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책임을 지다
이른 새벽.
끼이익, 방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두 남녀가 나온다. 여인은 잠을 청하지 못했는지 하품을 했지만, 그와 반대로 피부엔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며,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피곤하지 않아?”
“응? 아냐! 전혀 안 피곤해!”
“그래도 이따가 조금이라도 자 둬. 본가에 기관진식을 설치한다면서?”
단목장룡의 걱정이 담긴 말에, 당옥정이 눈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해 주는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진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 단목장룡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응, 알겠어! 네가 가고 나서 잘게.”
“그래.”
단목장룡이 쓱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과거 당옥정은 그와 조금이라도 신체가 접촉되면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음미하려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감정을 교류하고 있을 때.
“어?”
누군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사실 단목장룡은 누군가 다가온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당옥정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옥정은 다르다.
“……!”
그녀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인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그녀의 입에는 음흉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어머? 설마 어젯밤에 둘이 같이 잔 거예요?”
“예.”
“아뇨!”
상반된 대답. 독봉 당용아가 당옥정의 허리를 꾹 찌른다. 깜짝 놀란 당옥정이 펄쩍 뛰어올랐다.
“단목 공자는 맞다고 하는데요, 우리 조카님?”
“…네, 맞아요.”
당옥정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시인한다.
당용아가 살짝 놀란다. 드디어 두 사람이 진짜 연인이 된 것인가? 사실 그러길 바라고 있긴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 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스러운 조카를 완전히 보내 줘야 하는가? 뭐, 언제까지고 자신의 품속에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무림맹에서 혼자 잘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미묘한 우울함을 훅 털어 내 버리고, 평소대로 당옥정에게 익살스러운 농을 건넨다.
“그래서 단목 공자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소감은 어때?”
당연히 당옥정이 당황할 줄 알았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는 조카를 보는 것이, 당용아의 낙이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놀려 주는 맛이 있었다.
그러나 당옥정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말한다.
“좋았어요.”
“응?”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황홀하면서 따스하고 또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었어요…….”
“…….”
이제는 당용아가 당황한다.
당옥정이 저리 당당하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용아가 슬쩍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그는 작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을 뿐이다.
당용아가 침을 삼켰다.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 * *
가주에게 인사를 올린 뒤, 가문을 나섰다.
밖에선 당옥정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와 함께 천응이 있는 곳까지 향했다. 그녀에게까지 천응의 존재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난 천응에게 당옥정의 얼굴을 기억하라고 명했다.
혹시나 그녀가 천응을 부려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천응에겐 당옥정을 나처럼 대하라고 명했다. 천응은 당옥정의 얼굴을 기억하려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았고, 당옥정은 살짝 긴장하며 천응의 앞에 서 있었다.
“천응한테 명령해 봐.”
“으음…….”
무엇을 명령해야 할지 고민하던 당옥정.
“앉아!”
그러자 천응이 휙 자리에 앉는다.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닌 듯하긴 했지만…….
“와……!”
당옥정은 사람의 말을 영민하게 알아듣는 천응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 이런 영물이 있긴 하구나…….”
“나도 놀랐어.”
“그래도 천응이가 있으니까 만약 위험한 일이 벌어져도 금방 도망칠 수 있겠지?”
“어떤 고수도 하늘을 가르는 천응을 잡진 못할 테니까.”
“다행이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일까?
당옥정은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으응……!”
그녀에게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내가 진정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마교라는 말에 당옥정은 상당히 놀랐지만, 난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했다. 내가 지금 어떤 경지에 올라와 있으며, 또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내가 가진 재능이 어떠한 것인지 그녀에게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녀 또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모두 고백했다
사실은 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만약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삶을 꾸려 나간다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를. 뇌왕과 당용아의 이야기 또한 그녀에게 들었다. 두 사람은 사랑했지만, 결국 혼인하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겪게 되었다.
난 그녀에게 약조했다.
절대 뇌왕처럼 덧없는 죽음을 맞이하진 않으리라고.
언젠간 작은 장원에서 함께 삶을 꾸려 나가자고.
그녀는 나를 믿어 주기로 했고, 난 그녀의 믿음에 보답하기로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깊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마지막엔 결국 육체의 사랑을 나누었다.
사실 예전의 나였다면, 단둘이 방 안에 있었더라도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리라. 만에 하나라도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녀에겐 깊은 상처로 남을 테니까. 난 한 번 죽어 보았기에, 죽음이 얼마나 갑작스러운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생각했다.
나중에. 언젠간.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난 뒤에.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난 아무것도 책임질 것이 없어진다. 감정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 비겁하게 미래의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책임을 짊어지기로 했다. 그녀 또한 나를 믿어 주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 책임을 나누기로 했다.
모든 진심을 보였기에 난 그녀에게 잠시 떠난다고 말할 수 있었고, 그녀는 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당옥정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내 앞으로 다가와 눈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입을 맞춰 나갔다. 과거엔 나와 입을 맞추면 몸이 굳고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던 당옥정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쌌고, 나 또한 그녀를 안아 주었다.
청아한 풀의 향이 코를 간질인다.
따스함이 몸에 전해진다.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재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크릉!”
뭔가 심통이 난 듯한 천응의 콧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나와 당옥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 *
“존자님, 지부 내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낌새를 파악하고 도주한 것 같습니다.”
“쥐 새끼 같은 정파 놈들.”
백광 존자가 이를 갈았다.
나찰마궁의 삼대 존자로 나찰마궁주의 명을 받아 단목세가의 지부를 몰살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단목세가 안휘성 회녕 지부. 나찰마궁이 있는 절강성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지부였다.
명령을 받자마자 달려왔지만, 나찰마궁의 위엄에 꼬리를 내린 정파의 쥐새끼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하지만 이들이 도주했다고 하여 다시 절강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찰마궁주의 명령은 절대적. 그가 지부를 멸하라 했으니, 지부원들을 모두 죽여야 했다.
“어디로 도주했는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아보아라.”
“예, 존자님!”
궁도가 존자의 명을 받고 재빠르게 움직인다.
그는 회녕현을 돌아다니며 단목 씨를 가진 놈들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흔적을 찾아온 궁도가 백광 존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놈들이 회녕현을 떠난 지는 하루가 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상되는 도주지는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현입니다.”
“합비? 남궁세가의 등 뒤에 숨겠다는 말인가? 약삭빠른 쥐새끼들…….”
“어찌할까요?”
백광 존자가 뭘 묻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수하를 노려본다.
“어쩌긴 뭘 어째? 추격한다. 감히 본 궁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 줘야지. 합비에 도달하기 전에 놈들을 사로잡는다.”
“존명!”
명이 떨어졌다.
존자가 이끄는 나찰마궁의 정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루 정도의 차이는 경공으로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모두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사내는 모두 죽인다.
그리고 여인들은 범하고, 정기를 빼앗는다. 그것이 나찰마궁의 방식이다. 완성된 마정대흡인술을 활용할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궁도라면 사내의 정기까지 취할 수 있으리라.
“이틀 내로 그들을 따라잡는다. 만약 지치는 놈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부숴 주겠다.”
살벌한 백광 존자의 말이었지만, 궁도들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약탈’의 기대감으로 가득 찬 상태였으니까.
“존명!”
나찰마궁에서 키워진 인간 같지 않은 괴물들이 먹이를 찾아 달려 나갔다.
* * *
“지부장님, 식솔들이 많이 지친 듯합니다.”
단목세가 회녕 지부 지부장 단목원. 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뒤를 돌아보니 아녀자들과 나이가 많은 이들이 거친 숨을 내쉬고, 지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부를 구성하는 이들 모두가 몸을 단련하는 무림인은 아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나흘 동안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지치는 것이 당연하다. 당연히 지부장도 그들을 배려하고 싶었지만…….
‘나찰마궁…….’
얼핏 들어온 그들의 소문은 극악무도 그 자체다.
여인을 간살하는 것은 기본이며, 심지어는 사내가 사내를 범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또 상상만으로도 역겹지만,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그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 나찰마궁과 비견되는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까지 얼른 도달해야 했다.
“어이쿠, 영감!”
노인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다. 지부에 말이 있었고 회녕현을 떠날 때 최대한 말을 데려왔지만, 모두가 말 위에 올라탈 수는 없었다. 지부에서 청소나 잡무를 맡아 열심히 살아가던 그였지만, 이 같은 강행군을 지금까지 버텨 낸 것만으로도 용하다고 할 수 있었다.
능 노인은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자 끝끝내 말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꾸역꾸역 걸어온 사내였다.
“괜찮으세요?”
“죄, 죄송합니다……. 얼른 일어나겠습니다…….”
능 노인이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킨다.
지부장은 식솔들의 표정을 살핀다. 대부분 넘어진 노인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이 잠시의 휴식에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지부장은 그들에게 반 시진의 휴식을 선언했다.
식솔 모두가 탄성을 내지른다. 평소 수련으로 단련된 무인들도 똑같은 반응이었으니 얼마나 강행군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후우, 그래. 한 시진 정도라면…….’
지부장도, 능 노인과 같은 지친 이들을 업기도 하며 지부의 두꺼운 장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휴식한다.
그렇게 꿀과 같이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이 잠깐의 휴식 탓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이 휴식이 아니었더라도 조만간 그들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도주하는데, 나찰마궁의 정예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민머리의 근육질 사내들.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꺄아아아악-!”
여인의 비명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간신히 눈을 붙였던 무인들도 벌떡 일어서 검을 뽑았다.
“이런!”
지부장이 탄식에 가까운 말을 외치며,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달려 나간다.
그곳에서 오십 명에 달하는 흉흉하면서도 괴이한 눈빛을 한 괴승들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사방을 훑었으며, 지부장은 그들이 여인을 찾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이대로 있다간 지부의 여인들이 모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리라.
무인들은 목숨을 걸어 저 괴승들을 막아야 했다.
“모두 앞으로!”
지부장의 외침에 지부의 무인들이 앞으로 달려 나온다.
그들이라고 왜 겁이 나지 않겠는가? 왜 죽고 싶겠는가? 하지만 피가 섞인 가족들과 가족같이 지내 온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무인의 숙명이다.
“우리가 막을 동안 모두 도망치도록 하라!”
처음엔 지부장을 두고 도망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식솔들이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얼른!”
지부장의 외침에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다.
휴식을 취했기에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됐다.
‘내가 막아 낸다면… 저들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부장이었지만…….
“클클, 어딜 도망치려고!
“꺄아아악!”
지부장이 휙 뒤를 돌아보자 이미 뒤편에도 괴승들이 흉흉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퇴로가 막혀 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회녕 지부에 투입한 것인가?
“목숨을 바쳐 싸워라!”
분노한 지부장이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컥……?”
흉터가 가득한 사내.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대체 언제……?
아릿한 고통이 아랫배에서 느껴진다.
“커허어억…….”
“걱정하지 마라. 당장 죽이진 않을 테니.”
“너… 는…….”
지부장은 고통보다도 모멸감에 휩싸였다.
오십 평생을 무공 수련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흉터 괴승의 접근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으며, 일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몸은 백광 존자라 한다.”
지부장은 생존을 위해 최대한 생각했다.
저들이 당장 죽이지 않는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인질로 삼아 단목세가를 협박하겠다는 걸까? 그렇다면 당장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살아만 있다면 언젠간 기회가…….
피식.
백광 존자가 잔인한 미소를 짓는다.
“재밌는 걸 보여 주도록 하마.”