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회심의 제안
공공 대사.
그는 무림맹의 초대 맹주로서 정파 무림의 통합을 이루어 낸 장본인이다. 근본적으로 정파 무림에 무림맹이라는 연합체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잘난 맛에 살아가던 명문 거파들이 마교에 위기를 느낀 것이 컸지만, 가장 처음 무림맹이라는 제도를 계획하고 만든 공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정파 무림의 심장이라 불리는 무림맹.
공공 대사는 첫 시발점에 선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공공 대사가 아직 살아 있습니까?”
공공 대사는 오백 년도 전에 죽은 인물이다. 배분으로 따진다면 단목장룡은 물론이거니와 현 무림맹주조차도 절을 올려야 정도로 큰 어른이었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가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믿기 힘든 말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네.”
“으음.”
단목장룡이 침음을 삼켰다.
사실 공공 대사라는 이름은 제갈강량에게 처음 들은 것이 아니다. 당용아가 조사했던 내용 중에서도 공공 대사의 이름은 있었다. 소림사의 출신 중 현 방장인 대허 선사보다 배분이 높았으며, 그가 죽어 흙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어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공공 대사는 오백 년 전 인물이니 그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당용아나 단목장룡이나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제갈강량의 입에서 공공 대사의 이름이 나오니 상황이 달라졌다.
‘화경의 고수가 환골탈태하여 젊음을 되찾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젊음이란 없었다.
만약 화경에 오른다고 하여 영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현재 정파 무림에선 육왕(六王)이 아니라 백왕(百王)이라 불렸어야 할 것이다. 오랜 중원의 역사로 볼 때,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환골탈태했더라도 인간은 늙는다.
그것은 수많은 서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화경이라 하여 대자연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완전히 어길 수는 없었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공공 대사는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알려지지 않은 경지.
사실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높이 떠 있는 무한히 많은 별. 실제로 만져 볼 순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저 드높은 창공에 존재하고 있었다.
“자네는 그리 놀라지 않는군?”
“당황스럽긴 합니다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역시 자제는 평범한 중원의 무인들과는 전혀 달라.”
칭찬인지 뭔지 아리송한 제갈강량의 말.
단목장룡은 딱히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공 대사가 제갈 소저를 납치했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네.”
단목장룡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천자산에서 만났던 까마귀 떼. 단목장룡을 놀라게 한 압도적인 진의 규모. 천목산에서 보았던 대야반야금강공. 그리고 나찰마궁주가 익혔던… 자미소의 연옥.
그 모든 것이 ‘공공 대사’라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공공 대사는 무림맹의 초대맹주이기도 했지만, 소림사의 전대 방장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대야반야금강공을 알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무공이 나찰마궁과 같은 정도를 벗어나는 문파에 들어가게 된 경위도 얼추 들어맞는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이 남아 있었다.
대체 왜?
‘왜 공공 대사가 그런 짓을 했지?’
단목장룡이 생각에 잠긴다.
무림인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자연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만약 오백 년을 살아온 인간이 있다면… 그 정신은 온전할 수 있을까? 중원인들은 평균 오십 년을 살아간다고 한다. 개중에 다른 이들보다 더 장수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속된 말로 노망이 났다고 한다. 벽에 자신의 똥을 칠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자기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실 중원인들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하니 그 나이까지 가는 경우는 잘 없긴 했지만, 분명히 인간은 나이가 들면 육체가 약해지고 그만큼 정신 또한 허물어진다.
뭐, 겉으론 노망이 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정파의 평화를 생각해 온 공공 대사가 강시를 만들고 나찰마궁에게 소림의 무공을 퍼트린 것을 보면 결코 공명정대했던 초대 무림맹주의 모습은 기대할 수 없으리라.
“자네는 벌써 그것을 받아들인 모양이로군…….”
“확신은 할 수 없겠지만, 대비는 해야 하니까요.”
“하하… 난 이것을 알게 되고 수년 동안 밤잠을 설쳤다네. 밤에 누우면 그 생각이 떠나지 않더군.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야. 솔직히 지금도 믿고 싶지 않다네.”
제갈강량과 단목장룡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단목장룡은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 어떤 중원인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겪었다. 그런 단목장룡이 초대 무림맹주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여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천자들 또한… 과거의 고수입니까?”
초대의 사마련주.
초대의 천마.
뭐 이런 이들이 사천자란 말인가? 초대의 천마라는 생각에 닿자 단목장룡의 얼굴이 구겨진다. 초대의 천마는 솔직히 단목장룡으로서 달갑지 않았다. 그의 무력에 대한 이야기는 천마신교의 교도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닐 것이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단목장룡의 칼 같은 질문에 제갈강량이 미안하다는 듯 손을 젓는다.
“사실… 자네에게 제시할 만한 증거는 없다네. 모두가 무림맹주로 있었던 경험에서 나온 추측이지. 그리고 내 곁에는 교아가 있었으니까 말일세.”
제갈교아.
그러니까 신녀문의 계승자라고 소개했던, 그녀.
“그럼 신녀문과 사천자라는 이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겁니까?”
단목장룡의 물음에 제갈강량의 표정이 굳는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듯이.
“자네는 어찌 육왕과 오성이라는 것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는가?”
“육왕과 오성 말입니까?”
“분명히 중원의 인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났다네. 특히 큼직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왜 정파 무림에서 화경의 고수는 여섯으로 고정되어 있는가? 분명히 무인의 수도 늘어났을 텐데 말일세.”
단목장룡의 눈빛이 깊어진다.
“초고수의 수를 조절했다는 말입니까?”
“자네는 이해가 빨라서 좋군.”
제갈강량이 만족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목장룡은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아듣는다.
“하지만 제가 있지 않습니까?”
맞다.
이제는 육왕이 아닌 칠왕으로 바꿔야 하지 않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뭐, 어떤 곳에선 단목장룡이 어떻게 화경의 경지에 올랐느냐며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의 실력을 본 이들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이 나 또한 의문일세. 화경의 고수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화경의 고수가 탄생했었지. 하지만 자네라는 존재가 나타났음에도 다른 화경의 고수는 전혀 문제가 없지. 뭐… 그것도 확신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긴 하네만.”
설마 이미 다른 곳에서 화경의 고수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일까?
초고수의 숫자를 조절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아니, 말이 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순간 단목장룡의 머릿속에 두 명의 죽음이 떠올랐다.
뇌왕과 무영신투.
‘그들의 죽음도 설마…….’
제갈강량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순 없었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할 것은 또 아니었다. 그는 전대 맹주로서 십오 년 동안 정파 무림을 이끌었었다.
‘신녀문…….’
제갈교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영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귀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 그녀가 초고수 숫자를 조절한다는 무림의 비사(祕事)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제갈교아가 처음 나와 만났을 때 그런 말을 했었지.’
- 무림의 안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미리 찾아내서 천지신명께 그것을 보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당시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천지신명? 단목장룡은 그러한 것을 믿지 않았다. 인간을 내려다보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천지신명이라는 것이 그러한 종류가 아니라면? 단순히 무력이 강한, 공공 대사와 같은 초고수의 반열에 든 무인이라면?
‘웃기는군.’
단목장룡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
그들에겐 그러한 권리가 없었다. 물론, 죽고 죽이는 것이 일상이 된 무림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탓하진 않는다. 하지만 중원 전체를 주무르고 통제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단목장룡이 복수를 위해 화경에 올랐는데, 마교에 복수하기 전 신녀문과 조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복수도 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할 것이다.
미래를 약조한 여인에게도 크나큰 아픔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녀를 생각하니 다른 인물도 떠오른다.
‘고모님.’
당용아의 얼굴. 뇌왕의 죽음 이후, 그녀는 사천당문의 내당주로서 착실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과 같이 평범한 행복을 느끼진 못했다. 그녀가 당옥정을 유독 예뻐하는 이유. 당용아는 당옥정을 딸로 생각한다고 했었다.
“자네의 고민이 깊은 듯하군.”
“예, 생각할 것이 많군요.”
그런 반응을 보며 제갈강량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단목장룡에게 하고 싶은 말.
“신녀문은 사천자를 이용하여 초고수의 숫자를 조절하고 있었다네. 이 부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가?”
“왜 그러한 고수들이 신녀문의 명을 따르는가.”
“역시 자네는 이해가 빠르군.”
제갈강량이 만족한 듯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을 이어 나간다.
“난 생각했다네. 만약 내가 그러한 절대 경지에 발을 디뎠다면… 사실 다른 이들의 지시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네. 생각해 보게. 자신보다 약한 이들의 명을 듣겠는가? 자존심 강한 무인이? 특히 공공 대사는 그 소림사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은 고수일세.”
“신녀문의 힘이 사천자의 힘을 압도할 수도 있겠군요.”
“그건 아니라고 보네. 공공 대사만 하더라도 마음만 먹었다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힘을 끌어올 수 있었다네.”
“그렇다면 제갈 가주께서 생각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난 신녀문만이 가진 힘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네.”
“신녀문만이 가진 힘이라면…….”
“어쩌면 그들은…….”
제갈강량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인위적으로 경지의 상승을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 같군.”
단목장룡 또한 진중한 얼굴로 제갈강량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말은 믿기 힘들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상당히 복잡하고 위험해진다. 무공의 경지를 상승하게 할 수 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몰라도, 가능하다면… ‘사천자’라는 존재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자네에게 내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네. 맹주로 있으면서 무림을 지켜본 결과, 그것이 아니라면 신녀문과 사천자의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네.”
“만약 그렇다면 그냥 넘길 이야기는 아닌 듯하군요.”
“그래서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예, 말씀하십시오.”
제갈강량은 이 말을 하기 위해 기다려 왔다.
신녀문과 사천자.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자네가 신녀문의 힘을 받아들이면 어떻겠나? 그들의 힘으로 강해진다면 자네는 공공 대사와 같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네.”
사실 제갈강량은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려 했었다.
만약 신녀문의 힘이 자신에게 들어온다면? 정치만 잘하는 머리 좋은 맹주가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정파의 지도자가 탄생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정파 무림을 만들 수 있었으리라.
두근거리는 심장.
제갈강량은 단목장룡을 통해 꿈을 펼치려 했다. 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처음 무림맹에서 장로 위지무외와 비무하는 모습을 볼 때부터 생각했다. 그에게 무영신투의 무영심결을 내준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 단목장룡은 화경의 고수가 되었다.
‘자네라면 내 말을 이해했겠지.’
공공 대사를 비롯한 다른 사천자의 존재.
단목장룡은 그 거대한 힘에 압도됐으리라. 언젠가 죽음의 사신이 되어 다가올 그들에게 공포를 느끼며 분노했으리라. 그러니까 분명히 단목장룡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아는 무인이었으니까.
“신녀문과 접촉할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네. 자네만 동의한다면 당장…….”
피식.
단목장룡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을 본 제갈강량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설마 자네는 내가 신녀문의 간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절대 아니라네. 이름과 가문을 걸어도…….”
“제갈 가주님, 설령 가주님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신녀문의 힘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자네, 공공 대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나? 그는 이미 금강불괴지신에 도달했을 수도 있어. 어떠한 도검도 침범하지 못하는 육신을 가진 괴물일세. 자네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네만 이 방법만이 사천자의 패악질을 막을 수 있는…….”
“그것은 제가 생각하는 무(武)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당연히 자신의 의견에 동감하고, 뜻을 같이하게 될 줄 알았단 단목장룡이다.
그라면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단목장룡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녀문의 힘이 어떤 원리인지 알 순 없지만… 그것으로 제가 추구하는 무에 다가갈 순 없을 것 같군요.”
만약 과거의 단목장룡이었다면.
그러니까 ‘사공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당시였다면, 제갈강량의 말에 혹했을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무공을 이론으로만 공부했으며, 실전엔 적용하지 않았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잘하는 것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두기 마련인데, 당시 사공천은 무공을 익히려는 욕심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다르다.
그는 상상으로만 펼치던 무공을, 실전에서 익혀 나가고 있었다. 제갈강량과 대화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그는 처음 단목장룡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해우심법을 만들고 유성환상검을 익혀 나간 순간부터 궁극적인 이상향을 향해 달려왔다. 그 와중에 깨달음을 얻으며 조금씩 방향을 수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목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화르륵!
순간적으로 그의 눈동자에 자줏빛의 귀기가 떠올랐다.
마교의 천마신공이 아니라.
단목장룡만의 천마신공(天魔神功)이 완성되려 한다.
과거 마교의 교주가 말했었다.
그는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현재 단목장룡은 과거와는 달리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