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수정된 계획
은영전주는 탈맹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득함에 몸서리를 쳤다. 그게 무슨 말인가? 탈맹이라니? 같은 정파라고 하지만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세력도 더러 있긴 했다. 하지만 사실 정파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정예들이 무림맹 요직에 포진해 있었으니, 무림맹이 곧 정파 무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목장룡.
은영전주는 그의 과거를 모두 조사했었다. 믿을 수 없지만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는 과거 고향에서 망나니 취급을 받았다고 했었다. 또 맹의 간부들과 마찰을 일으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그의 잠재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현 맹주가 취임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차기 맹주로 그를 언급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단 명문가의 출신이었고.
가장 중요한 무공의 재능이 말 그대로 미쳤으니까.
은영전주는 따지고 보면 구파일방이 주축이 된 적룡단의 편이라 할 수 있었지만, 무림의 위기에서 그러한 정파 내부의 세력 구도는 의미가 퇴색된다. 특히 은영전주는 무림의 평화와 안녕에 가장 공을 들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언급한 대로 소위 명문 거파의 고수들은 엉덩이가 무거우며, 웬만한 위기에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단목장룡이라는 패는 중요하다.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줄 수 없겠나? ‘잠시’라고 해도 현 무림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 있다네. 자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무림의 희망이 될 것이라네.”
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었다.
단목장룡은 무림의 평화를 원하지만, 마교의 복수를 우선시했다. 또 억지로 만들어진 평화는 결국 곪고 곪은 다음 터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늦는다. 미리 손을 써 두어야 한다. 마교가 십만대산에서 나와 중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검은 손길이 다른 문파에 뻗기 전에 말이다.
“무림맹에서 잠시 나가더라도 전 정파인입니다.”
“그건 내 당연히 알고 있지. 자네는 정파인의 영웅이야. 그런 자네가…….”
“마교의 소교주와 마주하게 된다면, 전 검을 뽑아 그의 심장을 찌를 것입니다.”
단목장룡의 선언에 은영전주가 멈칫한다.
분명히 그러한 행동은 문제가 될 것이다.
“그건…….”
“제가 흑룡단의 조장으로서 움직이면, 마교에서 항의할 겁니다. 만약 명문 거파들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됐다면 모를까… 무림맹에 해가 갈 수도 있겠지요.”
소림사의 방장이 그걸 용납하지 않으리라.
은영전주는 단목장룡을 다르게 설득하고자 했다. 무림맹 내에서의 직위나 금은보화 그리고 영약으로도 붙잡을 수 없다면… 그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당장 마교와 싸워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직 삼자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네. 어쩌면 그 회담으로 새로운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굳이 마교의 소교주와 당장 싸우는…….”
순간, 단목장룡의 눈빛을 마주한 은영전주의 몸이 굳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사람 눈빛이…….’
공포였다.
이제껏 수많은 무인을 만나 보았지만, 이런 눈빛은 난생처음이었다.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두려움. 더 말을 이어 가면 위험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 천마(天魔)의 눈동자는 은영전주가 감당해 낼 수준이 아니었다.
순간 떠올랐던 눈동자의 귀기가 자취를 감춘다.
그것만으로도 은영전주는 턱 막혔던 숨이 뚫리는 듯했다.
“은영전주님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때가 되면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올 겁니다. 제 소중한 수하들이 흑룡단에 있으니까요.”
“…….”
귀기 어린 그 눈빛을 보았던 탓일까?
아니면 소중한 수하들이라는 말에 설득당한 것일까?
정확한 이유를 말할 수 없었지만, 은영전주는 단목장룡의 뜻을 수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후우우… 자네가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말릴 수 없겠군. 하지만 탈맹을 하고 마교도와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걸세.”
“은영전주께서 최대한 노력해 주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은영전주는 무림맹에서 부맹주와 비슷한 수준의 직위였다. 또한, 무림맹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마교와 마찰이 생긴다면 은영전주가 많이 바빠지리라.
“나 또한 자네가 금방 돌아올 것이라는 걸 믿고 있겠네.”
은영전주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단목장룡을 더 설득하다간 그 눈동자를 계속 마주해야 할 것이다.
‘다신 보기 싫군…….’
* * *
난 은영전주에게 탈맹을 선언한 후 전대 맹주가 기거하고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소림사의 방장과 대화한 후, 그에게 물어볼 것이 생겼다. 그라면 제갈교아를 납치했던 세력이나 인물이 누군지 알아낼 단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얼핏 보면 마교의 몰락이라는 내 목표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무영신투와 뇌왕의 죽음. 그리고 제갈교아의 납치와 강시의 제조.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억측이길 바라고 있었다.
‘일단 그와 대화하면 알 수 있겠지.’
제갈교아가 납치당하여 강시가 되어 가고 있었기에 당시에는 전대 맹주에게 그녀를 찾았다고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소림사 방장과의 대화로 배후의 출신이 어딘지 알아냈다. 이젠 제갈강량에게 진실을 밝힐 시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전각에 도착했는데…….
“전대 맹주께선 맹을 떠나셨습니다. 당분간 강호를 주유하신다고 하더군요.”
이미 전각의 주인은 바뀌어 있었다.
만약 제갈세가로 향했다면 그를 만나러 갈 수도 있겠지만, 강호를 주유한다니? 무림맹에 바삐 돌아온 것도 그를 만나 정보를 캐내려는 이유가 컸다.
‘당연히 무림맹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나.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흑룡전으로 향했다.
오 조의 전각에는 이새붕을 비롯한 조원들이 어김없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잠시 그들의 수련을 지켜본다. 당연히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남들보다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조원들은 무림맹에서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성장했다. 단지,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 강할 뿐이다.
‘미안하군.’
조장이 되어서 대부분 시간을 밖에서 보냈다.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 조원들을 키운 것은 먼 미래를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 년… 아니, 오 년만 지나도 그들을 믿고 임무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마교가 나타났다.
“어? 조장님?”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이새붕.
그 또한 남궁일몽을 따라 단목세가에 찾아왔었다. 아마 의창에서 이곳으로 복귀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
“조장님을 뵙습니다!”
이새붕과 단목위 그리고 조연연이 달려와 내게 포권지례로 예를 표한다.
조원들의 눈에서는 무한한 충심과 존경이 엿보였다.
“소식은 들었느냐?”
내 말에 세 사람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예! 조장님께서 나찰마궁주를 때려눕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흑룡단에서도 조장님 이야기로 아주 난리입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한껏 자부심이 가득 찬 조원들.
그들에겐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 * *
당연히 조원들은 단목장룡의 이야기를 듣고 침울한 얼굴을 했다. 믿고 따르던 단목장룡이 무림맹에서 나간다? 탈맹한다고 하여 연이 끊기는 것은 아니었고 다시 돌아온다고 했었지만, 그를 따르며 명을 수행할 날만을 기다리며 무공을 익혀 왔기에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그의 사과에 이새붕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단목장룡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그가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고 있다. 왜 자신들과 함께 맹을 나서지 않는지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당장은 오 조의 조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와 함께한다면 방해만 될 뿐이었다.
지금 방해가 된다면, 훗날 도움이 되면 된다.
“조장님께서 저희에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늘 그래 왔듯이 무공을 갈고닦으며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예, 조장님께 도움이 되도록 더 열심히 수련하고 있겠습니다.”
“다시 맹에 돌아오실 땐, 더 강해져 있을게요!”
애써 침울함을 지우고, 짐짓 호쾌하게 대답하는 세 사람.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이새붕이 머리를 긁적인다. 이 상황에 이런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하지만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다. 오 조의 부조장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그런데 조장님,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저… 조장님께서 나가 계시는 동안 저희는 어느 조에 들어가는 겁니까?”
이새붕은 흑룡단의 조장이 될 수준은 되지 못했다.
단목장룡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부조장이라는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무림맹을 나간다고 해도, 그가 탈맹하는 이상 오 조는 다른 조에 편입이 되리라.
“아마 남궁 조장이나 설 조장의 조로 편입될 것이다.”
이새붕은 애써 표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설 조장이 언급될 때 그의 표정이 굳었다. 이미 육신의 감각이 극에 달한 단목장룡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설 조장은 싫으냐?”
“하, 하하…….”
그 목석같은 단목위 또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하기야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최근엔 성격이 좀 죽은 줄 알았는데, 단목장룡의 앞에서만 그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알겠다. 단주님께 남궁 조장의 조에 편입될 수 있도록 말해 두지.”
“감사합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 모습에 피식 입꼬리를 올리는 단목장룡. 그의 웃음에 덩달아 미소 짓던 이새붕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참! 그리고 어제 하오문의 지부에 들렀는데 서신이 또 도착했습니다.”
“하오문?”
“옙, 서신이 여러 장 와 있었습니다.”
하오문을 통해 단목장룡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것은 암천회의 갈유화뿐이다. 단목장룡 또한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정주 하오문 지부에 들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새붕은 그걸 또 생각한 것이다.
이새붕이 이리 꼼꼼해진 것은 비선당주의 공로였다. 단목장룡이 떠나있는 동안 그들은 비선당주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가져와 보아라.”
“예!”
이새붕이 황급히 뛰어가서 고이 보관해 두고 있던, 갈유화의 서신을 가져왔다.
‘으음.’
그것을 읽는 단목장룡의 눈빛이 깊어진다.
암천회주가 패배했다? 암천회주와 싸워 보진 않았지만, 그의 무력은 적어도 나찰마궁주보다 위였다. 그런데 그가 사마련주에게 패배했다? 갈유화의 서신에 따르면, 암천회주는 큰 내상을 입었지만 사마련주는 그리 큰 상처를 입진 않았단다. 실력의 차이가 컸던 것이다.
‘암천회의 힘은 당분간 빌릴 수 없게 됐군. 그것보다 더 문제인 건…….’
사마련주.
그는 암천회주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 움직여 그에게 제안했다. 사마련의 명을 따르라고. 마교와 대척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뭐 갈유화의 서신에 따르면, 암천회주가 과거처럼 독기를 품고 있다곤 하지만 내상을 치료하는 데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혈세귀막에도 찾아갔을 수도 있겠군.’
단목장룡의 미간이 좁혀진다.
사파와 마교가 온전히 힘을 합친다면, 당연히 무림맹의 필패(必敗)다.
거기다 사마련주의 무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한 듯하다. 암천회주나 혈세귀막주와 비슷하거나 약간의 우위가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차이가 큰 듯하다.
‘사마백혼…….’
자신이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짧은 순간 단목장룡의 머릿속에서 암천회주와의 싸움이 그려졌다.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단목장룡이 이긴다고 해도, 아마 그 또한 꽤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나찰마궁주와 싸우기 전에는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자미소의 연옥은 자기 자신을 가두어 육신을 단련시키는 무공. 이 순간에도 단목장룡은 연옥을 이용하여 육신을 강화하고 있었다. 보다 더 완벽한 천마의 육신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군.’
그는 본래 삼자 회담이 끝나면 장사로 찾아가려 했었다.
혼자가 된 소교주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갈유화의 서신을 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련주는 상당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직접 해남도에 행차하여 암천회주와 싸울 만큼 말이다.
그런 그가 무림맹주와 만나면 어떤 행동을 취할까?
마교의 소교주는 어떤 선택을 할까?
‘맹주님이 위험할 수도 있어.’
마교 소교주 사도명과의 만남이 더 빨라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