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분석의 시작
“끼엑!”
천응이 위험을 느끼고 소리를 지른다. 단목장룡 또한 이제까지완 전혀 다른 위협적인 기분에 퍼뜩 아래를 내려다본다. 나찰궁의 사 층 그곳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정확히 천응을 향하고 있었다.
‘나찰마궁주.’
그가 드디어 관심을 드러낸 것이다.
“잠시 기다려.”
이 높은 하늘에 있다면 안전하다. 그가 능공허도라 불리는 허공을 밟는 경공을 펼치지 않는 이상에야 이곳에 닿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러한 경공을 펼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지배자라 불리는 천응을 따라잡을 순 없으리라.
어떤 반응인지 기다려 본다.
간을 보며 빠질 것인가? 아니면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릴 것인가?
단목장룡이 나찰궁의 전력을 크게 약화했다곤 하나 나찰궁 전체의 전력은 절대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사실 나찰마궁주 하나만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만은 없다. 최대한 그를 나찰궁에서 멀리 떨어트려 놔야 한다. 일대일의 승부로 만들어야 했다.
잠깐의 기다림.
창틀에 서서 단목장룡을 바라보던 나찰마궁주.
위에서 그를 지켜보던 단목장룡.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움직였다.
파아아아아앗-!
“천응!”
“끼엑!”
순간적인 번쩍임. 저 아래서 나찰마궁주가 하늘을 타격할 방법은 이것뿐이었으리라. 날이 잔뜩 선 암기. 그 속도가 가공할 만큼 빠르다. 천응이 재빨리 대응하지 않았다면, 암기는 정확히 천응에게 꽂혔으리라. 저 먼 거리에서 암기를 맞힌다? 나찰마궁주는 암기를 주로 익힌 무인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일정 수준에 오른 무인은 모든 것을 평균 이상으로 펼쳐 내곤 한다.
단순히 암기를 쏘아 내는 것 정도야 나찰마궁주에겐 일도 아니었다.
‘확실히 다르긴 하군.’
거리가 거리이다 보니 단목장룡이라면 쉽게 피해 낼 수 있었지만 나찰마궁주는 면적이 큰 천응을 노렸다. 천응의 날개에 닿았다면 순간에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으리라.
“천응, 도망간다.”
“끽!”
또다시 암기가 뇌전처럼 다가온다.
간발의 차이로 암기가 또 비껴 나가고, 천응이 황급히 방향을 틀어 나찰궁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천응을 도망가는 것을 본 나찰마궁주가 괴이한 미소를 흘린다. 참으로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는 표정. 처음엔 나찰마궁주 또한 착각했다. 적당히 큰 새일 뿐이라고. 하지만 암기로 거리를 가늠하고 그 크기를 머릿속에 그려 낸 순간. 하늘 위에서 기묘한 기운을 뿌리고 있던 저 새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됐다.
‘영물이로고.’
그 위에 또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놈은 사로잡아 죽이면 그만이었다.
영물이라는 것은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영초와는 전혀 다르다.
타닷.
그대로 궁주는 사 층에서 뛰어내렸다.
“구, 궁주님……!”
관허 법사가 황급히 창으로 뛰어내린 나찰마궁주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땅 아래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꺄아아악!”
“으아악!”
그러던 중, 저 멀리서 비명이 들려온다.
관허 법사의 시선이 먼 거리를 향했으며, 그곳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는 나찰마궁주가 있었다. 한 발짝을 디딜 때마다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간다. 흙먼지를 일으키고 그는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대체…….”
나찰마궁주는 뭘 보고 저리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것일까?
하늘을 향해 암기를 날린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모르니 출정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겠군.’
나찰궁에서 가장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제일 군사.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 *
쉬이이익-!
파아바아아앗!
적당한 거리가 되었을 때, 나찰마궁주는 암기를 출수했다. 이제까지 천응이 겨우 피해 내곤 있었지만 사실 위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암기엔 내력이 담겨 있었다. 닿는 순간 살점과 뼈를 관통할 것이 분명했다.
점차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단순한 경공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천응을 따라잡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단목장룡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극마에 오른 고수라면 저 정도는 하는 게 당연하다. 저것으로 놀랄 것 같으면 결코 이렇게 미끼를 던지진 않았으리라.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군.’
지치지도 않는지 더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은 나찰마궁주.
그의 전음이 하늘에 닿았다.
-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듯하더냐.
이 거리에도 전음을 보내는 것은 세밀한 내력의 제어와 막대한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나찰마궁주는 마치 물 쓰듯 내력을 펑펑 써 대고 있었다. 마정대흡인술로 수많은 이의 정기를 품은 그는 지금도 내력이 넘쳐났다.
“천응, 조금만 더 빨리.”
“끼에엑!”
천응이 소리를 지르며 날갯짓을 한다. 하지만 과거처럼 힘이 넘치는 날갯짓은 아니다. 꽤 오랜 기간 휴식도 거의 취하지 못하고 하늘을 날았던 천응이다. 거기다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암기를 피했으니 제아무리 천응이라도 지치기 마련이다.
- 장난은 이제 끝이다.
천응이 속도를 내자 아래서 뒤따라오던 나찰마궁주 또한 속도를 붙였다.
그의 몸에서 자주색의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일다경도 채 지나지 않아.
이젠 거의 따라잡힐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천응이 더 높은 하늘로 날았다면 쉽게 그를 따돌릴 수 있었지만… 단목장룡의 목표는 그게 아니었다.
“이노옴!”
성난 노호성이 대지서 천공으로 쏘아 올려지고.
그와 함께 내력을 가득 담은 암기가 솟아오른다. 그것은 공간을 가르며 이제는 천응을 가를 기세로 순식간에 천응의 지척에 도달했다.
단목장룡은 천응의 어깨를 툭 쳤다.
“고생했다. 저기 보이는 야산에서 쉬고 있어라. 끝나고 찾아가마.”
“끼…….”
조금 힘이 빠진 듯한 천응. 육체의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이젠 단목장룡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라!”
단목장룡이 천응의 등을 발판 삼아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가 지면으로 방향을 돌린 순간, 거대한 힘을 담은 암기가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카앙!
암기와 검이 부딪치며 굉음을 만들어 낸다.
잠시 주춤한 단목장룡이었지만, 대지가 만물을 당기는 힘은 거대하다. 단목장룡은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쿠웅!
대지에 닿은 단목장룡. 그의 앞에서 구릿빛 근육질을 자랑하는 민머리의 사내, 눈동자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는, 나찰마궁주 뢰마유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나찰마궁주에 대한 정보를 수차례 정독했지만, 저런 정보는 없었다.
푸른 눈동자와 관련된 것은…….
단목장룡이 생각을 이어 가려 할 때.
“맛있게 생긴 놈이로고.”
“…….”
“평소 남색을 즐기지 않는다만… 너 정도 사내라면 괜찮을 듯하군. 기특한 영약 덩어리가 몸소 이렇게 앞에 나타나다니 기특하기 그지없도다.”
음음.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찰마궁주.
당연히 단목장룡은 역겨움을 느껴야 했다.
스으으…….
뇌왕검이 뽑히고, 단목장룡이 그를 노려보며 말한다.
“네 아들이 죽어 갈 때, 살려 달라고 펑펑 울더군.”
“…….”
순간 흐뭇해하던 나찰마궁주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변해 간다. 그의 눈에 떠오른 푸른빛이 더욱 진해지며, 그의 몸을 둘러싼 자줏빛 기운 또한 농도가 짙어진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죽음의 기운, 그것에 닿은 식물들이 모두 생명을 잃어 나간다. 닿는 것만으로 생기를 빼앗기는 것이다.
“네놈이 단목장룡이로구나.”
단목장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존자는 그나마 낫더군. 제발, 궁주님을 건들지 말아 달라고 사정사정하며…….”
당연히 거짓이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커진 나찰마궁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 으레 고수가 가졌다는 참을성. 그에겐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즐거움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일단 네놈의 사지를 찢어 놓고 생각해야겠군.”
사지를 찢더라도, 상대의 정기를 취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저 불손한 놈에겐 알맞은 형벌이 되리라.
* * *
연옥(煉獄).
자미소는 나찰마궁주의 절전 무공이었다. 거대한 내력을 기반으로 단순히 무공을 펼치는 것만으로 진을 펼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잠기게 하는, 그 기묘한 힘이 담긴 자줏빛 기운은 이미 사방으로 뻗어 나간 상태.
공기가 무거워지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확실히 소궁주 뢰극찰이 펼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뚜벅뚜벅.
자줏빛 기운 사이로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보인다. 나찰궁주는 느긋한 걸음으로 단목장룡에 다가왔다.
“숨이 막히더냐?”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공간을 가득 메운 연옥의 연기는 그의 내력을 증폭시키고 분산시켰다. 바로 앞에서 말하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옆에서도 뒤에서도 그리고 위에서도 들려온다.
“네놈은 감히 그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네놈에겐 본 좌가 쾌락을 선사해 줄 수도 있었음을.”
까르르륵!
그가 손을 뻗자 연옥 내에 장난기 가득한, 또한 요사스러운 아이의 웃음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그의 내공은 지옥을 현세에 강림시켰다.
촤라라락.
나찰마궁주의 몸이 사라졌다. 연옥 내에선 그의 신체 능력이 극대화된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은 궁주의 신체.
그가 등장한 곳은 단목장룡의 뒤였다.
구오오오!
귀를 찢어 버릴 듯한 괴물의 비명. 그것이 들려오자마자 묵직한 것이 단목장룡의 등을 노렸다.
하지만.
그 거대한 기운이 단목장룡을 노렸음에도 어떠한 충격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연옥이 소음을 가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목장룡이 대항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
믿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분명히 이곳은 연옥 안이다. 아귀(餓鬼)들이 비명을 지르고, 끝을 알 수 없는 늪으로 잡아당기는 장소. 누구라도 이 안에선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이 현세에 강림한 부처 무처생불(無處生佛) 뢰마유가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연옥 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보골보골!
연옥의 기온이 높아진다. 대지 위 초록빛의 생명을 품고 있던 식물들은 모두 녹아 버렸으며, 끓어올랐다. 그것은 독(毒)이 되어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곳으로 탈바꿈시킨다. 압도적인 내공. 십 갑자에 달하는 나찰마궁주의 내력이 이 공간을 만들어 냈다.
연옥 밖으로 빠져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지옥을 선사하면 된다.
나찰마궁주의 몸에서 내력이 뭉텅뭉텅 소모된다.
물론, 아직 그 끝이 보이려면 멀었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단목장룡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까지 여유만만이던 뢰마유의 표정이 조급해진다. 놓친 것이 있던가? 어떻게 전혀 놈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는 말인가? 연옥이 아니더라도 단목장룡의 내력은 거대하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뢰마유의 감각은 둔감하지 않았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나찰마궁주는 그 격언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최근 난폭해지긴 했으나 전투에 한해서라면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무인이다. 그는 황급히 연옥을 빠져나갔다. 일단 놈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상쾌한 바람이 그의 피부에 닿은 순간.
“……!”
쿠릉!
천둥소리가 연옥 안에서 울려 퍼졌고, 현세의 지옥 연옥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숨조차 쉴 수 없이 농밀했던 그 자줏빛의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다시 연옥 안으로 들어가려는 뢰마유였지만…….
“헙!”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키고 만 뢰마유.
연옥 안에서 이제까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단목장룡의 거대한 기운이 하나의 점이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이제까지 그 일격으로 모든 적을 처단했던 기술.
유성일락이었다.
뢰마유는 황급히 천외여래수(天外如來手)를 펼쳐 손바닥으로 그의 검을 막아 냈지만, 유성일락은 닿는 순간에 극적인 힘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속도와 힘이 결합한 폭발력. 그 거대한 힘의 충돌이 뢰마유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갔다.
즈르르륵!
뢰마유가 밀려났다. 그는 결국 연옥에 다시 발을 디디지 못했다.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으며, 나찰궁주의 허락이 없다면 생존조차 불가능한 공간. 그 연옥이 자연스레 소멸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뢰마유의 표정.
그의 앞에는 단목장룡이 서 있었다.
뢰마유의 표정이 씰룩인다.
하지만 당황하거나 분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크크크…….”
“퉤.”
단목장룡이 검붉은 피를 뱉어 냈다. 아닌 척 연기하고 있지만, 연옥이 지닌 죽음의 기운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어찌 그 안에서 기척을 완전히 감추었던 것인지 지금도 알 순 없었지만, 연옥에 당한 순간부터 승기는 뢰마유 쪽으로 기운 것이다.
“속이 타들어 가느냐?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으냐? 지옥(地獄)이란 본디 그러한 곳이니 겁낼 필요가 없다. 받아들인다면 최소한의 고통만 받을 뿐이니.”
그의 몸에 또다시 자줏빛의 기운이 맺혀 간다.
첫 번째 연옥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깨져 버렸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천천히 그 속에서 단목장룡을 말려 죽이리라. 그리고 그의 정기를 깔끔하게 먹어 치우리라.
“또 그 연옥인지 뭔지를 펼칠 생각인가?”
“두렵느냐? 네놈에게 딱 맞는 형벌…….”
단목장룡이 어깨를 으쓱인다.
왠지 모르게 여유로운 그의 표정에 뢰마유가 의아함을 느낀다.
‘이 위화감은 뭐지……?’
단목장룡이 그에게 묻는다.
“일 할 정도인가?”
나찰마궁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내력이 많다곤 하지만 저러한 것을 펼쳐 내기 위해서 내력의 일 할 정도는 소모했을 듯하군. 이제 아홉 번 남은 건가? 아니지. 더 적겠군.”
나찰마궁주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의 분석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대체 어떻게 내력의 소모량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네놈……?”
“한 세 번 정도만 더 펼치면 나찰마궁이 자랑하는 자미소도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있겠군.”
스으으으…….
그의 손에서 자줏빛의 기운이 피어오른다.
“뭣이! 네놈! 어떻게 자미소를!”
펄쩍 뛰는 뢰마유.
순간 그의 몸 주변에 맺혀 가는 자줏빛의 기운이 크게 흔들린다.
자신의 절전 무공이 파훼되는 것을 넘어, 상대가 똑같이 펼치는 것을 보면 어떤 마음일까?
그 무공을 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까?
단목장룡은 뢰마유의 그러한 반응을 보고 내심 미소 짓는다.
그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 싸움에서 네 모든 것을 흡수해 주지.’
구결만 보아도 무공을 이해하는 수준의 단목장룡.
그의 지금 목표는 나찰마궁주 뢰마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