. 당연히 단목장룡에겐 맞지 않는다.
그녀 나름대로 삶의 길을 찾은 것 같았다.
땡… 땡…….
아미의 산문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퍼져 나간다. 여승들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아미타불, 이제 가 봐야겠군요. 과거의 일은 다시 사과드립니다. 단순히 사과로는 갚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잘 압니다만… 그래도 정말…….”
그녀는 단목장룡에게 사과하려 했다.
사실 하후세가와의 싸움에서 그가 잃은 것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결과적으론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단목장룡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다만, 태상가주껜… 잘 있다고 서신이라도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하후예민이 미미한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빛이 더욱 맑아진 듯하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언젠간 기회가 된다면 직접 태상가주께 인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가 봐야겠군요.”
하후예민은 단목장룡에게 합장한 후 떠나갔다.
왠지 모르게 여여 신니가 단목장룡에게 호감을 표한 것이 그녀의 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당연히 하후예민은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인연이라……. 소룡이라고 했던가.’
그 아이는 언젠가 무림에 나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목장룡 자신도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언젠간 두 사람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과거의 사건을 언급하여 사이를 가로막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될 뿐이다.
‘정말… 오래 살고 싶군.’
피식.
그런 것을 하나하나 기다리는 것도 삶의 즐거움이 되리라.
그러기 위해선…….
‘이제 육왕은 모두 포섭했다.’
마교를 완전히 끝장내야 했다.
* * *
당연히 마교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새로운 맹주의 탄생에 맞춰 중원 각지에 펼쳐져 있던 세작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무림맹에서도 그 움직임을 간파하고 각 무림맹의 지부에 서신을 보내 그들을 확실하게 막을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맹의 주력 부대는 그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각 문파의 장문인들께서 나서 주시기로 했습니다. 의외군요. 이렇게 빨리 답신을 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은영전주의 말에 단목장룡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는 당용아와 당옥정이 검토를 거쳤음에도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살펴보고 있을 뿐이다. 무림맹주는 최종 결정권자였다.
‘이거 맹주도 못 할 일이긴 하군.’
물론, 맹주라서 단목장룡의 입맛대로 정파 무림을 움직이고 있었다. 과거엔 직접 몸을 움직여 개고생을 해야 했다면, 지금은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적절한 지시만 내려 주면 된다. 당연히 단목장룡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좋은 결과를 낳진 못했지만, 워낙 광범위한 규모다 보니 효율 측면에서는 압도적이다.
“독문과 약문에선 인간의 몸으로 장난질을 할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 확실히 주의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걸 복제하여 정파 무림 전체에 전해 주십시오.”
단목장룡은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빈 서책에 무언가를 써 내려왔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던 마교의 지식이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었다. 단목장룡은 마교를 부수고, 최대한 정파에 피해가 가지 않을 방법을 고안했다.
“이건…….”
“난주에서 마교도들과 마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놈의 비급서를 탈취할 수 있었지요.”
거기까지만 말해도 은영전주는 이해했다.
사실 단목장룡의 재능에 대해서는 이미 무림맹에 소문이 파다했다. 처음 보는 무공서를 읽자마자 이해하고, 일각 만에 더 높은 수준의 무공으로 탈바꿈시킨다.
당연히 단목장룡을 시샘하던 무리가 있었지만, 그러한 압도적인 재능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감탄하게 될 뿐이다. 적당한 재능의 차이라면 질투하거나 미워할 수 있지만… 너무도 압도적인 재능에는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정파 무림 내에선 단목장룡을 추앙하는 세력까지 등장했다. 지금은 그 힘이 그리 대단치 못하지만, 그 수가 몹시 빨리 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마교도들이 흔히 익히는 무공의 파훼법입니다. 마교에서 말하는 중급들이 이러한 무공을 익히고 있을 겁니다.”
“……?”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은영전주.
그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더는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이다.
“예, 은영전의 가용 인원을 총동원하여 서책을 복제 후 배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엔 두 권 더 나갈 것이니 비선당의 인원들도 활용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 바로 업무를 수행하러 가 보겠습니다.”
후다닥 도망가듯 떠나가는 은영전주.
그것을 지켜보던 단목장룡의 팔이 물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인다. 동시에 또한 주인이 없는 붓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글을 적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안 되겠군. 하나 더 사용해야겠어.’
단목장룡의 의지로 또 다른 붓이 공중에 뜬다. 그것은 스스로 서책을 펼치더니 마교의 하급 교도들이 익히는 무공의 파훼법을 핵심만 딱딱 짚어 작성하기 시작했다.
“…….”
잠시 휴식차 바람을 쐬러 나갔던 당용아와 당옥정.
그녀들은 맹주전에 도착하자마자 두 눈을 끔뻑끔뻑 떴다.
“내 자리가…….”
“괴물…….”
맹주전에는 여인들의 자리가 없어져 있었다.
누군가 두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다. 주인도 없는 곳에서 붓들이 혼자 움직여 먹을 갈고, 그곳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더 웃긴 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듯한 붓들이 쓰는 글씨가 기가 막히게도 깔끔하단 것이다.
* * *
“이걸 입수했습니다.”
“뭐야?”
서책을 읽어 보던 소교주.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는다. 이게 말이 되는가? 대체 어떻게?
쾅!
“이게 뭐지?”
소교주의 분노에 수하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극마에 이른 고수가 분노하면 살기만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수하 또한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소교주의 분노는 감당하기 힘들다. 천마신교의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천마신공의 기세에는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소교주가 기세를 낮춘다.
화를 내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중원에 이런 서적들이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한 군데도 아니다. 심지어는 사파의 권역에서도 이런 서적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누구지?”
“무림맹에서 새로이 맹주가 된 단목장룡이 서책을 만들어 중원 전역에 뿌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본교의 무공을 파훼하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파훼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력의 차이가 있다면 활용하기 힘들다. 하지만 실력이 대등한 자라면 파훼법이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다. 무공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으니 상대의 공격을 방비할 수 있고, 빈틈을 찌를 수 있게 된다.
“아니, 이놈은 대체 어떻게 이걸 알게 된 거지? 그리고 본교의 무공을 알고 있다고 해도… 대체?”
너무도 깔끔한 파훼식.
마치 천마신교의 무공을 모조리 꿰고 있는 듯한 구성이었다. 누가 소교주보고 마교 무공의 파훼식을 만들라고 할지라도 이처럼 정교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 딱 핵심적인 부분만 작성해 놓은 상태.
‘제기랄…….’
소교주가 단목장룡이 제작했다는 파훼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건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가 교주에게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소교주님… 이걸…….”
한 무인이 다가와 서책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도 마교 무공의 파훼식이었다. 거기다 한 권도 아니고 두 권씩이나.
“…….”
소교주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