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천목의방
하얀 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꿈이 아니다. 단지 하얀 것만 보이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으레 꿈이라는 것이 그렇듯 아리송한 감각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눈앞의 공간을 인식하고 있는지, 그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리송하다.
‘좋다.’
단지 이 공간 자체가 따스하고 포근하여 이대로 머물렀으면,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원히 이 공간에 머물러 있는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하나, 균열은 갑작스레 시작됐다.
포근하기만 했던 공간은 점점 부서지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깨면 이곳에 다시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안락함을 조금 더, 찰나만이라도 더 느끼고 싶다. 팔과 다리 모든 육신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최대한 노력했다. 이 꿈에서 깨지 않도록.
쿠르으으응!
쿠르으으으응!
공간이 갈라지며 천둥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공간을 가른다.
그 소리에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느껴지지 않던 육신의 감각이 돌아오고.
처음은 후각.
그다음은 촉각.
마지막으로 시각과 청각…….
하얀 공간이 검게 물들었고.
귓가엔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천응이었다.
시야가 어두웠던 것은, 천응이 날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
말을 하려는데 두툼한 털이 입을 막아 입을 벌리지 못했다.
순간 움찔한 천응이 울음소리를 그친다. 은은한 떨림으로 볼 때, 머리를 휙휙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녀석이 전율하듯 몸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끼엑!?”
아주 조심스레 내 몸에서 떨어지는 천응.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보인다.
“끼익! 끼이익!”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대충 날 걱정했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날 품에 안고 보살펴 준 천응의 털을 쓰다듬는다. 내가 뢰마유와의 전투가 끝나고 걱정 없이 정신을 놓은 것도 천응의 존재 덕분이다.
“고맙다.”
파르르.
천응의 몸을 쓰다듬으려 팔을 들어 올리다가 멈칫한다.
조금 다른 감각. 뢰마유와 싸울 당시의 육신보다 조금 더 무거워진 느낌이랄까?
“끼엑?”
걱정하듯 눈동자를 굴리는 천응.
마침내 날개 부근을 쓰다듬어 주자 안심한 듯한 천응의 울음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천응을 안심시켜 주고 있을 때.
“저, 저, 저기…….”
누군가의 목소리.
천응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어, 어이쿠! 죄송합니다……! 대붕님……!”
사람으로 따지면 어깨에 손을 얹고 노려보는 듯한 천응의 뒷모습.
그러고 보니 이곳은…….
‘의방인가?’
탕약 특유의 그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천응이 날 치료하고자 이곳에 데려온 것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노인장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한다. 천응은 날 보호하려는 듯이 같이 움직였지만, 괜찮다고 토닥여 준다. 약간 미심쩍다는 시선으로 천응이 살짝 물러섰다. 노인장이 깜짝 놀란다.
“모,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노인장께서 절 치료해 주신 겁니까?”
그 말에 노인장이 격한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닙니다요. 제가 한 것이라곤 하루에 한 번 멀찍이 서서 안색을 살피고… 탕약을 지어 드린 것밖에 없습죠……. 탕약도 사실 원기를 북돋아 주는 수준일 뿐이었는데… 스스로 쾌차하신 게지요.”
대충 상황 파악이 된다.
내가 쓰러진 것에 놀란 천응이 가까운 의방으로 날 데려온 것이다. 천응이 의방의 중심에서 날 품고 있었던 것을 보면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도주하려 했으리라. 내 상태를 살펴 준 의원조차도 경계했던 것을 보면, 천응은 내가 깨어날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으리라.
천응을 토닥여 주며, 노인장에게 인사한다.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폐라니요. 전설 속에서나 내려오는 대붕님을 뵙는 것만으로 제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노인은 진심 어린 표정.
그래도 폐를 끼친 것은 끼친 것이다. 의방 내에서는 다른 손님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혹, 저희 때문에 환자를 받지 않으신 겁니까?”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요.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저희 의방은 규모가 제법 되기에 다른 곳에서 환자들을 무리 없이 받고 있습니다요.”
“그래도 이 은혜는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이쿠, 보답이라니요. 아닙니다. 제가 어찌 신령님께 감히…….”
“…신령이요?”
“천목산(天目山)의 산신령님이 아니십니까?”
천목산의 산신령?
천응을 전설의 대붕으로 여기고 있으니 날 산신령으로 착각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상황이 아니지만,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안색을 살폈다고 하지 않았는가?
“착각이십니다. 전 신령이 아닙니다.”
“예에……? 시, 신령님이 아니시라고요……? 그런데 어찌 그렇게 빨리 몸을 회복하시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빨리 회복할 수가 없는데…….”
얼떨떨한 표정의 노인.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전 무림인입니다.”
“무림인 말입니까……?”
“예, 무림인입니다.”
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가 믿고 안 믿고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다. 그에겐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천응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되지만, 내가 원하는 수준의 상세한 대답을 들으려면 고생깨나 해야 할 것이다.
* * *
“역시 무림인은 대단하군요……. 천하의 영물을 다루시고… 보름 만에 그런 상처를 치유하시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 운…….”
노인장, 천목의방의 의원 율여산.
무림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절강성에선 퍽 유명한 의원이었다. 그는 지금도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단목장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그의 상태를 보았을 땐 곧 죽으리라 싶었는데, 하루하루 안색이 좋아지더니 오늘 깨어나게 되었다.
보통 병을 앓은 사람들은 깨어나더라도 쉽사리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단목장룡은 전혀 아프지 않았던 사람처럼 상쾌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무림인이라는 게 거짓일 수도 있어.’
신령님께서 직접 ‘나 신령이다.’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애초에 신령이 다칠 이유가 있는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천응의 존재를 목격한 이상 그 의심을 완전히 저버릴 순 없었다.
아무튼, 그런 율여산이었기에 단목장룡의 질문에 하나의 거짓도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뭐, 딱히 속일 부분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보름이 지났다라…….’
천응이 단목장룡을 태우고 의방에 도착한 지 보름. 율여산에게 물어보니 나찰마궁에 대한 소식은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요즘 절강성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인들에겐 나찰마궁주의 죽음이 알려졌을 수도 있겠군.’
여기서 사마련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찰마궁과 단목세가 두 세력만의 싸움으로 취급했었다. 무림맹이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청룡단에서 말했었다. 무림맹 차원에서 대응하게 되면 곧바로 정사대전의 발발이니 당연히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무림맹이 흑룡단과 청룡단을 단목세가의 본가에 파견한 것으로 이미 선택을 완료했다고 볼 수도 있었기에, 사마련의 반응에 따라 무림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리라.
‘하지만 예전처럼 촉박하진 않아.’
무림맹에선 마교와 사파가 연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단목장룡을 혈세귀막에 파견했었다. 이 상황에서 나찰궁이라는 큰 세력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마교나 사파에서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리라.
전쟁을 억제하는 것은 힘이다.
함부로 건들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 주면, 그들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오히려 약한 모습을 보여 주면 냄새를 맡은 도적 떼가 몰려들기 마련이었다. 공포가 적절한 균형을 맞추면 오히려 전쟁이 억제된다.
‘일단 나찰궁에 가서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단목장룡.
그가 일어서려 하자 율여산이 당황한다. 무인이든 신령이든 눈앞의 사내와 대화하는 것은 그의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였다. 대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라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리라는 은근한 믿음이 있었다.
“절 치료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은 곧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약재값과 의방 전체를 전세 냈던 것에 대한 보답.
단목장룡은 불려 놓은 돈이 많았기에 그 이상으로 율여산에게 보답할 생각이다. 그가 치료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시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급박한 율여산의 외침.
“보답이라면 혹시 금전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돈은 원하지 않습니다! 아앗, 제가 너무 크게 소리를…….”
율여산의 외침에 바깥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천응. 녀석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방 내부에까지 들려온다.
“그럼 무엇을 원하십니까……?”
“천목산에 대해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단목장룡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는 아직 나를 신령으로 보고 있구나.’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천응의 존재를 숨기려는 부분도 있었고, 만약 단목장룡이 이곳에서 치료받았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괜히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잠깐의 침묵이 긍정이라 생각한 율여산.
그가 퍼뜩 외친다. 신령께서 천벌을 내리실 수도 있지만, 이건 꼭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반년 전, 천목산의 하늘을 까마귀 떼가 뒤덮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하늘이 노하셨다고… 거대한 재앙이 대지를 휩쓸 것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전 그 부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정말로 재앙이 내려오는 것인지… 대붕님과 신령님께서 이 누추한 의방에 들르신 것은 혹 그 위험을 경고하시려는 것이…….”
가만히 듣고 있던 단목장룡.
그가 말한다.
“까마귀 떼라고 하셨습니까?”
“예에…….”
“혹시 그 이후엔 까마귀 떼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 그때의 상황이 너무도 기괴하여… 정말 태상노군께서 노하신 것인지…….”
단목장룡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건 아닌 듯하군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끼엑!”
다시금 소리를 빽 지른 율여산이 찔끔한다. 대붕의 분노는 그 소리만으로 원초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아보도록 하죠.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단목장룡의 진지한 눈빛에 율여산이 두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인다.
“예……!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대붕에 대한 것이나 저를 치료했다는 건 최대한 외부로 알리지 말도록 하십시오.”
꿀꺽!
진지한 단목장룡의 말에 율여산이 긴장한다.
그는 사실 처음 천응이 의방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 부분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대붕님을 본 소수의 사람에게 확실하게 입단속을 시켰다. 대부분 백성은 미신을 철석같이 믿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것을 자랑처럼 떠벌릴 사람들은 없었다.
하늘의 분노는 황제의 분노보다 무서웠으니까.
“예, 물론입죠! 감히 신령님의 행차에 누가 되지 않도록 평생토록 이 일을 함구토록 하겠습니다!”
율여산의 경건한 외침에 단목장룡이 고개를 끄덕인다.
“믿겠습니다.”
믿는다는 말에 감동하여 눈물이라도 흘릴 표정의 율여산.
뭔가 순진한 사람을 속이는 것 같아 재빨리 밖으로 나간다. 천응이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율여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붕님……!”
“…가자.”
“끼엑!”
천응의 등에 올라탄 단목장룡.
율여산은 감히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떠나는 두 사람의 방향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율 의원껜 적당한 보답을 해야겠군. 뭐, 이건 세가로 돌아가서 고민하도록 하고…….’
이미 높은 하늘에 오른 천응.
단목장룡의 눈동자에 달빛을 받아 기이한 느낌을 자아내는 산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산세가 험하고, 끝이 뾰족한 두 쌍의 거대한 산이 보인다.
동천목산과 서천목산.
까마귀 떼가 출몰한 곳은 서천목산이라 했다.
‘천자산과 같은 곳이 절강성에 또 있는 것인가? 천목산이라…….’
거리가 멀었기에 진이 설치됐는지는 여기서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거대한 세력이 산 위에 진을 설치했으며, 세상에 없던 강시를 만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시엔 단목장룡에게 중원이 넓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으음.’
고민하는 단목장룡.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가 편다. 확실히 주먹의 감각이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의 몸은 보름 동안 또 강해졌다. 환골탈태를 거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연옥이 주는 시련의 보상이 컸다.
또 그의 오른손에는 거대한 기운이 담긴 옥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더 채워 놓으면 좋겠지.’
다다익선.
천응이 서천목산을 향해 날아갔다.
* * *
“으으음…….”
밝은 달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당옥정.
나찰마궁주가 죽었다는 소식에 청룡단과 흑룡단은 무림맹으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차마 떠나가지 못했다. 기관진식의 완벽한 설치라는 핑계로 그녀는 단목장룡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천응의 존재를 알고 있는 당옥정의 걱정은 더욱 컸다.
나찰마궁주를 이겼다면 곧장 돌아와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단목장룡은 나타나지 않는가? 혹시? 설마?
상상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하다.
“후우우, 아니야. 믿어야 해.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면 안 돼……!”
불안한 심리 때문인지 바위의 사이에 쪼그려 앉아, 달빛을 머금어야 그 효과가 커지는 독을 제조하고 있었다. 그녀도 사천당문의 일원이기 때문일까? 독을 제조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그래도 이 불안감을 모두 해소할 수 없었지만.
짝짝!
당옥정이 제 볼을 강하게 친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
“아자아자!”
당옥정이 다시금 독 제조에 열을 올리려 할 때.
툭.
무언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렸고, 당옥정이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