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기다림
“예……?”
단목장룡의 말에 왕립이 당황한다. 진가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수가 공격해 왔다는 걸 널리 알리라니?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진가장으로 벌어들인 돈만 얼마인가? 물론, 요즘은 그 돈벌이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최소한의 가능성마저 상정해야 하는 것이 거상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 상황을 널리 알린다면, 다신 진가장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진 못하리라.
“왕 상단주께선 공동파와도 연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왕립의 판단은 빨랐다.
여기서 이리 재고 저리 재 보았자 손해를 보는 것은 왕립이다. 진가장이 황금을 낳는 알이긴 했지만, 영원히 이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놓아줘야 한다.
‘이 알짜배기 땅을 고작 오십 냥에 넘긴 건… 피눈물이 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왕립은 두 손을 비비며 단목장룡에게 대답한다.
“예, 물론입죠. 이번 일은 제가 확실히 책임지고 널리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살수를 보내다니요!”
“왕 상단주께서 힘을 써 주신다니 감사하군요.”
“아닙니다. 헤헤…….”
처음 단목장룡을 만났을 때의 거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고로 상인이란 사람 보는 눈이 중요하다.
“그런데 장 공자님, 여쭤볼 것이 있는데…….”
“뭡니까?”
그가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한다.
“장 공자님은 이들이 누군지 알고 계시겠지요? 시체 중 하나에 고문의 흔적이 있던데…….”
“잘 알고 있지요. 하나… 들으셔도 괜찮겠습니까?”
꿀꺽.
단목장룡의 시선에 자연스레 침이 목구멍을 넘어간다.
정보는 돈이 된다. 하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정보는 독이 되기도 한다. 알면 위험해지는 정보. 장사를 하다 보면 그런 것들과 자주 접한다.
“아하하! 아닙니다. 굳이 제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겠지요. 알겠습니다. 맡기신 일은 저 왕립이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왕립과 그의 수행원들이 떠나가고.
깔끔해진 장원을 둘러보던 단목장룡이 오랜만에 장원을 나선다.
‘만약 또 습격이 있다면… 나야 좋지.’
칠살대.
사실 마교 전체로 따지면 그들을 잃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니긴 했다. 그들은 대의에 별 지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마교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중원에 진출한 교도들을 지휘하는 것은 소교주.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냐에 따라 단목장룡의 행동도 달라진다.
마교의 전력을 이렇게 찬찬히 갉아먹을 수 있다면 좋다.
‘아마 더 이상의 습격은 없을 듯하지만.’
단목장룡은 난주의 사천당문 지부로 향했다. 난주에 들르기 전 등봉현에 들러 난주로 향한다고 말했었다. 당옥정과 당용아는 등봉현에서 대허 선사가 말했던 ‘그분’을 추적하고 있었다. 알아낸 정보를 단목장룡에게도 공유하기로 했었다.
‘서신이 와 있군.’
단목장룡은 조용히 서신을 펼쳐 읽어 나갔다.
‘꽤 범위가 좁혀졌군.’
당용아는 확실히 능력이 뛰어난 듯하다. 오대세가의 내당주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여인의 몸으로 말이다. 그녀의 곁에는 당옥정까지 있었다. 꽤 오랜 기간 추적했으니 어느 정도 단서를 찾아낸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총 다섯…….’
소림사의 고승들이 안식에 들면 제(祭)를 올린다.
대허 선사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배분은 현재 활동하는 무인들 중 가장 높았다. 대허 선사보다 배분이 높은 이들 중 제를 지내지 않은 고승들을 찾아보면 범위를 축소할 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단목장룡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은…….’
단목장룡의 눈이 깊어졌다.
* * *
현재 천마신교는 중원 진출에 마도육문에게 일정 수준의 재량권을 주었다. 경쟁하게 하여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였다. 소교주는 그것으로 새로운 천마신교가 태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에서 몇 가지 치명적인 실수가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백혈단의 지급 대대가 양씨세가를 집어삼키려다 전멸한 사건이었다. 거기에 백문이 진행하던 육합문이나 지룡문 또한 멸문하게 되었다. 무림맹의 개코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진행하던 것이었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데…….
“칠살대도 모자라서 추흑대까지 전멸했다?”
“죄송합니다.”
쿵!
백발 청년의 앞에 건장한 무인이 머리를 찧는다. 어찌나 강하게 박았는지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지만, 청년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살문에게 전해라,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중원에서 어떠한 행동도 금한다고.”
“존명!”
쿵!
다시금 머리를 박는다.
소교주는 화를 가라앉힌다. 모든 일에서 성과를 거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칠살대의 전멸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칠살대가 당한 것을 알고도 추흑대를 투입한 행동은… 너무도 미련하고 멍청했다.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진 알고 있었다.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
신교 내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보다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정에는 살문의 문주가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쏟은 물을 주워 담으려다 더 큰 화를 부른 것이다.
“그딴 놈들에게 재량권을 준 것이 실수였군. 그냥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무는 개로 사용했어야 했어.”
쿵!
“그만. 시끄럽다.”
수하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래서 지금 진가장을 차지하고 있는 놈이 누구라고?”
“장천입니다.”
“장천?”
소교주의 머릿속에 한 사내가 떠오른다.
장천의 이름은 이미 들었다. 해남도에서 귀문의 끄나풀을 죽였던 사내. 처음엔 장천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단목장룡…….’
장사에서 그와 맞붙었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승패가 가려지진 않았지만… 마치 패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죽은 그놈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늘이 내려 줬다는 재능을 가지고도 그걸 전혀 활용하지 않았던 미련한 놈.
“대체 언제 난주까지 간 거지? 쉬지 않고 경공이라도 펼친 건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경공이 그만큼 빠르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동 수단이 있다는 건가.’
참으로 거슬린다.
“진가장은 손을 뗀다. 굳이 놈의 노림수에 당해 줄 필요는 없지.”
“존명.”
‘단목장룡… 언젠간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소교주는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이라 불렸던 사공천. 교주마저 경악하게 만든 그 또한 소교주에게 패배했다. 씁쓸한 죽음을 맞이했었다.
‘놈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직도 아쉽군.’
소교주가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서 풍만한 육체를 가진 여인이 고혹적인 눈웃음을 짓는다. 그녀는 약문의 소문주 탕음선녀(蕩淫仙女) 매약란이었다.
“약문은 살문처럼 실수하진 않았겠지?”
“호호호, 작은 하늘께서 명하신 일인데 어찌 실수가 있을 수 있겠나요?”
“그렇다면 곧 반응이 나타나겠군.”
“늙은 도사는 곧 그 자리에서 물러날 거랍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여인.
소교주가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흐응…….”
소교주가 손짓하자 방 안에 있던 수하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다. 그 움직임에서 일체의 군더더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교주의 무릎에 앉은 탕음선녀.
그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널 바로 문주로 만들어 주마.”
“어머, 감사… 하응, 거긴… 짓궂으세요, 정말.”
부끄러운 척하면서도 기쁨을 숨기지 않는다.
약문의 문주. 그것을 논할 수 있는 자는 천마신교에 단둘뿐이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천마신교의 작은 하늘, 소천마(小天魔) 사도명이었다.
* * *
단목장룡은 그 이후에도 줄곧 진가장에 머물렀지만, 더 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아쉽군.’
빈말이 아니다.
단목장룡은 진심으로 아쉬웠다. 뜬눈으로 달빛을 받으며 기대했다. 어쩌면 ‘그’가 오지 않을까? 마교의 전투대 중 두 개를 전멸시켰다. 피로써 모든 것을 갚는다는 마교에서 절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자신의 정체도 그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단목장룡은 기대했다.
혈우검마(血雨劍魔)와 수라대(修羅隊)가 찾아오기를.
하지만 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날 죽였을 당시에 혈우검마는 극마에 올랐지. 지금쯤이면… 더 강해졌겠지.’
즈으으으.
단목장룡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퉤.”
그가 무언가를 뱉었는데, 참으로 기괴하게도 그가 뱉은 침이 닿은 자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 침일까? 위액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자줏빛 색을 발하고 있었다.
‘연옥… 마치 천마신공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 같구나.’
천마신공은 인간의 육신을 마를 종복시키는 천마로 만드는 무공이다. 그리고 자미소의 연옥은 단목장룡이 생각해도 미친 효율을 자랑하는 무공이다. 연옥에 녹아내리지 않기 위해서 육신은 스스로 변화한다. 물론, 단순히 연옥을 활용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긴 했다. 수많은 무공을 극한까지 이해한 단목장룡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그는 특정 부위에만 연옥을 활용했기에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됐다.
‘시간도 충분하니 한 번 더…….’
단목장룡이 연옥을 세맥에 주입하려 할 때였다.
끼이이익.
진가장의 정문이 열리는 소리. 단목장룡이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손님이 왔군.’
* * *
맹주의 집무실.
장사현에서 급히 복귀했다. 맹주가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무림맹의 지부는 널리 퍼져 있었으니 말을 바꿔 타고 달려가면 호남성에서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림맹에 도착하여 맹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육왕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일이었다. 그들과 먼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지 의논해야 한다. 무림맹주가 막상 결정을 내렸는데 반발하는 경우가 없어야 하니까.
그리고 차후 사마련, 마교와의 회담도 준비해야 했다.
이번 회담을 바탕으로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무림맹의 전력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평화로 정파 무림의 힘은 역대 최고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부 경쟁으로 감정의 골이 남아 있는 세력들이 있다. 특히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견제는 극도로 심해진 상태.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서로 힘을 합칠 것을 알고 있지만…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맹주의 역할이다.
맹주는 맹에 복귀하자마자 쉴 틈 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지끈.
누군가 머릿속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 무림맹주는 한숨을 내쉬며 붓을 놓았다.
‘요즘 들어 자주 머리가 아프군.’
신경 쓸 것이 많다 보니 정신적인 피로가 극한에 이르렀다. 뭐, 바쁜 것은 맹주뿐만이 아니었지만 정파 무림이 그의 어깨에 달려 있으니 맹주보다 큰 부담을 느끼는 이들은 없으리라.
띵띵.
맹주가 탁상 위의 종을 울리니 시비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예, 맹주님. 부르셨습니까?”
“차 한 잔 부탁하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비가 금세 차를 우려 왔다.
맹주가 원하면 바로 대령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맹주는 차의 향을 음미한다.
‘후우, 차의 향을 맡으니 머리가 개운해지는구나.’
요즘 들어 맹주는 차를 많이 마시고 있었다. 본래 차를 하루에 한 번은 마시곤 했지만, 회담에 다녀온 이후로는 거의 한 시진에 한 번씩은 마시는 듯하다. 차를 마시는 시간엔 걱정을 덜 수 있으니 정신적인 피로가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게 잠깐의 꿀 같은 휴식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맹주님, 대허 선사께서 맹주전에 방문하셨습니다.”
“대허 선사께서?”
“예.”
서신을 보내긴 했지만, 이토록 빨리 맹에 찾아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무림맹이 있는 정주와 등봉현의 거리가 가깝긴 했지만…….
‘대허 선사…….’
소림의 방장인 그는 쉽지 않은 인물이다. 언뜻 맹주와 견해가 비슷한 것 같아도, 정도의 차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는 마교의 중원 진출을 용인하자는 입장이다. 당연히 무림맹주는 그것에 반대한다. 전쟁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진출을 용인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하아, 또 머리가 아프군.’
대허 선사는 맹주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배분을 가지고 있다.
그와 토론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히려 마교의 소교주나 사마련주와 정치적인 담론을 나누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허 선사는 같은 정파인이자 정파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의 방장이다.
“안으로 모시도록 하게. 참, 시비에게 전달하여 차도 부탁하네.”
“예, 맹주님.”
음미하며 마시고 있던 차.
무림맹주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켰다. 사실 이 정도 열기는 맹주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단지, 차를 마셨다는 만족감이 차올랐을 뿐이다.
‘좋군.’
그 순간만큼은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