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새로운 국면
신녀가 영혼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상대의 근본을 파악한다. 과거 마교의 교주는 단목장룡에게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이라 칭한 적이 있었다. 천혜성이라는 것은 사공천이 지녔던 재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사공천은 그것을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선택으로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이했었다.
그가 재능을 살려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면, 당시의 사공천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운명(運命)이니 숙명(宿命)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
순간의 선택으로 미래는 달라지는 것이기에. 물론, 그것까지 운명으로 치부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제갈교아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넌 다른 이들의 영혼을 건드려 현혹했다고 했었지. 나한텐 그게 불가능하다고도 했었고.”
“워낙 거대한 혼이니까요.”
“그것은 내가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인가?”
“그런 이유도 있지만, 만약 단목 공자께서 무공을 전혀 수련하지 않았던 때…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라면 현혹하는 것이 가능했을 거예요. 영혼은 삶이 지날수록 성장하니까요.”
“그렇군.”
단목장룡의 대답에.
제갈교아가 꽁꽁 감춰 왔던 말을 내뱉는다.
“이제 냄새를 맡아도 되나요?”
반짝이며 묻는 제갈교아.
“아직.”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아직 질문할 것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었다.
“이제 넌 신녀문의 소속이 아닌 건가?”
그녀는 인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강시, 아니 강림체가 된다는 선택은 평범한 인간이 할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녀문 계승자라는 직위를 내려놓았다는 뜻이 된다.
“네, 지금 무림맹에 몰래 들어온 거예요. 사실 단목 공자님을 찾아서 이동할까도 생각했지만… 천응이가 있으니까 제가 쫓는다 한들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거든요.”
천응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소영이라 불렸을 때의 기억이 온전한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사천자 모두가 널 쫓는 건가?”
그 말에 제갈교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천자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같은 문파에 소속된 문도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사천자는 천도신녀를 중심으로 하여 궁극적인 뜻을 같이할 뿐이에요. 그렇기에 사천자 모두가 절 쫓는 건 아닐 거예요.”
“그들의 궁극적인 뜻이라는 건, 화경에 이른 고수의 숫자를 조절하는 일인가?”
제갈교아의 표정이 약간 불안함을 더했다.
“그것도 알고 계시는군요.”
“천도신녀는 무림인에게 무력을 줄 수 있는 건가?”
“어찌 그것까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그건 지금 말해 줄 수 없겠군.”
그녀가 냄새를 맡으며 대답한다.
“킁킁… 굳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천도신녀는 중원… 아니, 대지 위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보다 영혼을 잘 다루는 분이세요. 저처럼 영혼을 툭툭 건드려 현혹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상단전(上丹田)을 개방할 수 있으시죠.”
무림에서 말하는 상단전이란 머리를 뜻한다.
보통 무인들은 하복부에 내공을 쌓는다. 그것을 하단전이라 한다. 그리고 심장을 중단전이라 부른다. 하지만 단목장룡이 알기로 심장과 머리에 내공을 쌓는 사람은 없었다. 왜? 그것이 불가능했으니까.
“상단전을 개방한다는 건 무슨 의미지?”
“한계를 뚫어 준달까요? 미약하지만 상단전을 개방한 이들은 우주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답니다. 신녀와 비슷한 감각을 가지게 된달까요? 그것으로 무인들은 경지의 향상을 꾀할 수 있죠. 하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천도신녀께서도 무한정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지금 그분께선…….”
“그분께선?”
“십 년 전부터 정상적으로 활동하실 수 없는 상태세요.”
그 말에 단목장룡이 무언가를 깨닫는다.
“설마 강림체라는 것은…….”
“맞아요. 천도신녀 님의 혼을 담아둘 그릇이죠. 그분의 혼은 거대하고 또 거대하기에 평범한 육신에 담기게 된다면 금방 터져 버리고 말아요. 저같이 신녀의 재능을 타고난 이들의 육신을 이용해야 하죠. 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지막엔 후회하긴 했지만요. 킁킁.”
제갈교아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단목장룡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천자산에서 보았던 날 공격했던 강시는…….”
“네, 보통 실패작이라 칭해요. 혼이 빠져나가긴커녕 오히려 육신과 동화되어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그녀들도 신녀였나?”
“네, 오래전 신녀였어요. 천마신교에 머물던 여인이었…….”
“…….”
단목장룡의 변화한 분위기에 제갈교아가 입을 다문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덜컥 걱정이 앞선다. 그에게 미움을 받는 건 죽어도 싫었다.
“신녀라는 존재는 모두 그렇게 이용되는 건가?”
“모두… 는 아니에요. 사실 천도신녀께서 멀쩡하실 때만 해도 강림체는 대비책에 불과했으니까요. 또한, 별을 보는 것은 막대한 정신력을 소모하기에 천도신녀 님의 업무를 분산하는 역할 수준이었죠. 이제껏 천도신녀 님을 넘는 재능을 지닌 신녀는 없었으니까요.”
“현 마교의 신녀를 알고 있나?”
“아뇨. 신녀의 수는 극히 적지만 신녀들끼리의 만남은 절대 금지라서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답니다.”
단목장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천도신녀는 지금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했던가?”
“네.”
“장담할 수 있나?”
“그건…….”
이 부분에서 제갈교아는 확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천도신녀는 무서운 힘을 지닌 것이다. 제갈교아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천도신녀가 과거의 힘을 이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상단전을 개방할 수도 있으면 닫을 수도 있겠군.”
“그게 가능한진 잘 모르겠어요. 절대자의 수준에 오른 고수들이 천도신녀 님의 말을 따른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단목장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천자들끼리 싸울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겠군? 그들을 묶어 뒀던 족쇄가 사라졌으니까.”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어요.”
“알겠다. 네 말을 모두 믿겠다.”
믿겠다.
그 말에 제갈교아의 두근대던 가슴이 가라앉는다.
단목장룡에게 미움을 받으면 어쩌나… 혹시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 그래도 과거처럼 백회혈은 내줄 수 없어.”
단목장룡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그것에 이끌려 손끝에 코를 가져다 댄다.
“흐읍…….”
단목장룡의 육신에 담긴 거대한 혼.
황홀한 냄새가 제갈교아의 코를 통해 들어온다. 그의 냄새를 맡는 동안엔 다른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신녀의 감각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 그 재능을 축복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겠지만, 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상에는 깨끗한 것도 있겠지만, 바라보는 것조차 역겨운 추악한 것도 있기 마련이다.
신녀들은 그런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단목장룡의 거대한 혼은.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그 압도적으로 짙은 존재감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것 또한 신녀가 타고나는 것처럼 저주가 될 수 있었다.
단목장룡은 사공천으로 살아갈 당시 그러한 저주에 당해 원하지도 않은 삶을 강요받았으며,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물론, 그가 미련한 탓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공천과 단목장룡은 다르다.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본질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영령은 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
신녀로서의 삶을 버리고, 인간의 삶을 선택한 제갈교아.
그녀를 보고 있으니 얼핏 알 것 같기도 했다.
* * *
단목장룡은 당옥정의 전각에 숨어 있기로 했다. 대외적으로는 무림맹을 떠난 것으로 하고 말이다. 흑룡단의 동료들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신녀문이나 사천자에 대해 털어놓으면 그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또한, 단목장룡이 세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단목장룡의 계획이 무엇이냐?
사실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지켜본다.’
마교주나 사마련주 그리고 공공 대사가 무림의 어둠에서 평화를 만들어 왔다. 물론 그것이 정말 평화인지는 차치하고, 그들의 입장을 고려해 보았다. 과연 그들의 구심점인 천도신녀가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할 때, 그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단목장룡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서로 부딪치게 될 것이다.’
마교주, 사마련주 그리고 공공 대사.
그들은 상단전을 개방하여 화경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 어쩌면 현경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영령은 단목장룡에게 무림의 일은 관심을 가지지 말고 떠나라고 했다. 당시엔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제갈교아에게 모든 것을 듣고 난 뒤에는 다른 생각을 했다.
절대 고수들의 싸움에 괜히 휘말리지 말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이 단목장룡의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용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분명히 무림은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마교는 다짜고짜 중원의 문파를 급습하여 정파인들이 한데 뭉치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며, 사마련은 은근히 마교의 진출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정파에선…….
‘맹주님이 갑자기 쓰러지고, 대허 선사가 임시 맹주직을 맡기로 했지.’
대체 공공 대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제갈교아에게 물었지만,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있지만 위치 따위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공공 대사는 분명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말이지.’
그렇게 단목장룡이 청룡단의 전각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장룡……!”
당옥정이 은밀한 발걸음으로 단목장룡이 숨어 있는 방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왔어.”
“설마?”
“응, 맞아……! 네 말대로 공공 대사가 모습을 드러냈어, 무림맹에!”
스으윽.
옆방에서 휴식하고 있던 제갈교아가 유령처럼 다가온다.
“공공 대사가요?”
그녀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하기야 그녀는 공공 대사에게 당해 강시가 될 뻔했었다.
“네, 지금… 맹주전으로 향했다고 들었어요. 지금 무림맹에 난리가 났어요.”
현 무림맹은 대허 선사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단목장룡이 전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파 무림이 움직이고 있다. 무림맹은 과거의 악연을 모두 해소하고 진정한 평화의 길로 나아간다고 선언했으며, 겉으로는 그 평화가 유지되는 듯했다.
그것이 거짓된 평화라는 걸 알기에 답답했지만 참고 기다렸다.
‘공공 대사가 등장함으로 많은 것이 바뀔 거야.’
어쩌면 단목장룡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공공 대사 또한 대허 선사와 뜻을 같이한다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된다. 만약 그렇다면 단목장룡은 무림맹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어찌 되든 상황에 맞춰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 * *
감숙성 난주.
그곳의 한 장원엔 ‘천마신교’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임시 맹주인 대허 선사가 마교의 평화협정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정식으로 중원에 진출했다. 당연히 공동파에선 크게 반발했지만, 대허 선사의 영향력 아래 무림맹은 평화의 길로 나아갔다.
거기다 마교는 난주에 와서도 어떤 사건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기에, 오히려 몇몇 문파는 마교에 접근하여 연을 맺으려는 자들도 있었다. 만약 그들이 중원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단일 세력으로 무림맹이나 사마련과 맞먹는 거대 집단이었다.
그들에게 줄을 선다면, 아무리 얻는 게 떡고물이라도 그 가치는 대단하리라.
지금도 천마신교의 난주 지부엔 수많은 무인이 방문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본산에서 내려온 장로들이었다. 소교주는 중앙 전각에 앉아 모두를 지휘하고 있었다.
‘슬슬 사천과 섬서에도 지부를 세워야겠군.’
과거와는 다르다.
마교는 소교주의 계획 아래 무림을 완전히 지배할 것이다. 전대의 교주들은 이루지 못했던 그 꿈을 확실하게 이루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했던, 그 거룩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아랫도리가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조금씩 완성되는 소교주의 완벽한 그림.
하지만 세상일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오늘 도착한 서신을 읽던 소교주가 얼굴이 일그러진다.
“공공 대사? 초대 무림맹주? 그런 노괴가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기껏 무림맹에 멍청한 이상론자를 앉혀 놓았는데, 노괴가 나타나서 다 뒤집어엎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마교타도를 외치고 있다고? 소림사의 땡중인데… 전혀 땡중 같지 않은 행동을 일삼는다고 했다.
‘단목장룡이 사라지고 나니 웬 병신 같은 땡중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할 무렵.
“만마앙복(萬魔仰伏)! 군마영세(群魔永世)!”
장원 전체가 울리는 목소리. 장원의 모두가 동시에 소리친 것이 분명했다.
소교주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팔뚝을 내려다보니 닭살이 돋아 있었다.
“설마!”
소교주가 황급히 방을 나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의를 입은, 짙은 눈썹의 사내가 무표정하게 소교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천마신교의 부교주 혈우검마(血雨劍魔)와 독각수라(獨脚修羅)가 굳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소교주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쿵!
천하의 소교주가 무릎을 꿇을 상대는 오직 하나.
천마신교의 주인인 천마(天魔)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