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의문이 더해진 만남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눈동자의 떨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영령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단목장룡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단목장룡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도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날 구해 줬으니까.”
“…….”
“이 팔찌가 없었다면 난 죽었을 수도 있다더군.”
“…누구한테 뭘 듣고 그런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부정하려는 영령이다.
왜 그러는 것인지 아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녀는 뭘 원하고 있는 걸까?
“당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여인에게 들었어, 이 팔찌에 영혼이 담겨 있었다는 걸.”
가면 틈 사이의 눈동자가 옥팔찌를 향한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단목장룡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영령이 자신을 구해 줬다는 건 사실이리라. 그녀가 무엇을 원할까? 왜 자신을 구해 줬을까? 지금 그녀는 왜 가면을 쓰고 사마공을 연기하는 걸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일까?
모든 것을 속 시원히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 전에.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다시금 영령의 눈동자와 마주한다.
은은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 약간의 물기가 고여 있는 듯하다. 그녀의 대답이 없자 단목장룡이 그녀의 가면에 손을 댄다. 조금만 힘을 주면 가면을 떼어 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에 가로막힌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단목장룡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그만하세요.”
그녀가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이유일까? 여러 가정이 떠올랐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손을 빼려고 했던 단목장룡. 그는 가면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영령이 그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놓치기 싫다는 것처럼. 얼굴은 보여 주기 싫지만, 손은 잡고 싶다? 그런 상반된 행동에 단목장룡의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영령.”
“…조언 하나 할게요.”
말해 보라는 듯이 가만히 가면 속 눈동자를 응시한다.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눈빛이 잘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언이라. 그 말을 듣는다면, 그녀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무림의 일에는 관여치 마세요.”
“…….”
“신교에 복수심이 있다면 버리세요.”
“…….”
“평범하게 살아가세요. 평생의 소원이었잖아요? 꼭 중원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살아갈 장소는 많답니다. 갈유화나 당옥정을 데리고 떠나면 되겠군요.”
“…….”
그녀의 입에서 두 여인의 이름이 나오니 참으로 묘한 감정이 몰아친다. 영령은 사공천이었던 시절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여인이었다.
처음 영령의 눈동자는 세차게 떨려 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그녀의 눈빛이 강직하게 변했다.
“죽다 살아났으면 괜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조언이에요.”
영령은 본래 직설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신교에 있던 시절에 무던히도 그를 밀어냈었다. 단목장룡이 사공천이었을 때, 그는 분명히 마지막 한 걸음을 뗄 용기는 없었지만, 이 정도로 물러서진 않았다. 거기다 지금은 사공천이 아닌 단목장룡이었다.
“미안하지만…….”
단목장룡이 미소를 띤 채로 말한다.
“그럴 순 없을 것 같군. 이제 삶의 방향을 확실히 정했거든.”
“어차피 다시 죽을 뿐이에요. 그걸 모르시나요? 신교의 힘은… 당신은 전혀 모르는……!”
“같이 헤쳐 나갈 순 없는 건가?”
“……!”
영령은 천마신교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 마주하고 있으니 과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잘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녀가 이별을 고했던 이유도 단목장룡, 아니 사공천을 위해서였다. 그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십만대산을 떠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그녀는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만약 단목장룡을 죽이고자 했다면 그가 현재의 경지에 올라오기 전에 기회는 있었다. 단목세가가 명문가라고 하지만 천마신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무림에는…….”
단목장룡의 말에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뭐 하는 짓이지?”
“…….”
백발의 사내. 햇볕을 머금어 반사되는 그의 피부에선 광채가 흐른다. 눈빛은 깊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뭇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 심지어 사내마저 당황시키는 인물이 등장했다.
“단목장룡, 그 손을 떼지 않으면… 손목이 아니라 목도 따 줄 수 있다.”
처음 장사현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 그의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 사파에서도 존경을 받던 무인. 사마련주 사마백혼의 얼굴은 야차가 되어 있었다. 단목장룡이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그는 공격해 올 것이다.
‘여의대천신공.’
단목장룡의 머릿속에 암천회주가 전해 준 분석서가 떠오른다. 그의 피부에서 피어오른 자그마한 기운들. 그것이 닿는 순간 전설 속의 여의봉처럼 그 크기를 폭주시킬 것이다. 화산처럼 폭발하는 기운. 단목장룡은 가만히 서서 그의 기운을 음미했다.
‘지금은 아니겠군.’
단목장룡이 미소를 머금는다.
그의 얼굴을 본 사마백혼의 얼굴이 더 굳는다.
“위협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마 소협의 얼굴이 워낙 궁금해서 그만.”
“손을 놓으라 했다.”
사마백혼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강렬한 기운이 퍼져 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단목장룡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뗀다. 손목을 붙잡고 있던 영령의 손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사마백혼이 영령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지? 사마백혼은 진심으로 영령을 걱정하는 건가?’
사마련주가 천마신교의 신녀를……?
그라면 영령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 아마 천마신교와 사마련이 합의하여 사마공이라는 인물을 탄생시켰으리라.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사마백혼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여러 가지를 가정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영령이 진짜 사마백혼의…….’
뚜벅.
사마백혼이 단목장룡의 정면에 섰다.
그의 눈동자와 마주한다. 놀랍게도 그의 눈빛엔…….
‘푸른빛이 감돌고 있다.’
나찰마궁주와는 달랐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면, 사마백혼의 그것은 은은하게 비치는 듯한 분위기다. 색과 온도의 차이랄까? 그것을 본 단목장룡은 혼란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설마 사마련주가……?’
소림사의 방장과 만났던 일. 나찰마궁주의 연옥에서 대야반야금강공의 묘리를 발견했던 일. 뇌왕의 죽음을 목격한 낭인이 푸른 눈동자의 사내와 마주쳤던 일. 그 모든 것이 단목장룡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물론, 그것을 겉으로 내보이진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앞으로 내 아들에게 작은 위협이라도 가하는 순간… 네놈은 물론이고 단목세가까지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물러서지 않았다.
“참으로 ‘아들’을 아끼시는군요. 무공의 경지로 보자면 일파의 대종사가 될 사내인데 말입니다.”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영령이 ‘말’한다.
“돌아가죠. 굳이 분란을 만들…….”
“……?”
그리고 이제까지 분노를 숨기지 않던 사마백혼. 그의 표정이 기괴하게 바뀐다. 행복함? 놀람? 당혹?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확언할 수 없었다. 단목장룡을 노려보던 그의 눈동자가 영령을 향한다.
“네가 말을……?”
휙.
영령이 몸을 돌려 자리에서 떠나간다. 사마백혼은 그 모습을 보고 멍하니 있을 뿐이다.
“…내가 자네에게 너무 화를 냈던 것 같군. 미안하네.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어이없게도 사마련주는 단목장룡에게 사과하고 황급히 영령을 뒤쫓았다.
그걸 지켜보던 단목장룡의 뇌리에 한 단어가 떠오른다.
‘딸 바보.’
딸밖에 모르는 아버지. 중원에서 그런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사마련의 지존이자 지배자인 사마련주가 그런 행동을 보이니 조금 어울리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이상하군.”
사마련주가 딸 바보다.
그러한 명제가 아예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딸을 아끼는 아버지는 많았으니까. 아마 단목장룡 자신도 아들이나 딸을 낳는다면, 자신보다 더 아낄 것이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영령은 마교의 신녀였다.’
신녀는 영예로운 자리이다.
심지어 교주마저도 그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마신교에서도 막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교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좋은 자리는 아니지.’
엄청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십만대산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신녀궁’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곳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중원의 평범한 남녀처럼 일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사공천으로 살아갔던 시절 결국 그녀의 이별 통보에 순응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혼인할 수 없다. 신녀에겐 혼인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확실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단목장룡은 떠나가는 영령과 사마백혼의 모습이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사마공이 영령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속이 시원하긴커녕 더욱 답답해졌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순 없지.’
죽음을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던 사공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어떠한 모험도 하지 않았던 미련한 인간. 지금 그는 사공천이 아닌 단목장룡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 * *
“회담은 그나마 잘 마무리됐다고 할 수 있겠군.”
무림맹주의 말에 단목장룡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다행이었다.
사마련주가 해남도에 찾아가 암천회주와 싸웠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이번 회담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걱정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회담은 정확히 결론 난 것이 없이 끝났다. 오히려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게 무림맹으로선 호재로 작용할 수 있었다. 정파 명숙들의 의견을 모을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음 회담은 무림맹에서 주최하기로 했다네.”
“그때도 소교주가 참석하는 겁니까?”
“그렇다네.”
교주는 역시 오지 않는 건가.
단목장룡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교의 지존은 사소한 일에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상대가 사마련주나 무림맹주라 할지라도.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없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참, 이번 회담에서 사마공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네. 그랬더니 묘한 반응을 보여 주더군.”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마련주는 물론이거니와 소교주까지 무언갈 아는 눈치였어. 사마공에겐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하네.”
“…그렇군요.”
이미 단목장룡은 낮에 진실을 확인했다.
사마공의 진짜 정체는 천마신교의 신녀였다. 하지만 맹주에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어찌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 알려 줄 수도 없었으며, 그녀 또한 단목장룡의 본질이 사공천이라는 사실을 마교에 밝히지 않았다.
선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현재 단목장룡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더 신중하게 걸음을 대디뎌야 할 것 같군. 사마련과 마교가 모종의 합의를 맺었다면, 정파 무림의 입장에선 크나큰 악재로 작용할 것이네. 맹에 돌아가는 즉시 육왕을 소집할 생각이네만…….”
무림맹주의 은근한 시선이 느껴진다.
“자네도 참석해 줬으면 하는군.”
단목장룡이 고민하는 듯하자 맹주가 황급히 말을 잇는다.
“물론, 흑룡단의 조장으로 참석할 필요는 없다네.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네는 정파인이 아닌가? 이제는 육왕이 아닌 칠왕으로 불려야 할 테지. 자네의 존재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각인하는 것도 좋다고 보네.”
“당장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됐네.”
맹주가 그것으로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회담은 완전히 끝난 겁니까?”
단목장룡은 비공식 회담이 남아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렇다네. 뭐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
무림맹주가 발언하면 다시 비공식 회담이 개최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목장룡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맹주님께선 이제 더 바빠지시겠군요.”
사실 사마련주와 마교의 소교주는 서로 소속이 다르다. 하지만 육왕은 같은 정파인들이다. 그들의 의견이 맹주와 같지 않다면, 그것을 조율하는 맹주는 상당한 고역을 치르리라.
“그렇지. 이렇게 말하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솔직히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이 가질 않는군. 단지, 최대한 정파 무림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네.”
맹주 또한 고민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단목장룡이 영령과 만난 후 심경이 복잡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걱정스러운 표정.
단목장룡은 마교에 대한 강렬한 적의를 드러냈었다. 당장 마교의 소교주와 싸우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아무리 그가 탈맹한 상태라고 하지만, 회담이 끝난 직후 일을 벌이는 것은 그리 좋은 그림이 아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소교주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이미 소교주를 죽인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단목장룡이 맹주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아마 마교는 합의를 보지 않았음에도 난주에 지부를 만들고 있겠지요.”
이제까지 마교가 양씨세가나 육합문에서 보여 줬던 행보를 생각할 때,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설마 자네……?”
“예, 전 그걸 막겠습니다. 마교에서도 딱히 할 말은 없겠지요. 아직 합의된 사항이 아니니까요.”
분명히 그것은 필요한 행동이다.
본래 마교의 패악질을 막는 것은 감숙성의 패자라 불리는 공동파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나, 복마진인은 무림맹주이기 전에 공동파의 소속이었다. 마교가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공동파는 무조건 멸문이었다.
과거 청해성의 곤륜파처럼 말이다.
맹주는 모든 것을 통달한 도인이나 부처가 아니었다. 그 또한 사람이었다.
“그건… 자네가 위험할 수도 있다네. 마교의 정예들은…….”
단목장룡은 겁내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얻었던 순간부터 그들에게 복수를 꿈꿨다. 지금 와서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한 마음은 영령을 만난 이후 더 굳건해졌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잔잔한 말투였지만, 그것은 맹주에게 큰 울림이 되어 전해졌다.
그는 노력하고 있었지만… 단목장룡처럼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여러 이유를 대며 말이다.
“자네는 정말…….”
맹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