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시작
단목장룡이 영령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사마백혼의 등장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겼지만, 그녀와는 분명히 공감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녀는 단목장룡에게 떠나라고 했었다. 마치 그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맹주와 대화를 나누고 그녀를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이미 사마백혼과 영령은 장사를 떠나갔다고 한다. 천응을 타고 두 사람을 추적한다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으나…….
‘사마련주가 곁에 있는 이상 그녀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사실 암천회주는 쾌락과 환락을 탐한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믿을 수 있는 무인이었다. 하지만 사마련주는 소문은 상당히 좋았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무언가 비틀린 부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적으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영령의 가면에 손을 댔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었다. 어떤 것이 그의 본모습인지 알 순 없었지만, 쉽게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속에 감춰 둔 꿍꿍이도 있으리라.
‘영령…….’
그녀를 떠올린다.
그리움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사공천으로 살아갈 당시 그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착하진 않았다. 마교와 맞서다 보면 언젠간 만나게 될 것이다. 굳이 지금 그녀를 추적할 필요는 없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는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단지, 그녀와 싸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
‘소교주…….’
그 또한 이미 장사현에서 떠났다고 한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떠나갔을까?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의 목이 떨어지는 기억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생생하다. 중원의 어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다음에 만날 땐, 지금과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밝은 보름달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되돌아갔다.
* * *
두근두근!
갈유화는 오늘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와 육체를 접촉할 때마다 황홀감이 육신을 뒤덮었다. 그의 허리에 손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그의 등에 닿은 것만으로 그녀는 행복했다.
‘역시 포기할 수 없어.’
각오 따위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저 멀리 해남도의 여모봉이 보이자 갈유화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그와 떨어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같이 낭군님과 다닐 수 있다면… 내가 사파인이 아니었다면…….’
당옥정처럼 직접 그를 따라다니며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당옥정 그 여우 같은 계집은 단목장룡을 따라 무림맹에 입맹했다. 자신이 오대세가의 출신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으리라. 평생 암천회의 소회주로서 만족하고 살아왔지만, 요즈음 그것이 후회된다. 후회한다고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끼에엑-!”
“갈유화, 도착했다.”
단목장룡의 말에 갈유화가 몸을 움찔했다.
그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황급히 뺀다.
“어머나, 천응이가 엄청 빠르네요! 어쩜 이렇게 빨리 해남도에 도착할 수가… 정말 대단한 아이예요.”
흘끔 천응을 바라보며 말하는 갈유화.
천응은 갈유화의 속도 모르고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날갯죽지를 으쓱이고 있었다. 갈유화는 그런 천응을 보며 꿀밤이라도 때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겨우 참아 낸다. 천응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암천회주님께선 폐관에 들어갔다고 하셨나?”
“네에, 그렇답니다.”
갈유화는 암천회주의 핑계를 대서라도 그를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런 치졸한 방법으로 그를 속박하려 들었다간 영영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공자님께선 이제 어디로…….”
“감숙성으로 가려고 한다.”
“감숙성이요?”
단목장룡은 대강의 계획을 갈유화에게 말해 준다.
지금 단목장룡이 가장 신뢰하는 두 사람을 꼽으라면 당옥정과 갈유화였다. 두 여인은 일편단심으로 그를 도와주었다. 솔직히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갈유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를 이용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굳이 거짓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위험할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
단목장룡의 표정은 태평했다.
하지만 갈유화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가끔 보면 단목장룡은 위험에 몸을 던지려 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 거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왜 마교에게 저토록 집착하는 걸까? 그것이 이해가 안 된다기보단… 그에게 당장 이렇다 할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피식.
단목장룡의 웃음. 어떤 사내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여유. 갈유화가 처음 그를 마음에 품게 된 것도 저 눈빛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네에, 물론이죠. 전 공자님을 믿고 있답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믿을 거예요.”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
단목장룡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나중에 또 보지.”
천응의 등에 오르려는 단목장룡.
그의 정면으로 갈유화가 달려들었다.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목장룡의 가슴팍에 안겼다. 과거였다면 몸이 접촉한 틈을 타서 나쁜 짓(?)을 시도하려 했겠지만,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단지, 그를 안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잠깐의 포옹이 끝나고, 단목장룡이 천응에 오른다.
요즘 보면 왠지 모르게 갈유화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가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조심해라.”
“……!”
갈유화는 큼지막한 눈동자로 하늘로 오르는 천응을 바라본다. 정신을 차리자 천응은 저 높은 하늘에 올라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갈유화는 그것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 두 번째라도 상관없답니다.”
그러니까.
“포기할 순 없어요.”
갈유화는 평소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떠난 정인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것은 그녀의 성향이 아니다.
‘일단 당옥정… 그 아이와 친해져야겠어.’
이길 수 없다면, 친구로 만들어라.
가장 효과가 뛰어난 전략 중 하나였다.
* * *
무림맹주는 백마를 타고 무림맹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하필이면 자신이 맹주일 때 이러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물론 전쟁이 벌어진다면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것이지만… 맹주는 그러한 명예보다는 정파 전체를 먼저 생각했다.
‘이제 육왕들이 걱정이로군.’
그들이 왕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좋게 말하면 독립적인 인간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였다. 그들의 의견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일 테다.
‘비슷한 결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몰던 무림맹주.
순간 삐이이-, 하는 백색소음이 그의 귓가를 강타했다.
찌릿찌릿.
바늘로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아주 잠깐 전해졌다.
“맹주님?”
갑자기 맹주가 말을 멈춰 세우니 호위 무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맹주는 오른손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근 몇 달 동안은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종일 생각만 했다. 걱정은 태산이었고, 하나의 일이 끝난다 싶으면 또 다른 일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맹에 가면 좀 휴식을 취하긴 해야겠구나.’
물론, 그가 바라는 대로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긴 하다.
“아무것도 아니라네. 이랴.”
맹주의 백마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간다.
* * *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더냐?”
두 마리의 검은 말. 그 위에는 사마백혼과 그의 아들 사마공, 아니 영령이 타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관도를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영령은 그와 만난 이후로 전음의 숫자가 팍 줄어들었다. 애초에 그리 말이 많진 않았지만.
“혹, 그 단목가의 아이를 마음에 품고 있는…….”
찌릿!
분명히 가면 속에 감춰진 눈빛이건만 사마백혼은 그 눈빛에 찔끔하고 말았다. 사파의 지존이 누군가의 눈빛에 기가 죽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지금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 그와는 이제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래?”
- 예.
“흐으음…….”
영령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사마백혼.
“다시 목소리를 들려줄 순 없겠느냐?”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삐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마백혼은 인간의 분위기를 숨 쉬듯 읽어 낼 수 있었다. 뭐, 영령이기에 확실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분명히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긴 한데… 그게 무얼까?’
단목장룡은 외모로 따지면 분명히 출중했다.
하지만 솔직히 외모를 비교하자면, 마교의 소교주가 훨씬 뛰어나다. 그리고 중원엔 단목장룡 이상 가는 귀공자들이 많았다.
‘무공의 재능이 대단한 것은 맞지만… 이 아이는 단목장룡을 이용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
그녀는 거대한 염원을 품고 있었다.
사마백혼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런 좋은 패를 두고,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설득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일까? 자신이나 소교주에게 말했다면 다른 방법을 고안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대화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단목장룡, 지켜봐야겠군.’
위험한 놈이라는 인식에서 흥미로운 놈으로 바뀐다.
사마백혼의 관심이 그에게 이로운 일일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 * *
“이 장원을 구매하고 싶은데.”
“여긴 이미 구매자가 있습니다만…….”
주름이 가득한 얼굴. 눈 밑은 숯덩이가 붙어 있는 것처럼 거무죽죽했다. 음침한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는 눈빛은 전형적인 장사꾼의 눈빛이었다.
“뭐, 가격을 더 쳐 주신다면 상관이 없긴 한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곳이 워낙 목이 좋은 장원이라 말입니다. 거기다 건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자재 또한 극상품을 사용했습니다.”
상인이란 자고로 돈 냄새를 잘 맡아야 한다. 돈 냄새가 풍기는 곳에서 손만 몇몇 뒤적여 주고, 입만 몇 번 털어 주면 황금이 창고에 쌓이는 것이다. 난주의 장사꾼 중 최고로 꼽히는 왕립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편이다.
난주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장원.
과거 난주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던 무가(武家)인 진가장의 장원이었지만, 이제는 주인이 없는 곳이다. 진가장이 망해 버린 탓도 있겠지만, 이곳은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장원을 매입한 다른 거부들은 학을 떼며 이곳을 싼값에 매각하곤 했다.
왕립은 거기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장원 내에 연무장만 네 개가 있었으며, 지하에는 개인 연공실 또한 갖추어져 있었다. 장인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장원의 값어치는 자그마치 금자 이백 냥. 하지만 장원을 매입한 자들은 보름도 지나지 않아 그것을 왕립에게 되팔았다. 반의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흉흉한 소문에 난주에 살던 이들은 이 장원을 매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외지인들은 그 소문을 전혀 모르곤 한다. 언젠간 단물이 쏙 빠질 테지만, 그때까지는 돈 나오는 방망이를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호구!’
딱 봐도 젊은 사내.
다른 지역에서 온 무인인 듯한데, 위치나 장원의 외관만 보고 이곳을 매입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요즘 진가장의 흉흉한 소문에 매입하려는 이들이 확 줄어들어 걱정이었는데, 오랜만에 또 손님이 온 것이다.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으음, 진가장의 역사는 아주 깊습니다. 사실 금자 오백 냥은 받아야 할 물건인데… 젊은 분이시니 금자 사백 냥까지는 어떻게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이었다.
하지만 왕립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당당히 사내를 마주했다.
“사람을 호구로 아는군요.”
“…….”
왕립의 표정이 굳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놈이라 생각했는데, 흥정할 줄도 아는 듯하다.
“진가장이 마음에 든 눈치던데, 그 아래에는 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미련 없이 몸을 홱 돌리는 왕립.
그런 그를 불러 세우는 사내였다.
“잠시만.”
“왜요? 전 금자 사백 냥 이하에는…….”
“이미 주변에 소문이 쫙 퍼졌더군요. 이곳엔 ‘살수’가 찾아온다고 말입니다.”
“살수?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릴!”
당연히 왕립도 그 흉흉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길길이 날뛰며 분노를 표출한다. 그런 소문은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이.
“오십 냥.”
“뭐, 뭐라? 오십? 머리에 돌이라도 맞았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육십 냥. 그 이상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전 살수가 나온다는 걸 알고 매입하려는 겁니다. 적당히 하고 거래하면 좋겠군요. 바로 만금전장의 어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평균적인 시세의 반값이었다.
그런데 오십에서 육십으로 늘어나니 오히려 이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놈 보게……?’
왕립은 이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놈에게 교훈을 새겨 주고 싶었다.
금자 육십 냥이 열 냥으로 줄어드는 것을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릴 듯하다. 난주의 다른 상인들은 전혀 진가장을 매입하지 못한다. 이곳은 오롯이 왕립의 구역이었으니까.
“좋습니다. 거래에 응하겠습니다. 공자의 기개가 보통이 아닌 듯하여 넘기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왕립은 만금전장의 어음의 진위를 판단하고, 바로 땅문서를 가져왔다.
“부디 진가장에서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왕립은 음흉함을 감춘 채 사내에게 인사했다.
금자 이백 냥에 달하는 물건을 육십 냥에 팔았음에도, 그의 표정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보름이 지나기도 전, 진가장이 다시 그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