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개입하다
처음엔 아이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처럼, 허허로운 웃음을 지은 채 싸움을 지켜보던 사마백혼. 그의 표정이 조금씩 진중하게 변해 간다. 그것은 옆에 선 무림맹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싸울 생각인가 보군요.”
“…더는 지켜만 볼 수 없소.”
“마교의 무공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순간 그의 말에 홀라당 넘어갈 뻔한 맹주. 두 사람의 싸움은 분명히 배울 것이 있었다. 마교의 무공을, 천마신공을 견식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경험이 되리라. 맹주 또한 무림인이다.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단목장룡과 마교 소교주의 수준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그럴 순 없소. 싸우기 위해 회담을 계획한 것은 아니지 않소?”
하지만 무림맹주는 처음 가졌던 마음을 되새겼다.
어쩌면 마교나 사파와 싸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대화를 해 보기도 전에 검부터 빼 드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요.”
사마련주 사마백혼.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나선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사마련주. 무림맹주의 의지를 알아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걸 알 순 없었지만, 맹주와 사마련주가 힘을 합치면 두 사람을 떼어 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맹주가 사마련주의 옆에 서려는 순간.
사마백혼은 이미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싸우려는 두 사람이었는데, 중간에 난입하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러려면 두 사람보다 수준이 높아야 했다.
“이런……!”
맹주가 급히 따른다.
맹주는 한발 늦게 격전의 현장에 도착했다. 싸우는 이들을 말리려면 더 큰 힘으로 그들을 막아서야 한다. 천뢰용검이 푸른빛의 찬란한 검강을 뿜어내는 순간이었다.
쿠우우-!
소리를 듣는 순간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가 일깨워지는 소리. 그 울림은 낮았지만, 낮았기에 더 소름이 돋았다. 무림맹주는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그 강렬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천뢰용검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무슨……?’
무림맹주는 볼 수 있었다.
단목장룡과 소교주가 부딪치는 순간, 그 중간에 끼어드는 사마련주를 말이다. 두 사람의 공세를 홀로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맹주는 자만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두 사람의 공세를 막아 냈다.
물론, 그들 또한 힘을 조절하지 못할 수준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자욱했던 흙먼지가 땅으로 가라앉는다.
사마련주를 중앙에 둔 단목장룡과 소교주가 입을 꾹 다문 채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
“…….”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군.”
사마련주가 말한다.
맹주에게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며, 두 사람의 무공을 보고 싶지 않냐고 말했던 것과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그걸 가지고 문제 삼을 맹주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왜 태도가 변한 것인지 의아하기도 했다.
‘으음…….’
흘끔 뒤를 바라보는 맹주.
처음엔 사마련주 혼자 나타난 줄 알았지만, 어느새 여우 가면을 쓴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면의 작은 틈 사이로 눈동자가 보이긴 했지만, 음영이 져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사마련주의 아들이던가.’
자식을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사마련주.
그의 아들이 사마련의 비무 대회에서 나타났다. 뭐, 사마련주도 나이가 어린 편이 아니기에 자식이 있었다는 게 그리 놀라운 건 아니었지만… 그의 무공 실력이 웬만한 명문 거파의 장로를 뛰어넘는다는 소리도 있었다. 심지어는 극마에 올랐다는 말도 있었다.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소교주와 단목장룡의 싸움을 멈추는 것이다.
사마련주의 개입에 일단락된 듯하지만, 언제 다시 불이 붙을지 모른다.
맹주가 앞으로 나선다.
“두 사람 다 그만하시오. 이번 회담은 평화를 논하기 위한 자리요. 회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병장기를 맞댄다면 어찌 평화를 말할 수 있겠소이까?”
“예, 알겠습니다.”
단목장룡은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소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감춘 발톱을 드러내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단목장룡을 압도했다면 태도는 달라졌으리라. 이번 싸움에서 그는 지독한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 기억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께선 아직 더 하고 싶은 건가?”
사마련주의 질문에 소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단목장룡을 향해서 빛나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지존이 될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패배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가면 분명히 자신이 승리했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 그를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 과거에 처절하게 느꼈던 그 굴욕감이 다시금 떠올라 쉽게 진정할 순 없었다.
거기다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미소.
그게 뭐라고 이리 감정을 뒤집어 놓는단 말인가?
“단목장룡이라 했던가?”
“그래.”
“마지막에 왜 웃은 거지?”
“뭐… 그건 네가 더 잘 알 것 같군.”
“…….”
순간 소교주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차라리 대놓고 도발을 했다면, 이런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머리 꼭대기에 선 것처럼 저렇게 말하는 꼴이 참으로 거슬렸다. 당장이라도 천마수라영세(天魔修羅永世)를 펼펴 놈의 눈빛을 공포로 물들이고 싶었다.
‘여기까지다.’
하지만 소교주는 빠져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화를 내 봤자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단목장룡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어떤 시련도 이겨 내 왔다. 그 천마신교에서도 역대급 천재라 불렸던 여섯 살 터울 동생도 결국 밀어내고 소교주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는가?
그는 감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지극히 이성적이기도 했다.
‘단목장룡, 기억해 두지.’
촤라락!
펼쳐져 있던 봉황선을 접는다. 그것을 본 사마련주가 흐뭇하게 손뼉을 친다.
“잘 생각했네. 역시 천마신교의 후계자답군.”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천하의 무림맹주님을 뵙게 되니 호승심이 생겨나서 그만… 회담에선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세상일은 이렇게 배우는 게 아닌가?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런가?”
이제는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소교주를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른 시선.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단목장룡은 마교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타인의 표정에 담긴 감정을 잘 읽어 내는 편이다. 물론, 얼굴에 떠오른 감정까지 완벽히 제어하여 연기하는 이들도 존재하긴 했지만.
“실수를 되풀이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겠지요.”
“호오, 자네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적이 없나?”
의미심장한 말투였지만, 단목장룡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신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상대의 반응을 보며 바꾸지 않는다. 단목장룡은 진지하게 답했다.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자세로군. 자네는 더 성장할 수 있을 걸세.”
흐뭇한 미소를 지은 사마련주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멀찍이 서서 미동도 없는 가면 사내가 보인다.
“……?”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가면의 틈 사이로 얼핏 보인 눈빛.
단목장룡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가면 사내라면 분명히 사마련주의 아들이라 알려졌었지.’
그는 사마련의 비무 대회에 나타났다던 저 사내를 소교주인 사도명이라 생각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듯 모습을 드러낸 고수. 그런 고수는 단기간에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도팔문의 후계자일 수도 있겠지. 소교주 말고도 그곳엔 인재가 많으니까.’
정말 사마련주의 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재능 넘치는 자식이 있었다면 왜 이제까지 드러내지 않은 걸까?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던 걸까?
‘더 지켜봐야겠군. 가면 속 얼굴을 본다면 정체를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단목장룡이 마교와 완전히 연이 끊긴 지도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래도 마교에서 유망했던 이들의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마교도가 사마련주의 아들을 연기하는 것이라면 그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단목장룡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렇게 생각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맹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목장룡은 소교주와 합을 나누었다.
아무리 지금은 흑룡단의 조장이 아니라지만, 무림맹주는 정파 무림인 중 최고 어른이었다.
“아닐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은가?”
무림맹주는 화내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할 순 없었다. 자신이 맹주라는 지위에 올라있지 않았다면, 단목장룡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 마교의 소교주와 단목장룡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니 정파의 위상도 더 높아졌다. 회담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맹주님, 그런데 그 또한 회담에 참석하는 겁니까?”
“그건 아직 정해지지 않았소이다.”
아니라고 확답을 하진 않았다.
단목장룡이 탈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림맹주의 권한으로 지위를 복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일단 그와 대화를 해 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참석했으면 좋겠군요.”
“허허, 이야기를 나눠 보리다.”
“알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회담장에서 뵙지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맹주에게 인사하는 사마련주.
그는 가면 사내와 함께 자리를 떠나갔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맹주님. 회담장에선 웃으면서 뵙길 바랍니다.”
소교주 또한 짧게 묵례하고 자리를 떠나갔다.
곧 큰일이라도 날 듯이 싸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건의 원흉이 떠나가자 무림맹주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세 세력의 수장급이 모이는 회담이니만큼 일이 생길 것이라 생각은 했는데, 장사현에 도착하자마자 싸움이 벌어졌다. 아마 단목장룡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가 직접 소교주를 상대했으리라. 공격을 해 오는데 맞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어찌 보면 단목장룡이 맹주의 체면을 살려 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자네와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군. 가능하겠는가?”
“예, 물론입니다.”
그렇게 단목장룡과 무림맹주 또한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멀찍이 서서 천하 제일을 논하는 고수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군중. 그들은 안도감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 * *
그날 밤.
사마련주와 소교주가 마주 앉아 있었다. 탁상 위에는 산해진미라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한 수준의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마련주만이 바삐 젓가락을 놀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모양새는 아니다. 아름답다고 평할 수준의 외모 때문일까? 그의 젓가락질에는 품격이 담겨 있었다. 타고난 것일까? 만들어진 것일까? 어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 고귀함은 어떤 순간에도 빛을 발한다.
물론, 소교주는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었다.
“…….”
젓가락을 놀려 기름에 튀긴 돼지고기와 볶은 채소를 앞접시에 올려놓은 사마련주. 그가 젓가락질을 멈추곤 소교주를 바라본다.
“왜 먹지 않나? 입맛에 맞지 않은가? 장사에서도 특급으로 취급받는 숙수들이 만든 요리인데 말일세.”
“제 입맛엔 딱히 맞지 않는군요.”
“지역마다 맛에 대한 선호도 차이가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으나.
“아니면 혹시 오늘 낮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건가?”
정곡을 찌른다.
소교주는 단목장룡과의 싸움을 복기하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는 어떻게 자신의 움직임을 읽고 움직였을까? 천마수라영세를 펼쳤다면 그는 무엇을 보여 줬을까?
“예, 신경이 쓰이는군요. 단목세가의 무공이 그 정도 수준일지는 몰랐습니다. 사실 오대세가나 구파일방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더군요.”
선선히 인정한다.
천마수라영세를 펼쳤다면 그는 공포에 떨었을 것이라느니 같은 못난 소리는 하지 않는다. 소교주가 이제까지의 험난함을 뚫고 이 자리 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를 복기하기 때문이었다.
실수는 정정한다.
다음번엔 더 나은 선택을 한다. 삶이나 무공이나 진리라는 것은 통용되기 마련이었다.
“자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군.”
“어떤 부분에서 말입니까?”
소교주는 사마련주를 인정한다.
천마신교의 지배자이자 지존인 천마와 견줄 수는 없겠지만, 그는 분명히 현 중원에서 가장 강한 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교주가 인정한 부분. 그에게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취한다. 그것이 소교주의 태도였다.
“그건 단목세가의 무공이 아니었다네.”
단목세가의 출신이 단목세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그가 익힌 것은 어디의 무공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하지만 소교주는 그의 말이 더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저런 실없는 소리만 할 사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사마련주는 말을 이어 간다.
“하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더군.”
그가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한다.
“그의 무공은 여의대천신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더군.”
여의대천신공(如意大天神功).
사파제일인이라 불리는 사마백혼이 익힌 무공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